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15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15화(815/863)
제815화. 러더포드의 마지막
해가 떠올랐다.
다몬은 밤이 사라지고 새벽이 다가오며 아침이 들이닥치는 경이의 순간을 가만히 지켜봤다.
특별할 것 하나 없던 광경이 특별해 보이기 시작한 순간, 다몬은 자신이 삶에 미련이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렇지 않고서, 이런 감정을 느낄 리 없으니까.
달깍.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시종들이었다. 고급스러운 티 세트를 은 쟁반에 받쳐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다몬은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지막 순간 미련을 느낀 대상이, 고작 변해 가는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이라니. 우스웠다.
“다몬 왕이시여. 아침이 밝았습니다.”
조르륵.
주전자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찻물은 은근한 꽃 내음을 품고 있었다. 시종들은 정갈한 손짓으로 이를 갈무리하여 작은 비스킷 하나와 함께 건넸다.
“식기 전에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차가 식으면 심장을 옭아매는 고통이 더 강해지고, 볼썽사납게 피 토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죽어 갈 것이니까.
다몬은 찻잔을 들고서 습관적으로 향을 음미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차를 들이킨 뒤, 씁쓸한 뒷맛을 씻기 위해 비스킷을 잘라 먹었다.
“누우시겠습니까?”
다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에 누웠다.
시종들이 천천히 이불을 덮어 주었고, 그의 얼굴에 천을 올렸다. 조금씩 옅어지는 숨결. 시종들은 숨죽인 채 온 신경을 집중했다.
“…….”
다몬의 손끝이 몇 번 움찔거리더니, 이내 완전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시종들은 티 세트를 정리하며 바깥의 병사에게 상황을 알렸다.
“다몬 왕이 죽었습니다.”
런크비스의 마지막 혈통, 동시에 오래전부터 이어 온 버고스와의 악연이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시종들이 물건을 치우며 나갔고, 의사가 그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천으로 시체를 감쌌다.
부우우-!
한편, 러더포드는 창밖에서 들리는 낯선 신호음에 고개를 들었다. 조용하던 마탑 곳곳에서 발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다몬이 죽었나?’
맞는다면, 이제는 자신의 차례이리라.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이지.’
이안 베로시온의 행동들이 말이다.
자신이 동결되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렇지 않고서는 무언가 확실하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었다.
러더포드는 의미 없이 족쇄를 흔들어 보았다. 철컥- 철컥- 쇳소리를 따라, 옛 기억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나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이안 베로시온, 미래에서 온 바리엘의 황제. 그것을 묻는 듯하였는데, 혹 자신이 그걸 잊었다 여기는 걸까? 내게 물을 먹인 것은 또 무슨 의미지?
러더포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히 뭔가 있다.
분명히…….
철컥.
“러더포드. 처형의 시간이다.”
병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러더포드를 일으켰다. 반항이 있을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그는 순순히 따라나섰다. 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족쇄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쪽으로.”
마탑 밖으로 나온 러더포드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황궁의 전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황궁의 마법사였던 ‘반도르’의 기억은 희미해졌어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본궁에 침입했을 당시엔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었는데…….
‘변한 게 없군.’
…정말로 변한 게 없어.
러더포드는 호송 마차에 오르며 웃음을 흘렸다. 병사들은 그가 재갈을 제대로 물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 처형식이 이루어질 본궁으로 향했다.
* * *
“하아암. 이안, 폐하께는 언제 보고드릴 셈인가?”
로만드로가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에이린을 클리포포드로 보낸 일을 이르는 게다. 이안은 보고서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서 로만드로를 올려다봤다.
“…로만드로 님. 그에 관해서는 완전히 함구하십시오. 로만드로 님도 모르는 일인 겁니다.”
진 또한 모르는 일이고.
로만드로는 뒤에서 진과 이안이 말을 맞춰 놓은 것으로 ‘착각’하는 듯했다. 따로 언질하지 않았으니 그리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그에 로만드로는 걱정하지 말라며 제 입을 지퍼 잠그듯 끌어당겼다.
“아이고, 알지. 알아! 비밀이 생명인 작전이니까.”
“제가 나중에 시의적절할 때 말씀드릴 것입니다.”
‘나중에’라는 말이 좀 걸렸지만, 로만드로는 개의치 않아 하며 넘겼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당장은 러더포드의 처형식을 치르는 게 우선이고, 마법부의 마력석 독점 건으로 황제와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난 고관들이 이걸 좀 서둘러 알았으면 좋겠네. 마력석 독점 건으로 자네가 날을 세우고 있어도, 결국에는 폐하를 위하고 있다는 걸 말이지.”
“로만드로 님. 사족입니다.”
“미안하네. 이제 진짜 그만하지.”
로만드로가 한쪽 눈을 연신 찡긋거리며 웃어 댔다.
“아 참, 다몬 왕의 처형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네. 마법사들이 동결 마법을 걸어서 카일라 대표에게 인계하였다는 것까지 보고가 들어왔어. 전날 카일라 대표와 다몬 왕이 필담한 것도 간단히 검토했는데, 별거 없었네.”
버고스의 왕이었던 자와 왕이 될 자가 나누는, 허심탄회한 대화가 주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러더포드 처형식까지는 한 시간 남았네. 슬슬 출발하는 게 좋겠어.”
이것만 끝나면 굵직한 국가적 행사 하나가 막을 내리게 된다. 로만드로는 오랜만에 자택으로 퇴근하여 가족과 저녁 식사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안 역시 역시 남은 서류 작업을 마무리하고는 웃옷을 들고 일어났다.
“예, 갑시다.”
황궁 곳곳에는 낯선 마차가 즐비했다. 처형식에 초대받은 중앙 귀족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색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고서 본궁에 들어섰는데, 처형식이 아니라 파티가 열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클로이 영애.”
“안녕하세요, 부인.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클로이 영애도요. 좋은 소식 있다 하던데.”
“어머, 들으셨어요?”
“그럼요. 중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클로이는 보란 듯이 반지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만한 소란을 떨었으니 당연한 것 아니냔 뼈 있는 말이었지만, 클로이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물론 옆에 서 있던 다비온 백작은 뒤로 넘어갈 것처럼 안색이 안 좋았지만.
“폐하께서도 어서 반려를 맞이하셔야 할 건데요. 안 그래요, 아버지?”
클로이는 다비온 백작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신호했다. 할 일은 해야 할 것 아닌가? 국혼을 건의하기 위해서 밑 작업을 해 두는 것. 그게 바로 오늘 클로이의 목적이었다.
다비온 백작은 착잡한 투로 대꾸했다.
“…뭐, 그렇지. 폐하께서 장성하셨으니 황후 자리를 오래 비우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바리엘이 더욱 견고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부분이기도 하고. 크흠.”
사실 백작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처형식에 오면서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꾸민 이유? 승전의 기쁨을 누린다는 표면적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에는 황제의 눈에 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침 유력 후보였던 카일라와 클로이가 경쟁 상대에서 제외되었으니, 혼기 찬 여식을 둔 귀족들은 이때다 싶어 눈을 번뜩였다.
“오, 저기 이안 장관이군요.”
“이안 장관은 지금 몇 살이지요?”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꿈 깨세요.”
“아니, 뭐, 묻지도 못 합니까?”
이안은 마법사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행사장 곳곳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를 둘러싼 갖가지 말들이 은밀히 피어올랐다.
“요즘 들어 황제 폐하와 사이가 안 좋다고 하던데.”
“얼마 전까지 쓰러져 있었다지요? 건강상의 문제도 있다 합니다. 그 증거로 이번 행사 때 주도해서 마법을 쓰지 않는다고.”
“정말이요? 아쉽네요. 그럼 장관직에서 내려오는 것입니까?”
“그래도 공이 있는데. 당장은 아니겠지요. 아직 나이가 어리니 금방 회복될 여지도 있고.”
“참, 그 얘기는 들으셨나요? 폐하께서 이안 장관에게…….”
클로이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시끄러운 소란 속에서 정보를 수집했다. 어떤 망할 것들이 이안 장관을 음해하려 하는지 알아 두겠다는 듯 말이다. 적어도 내가 시아오시와 결혼식을 올릴 때까진, 그 누구도 이안 장관을 건드릴 수 없다. 건드리면 너 죽고 나 죽는……!
“어머! 카일라 영애네요!”
안 그래도 이안 장관을 씹어 대는 것 때문에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 걸렸다. 클로이는 눈을 확 부라리며 경고했다.
“조심하십시오. 버고스의 대표입니다. 돌아가면 왕위를 이으실 분인데, 영애라니요.”
“그,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흥. 클로이가 고개를 돌리자, 그들은 ‘쟤 왜 저래?’ 하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황제가 등장했다. 말끔하고 화려한 정복과 달리 얼굴이 어두웠다. 누군가 이를 인지하기도 전에, 전언 마법으로 안내가 들려왔다.
-모두 착석해 주십시오.
곧 처형식이 시작되려나 보다.
황제를 비롯한 각국의 사절단들은 단두대와 눈높이가 같은 객석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봤다. 카일라는 낯익은 귀족들과 눈인사를 나누면서도 위엄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먼저 평화 협정문 낭독이 있겠습니다. 가이아의 혼란을 물리고 평화만을 기리기 위해 각국의 대표들은 협정문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고…….
황제를 시작으로, 사절단들이 손을 들고서 협정문을 낭독했다. 귀족들은 적당한 지점에서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
“확성 도구.”
이안이 손을 튕기며 마법사들에게 신호했다. 이에 진은 마법사들이 준비한 마도구 앞에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객석의 모든 이들이 황제를 주목했다.
“러더포드를 데려와라.”
“예, 이안 님.”
그럴수록 뒤는 더욱 바빠졌다. 마법사들이 달려가서 대기하고 있던 러더포드를 끌고 왔고, 이안은 그를 위아래로 살피며 무언가 특별한 위험은 없는지 검사했다.
-…하여 우리는 지금, 가이아 전역을 혼란으로 밀어 넣어 지하신의 수족을 자처하고 바리엘을 무너트리고자 했던, 악독한 자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이자의 비명을 머리에 새기고, 이자의 피를 가슴에 새기길 바란다. 바리엘을 위협하는 자에게 어떠한 최후가 있었는지를.
“올려라.”
“이안 님, 재갈 안 풉니까?”
마법사의 물음에 이안이 잠시 멈칫했다. 처형 직전, 죄를 뉘우치냐는 황제의 질문이 있을 예정이었다. 어떠한 답을 내놓든 처형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이안 님?”
“풀어라.”
철컥.
재갈이 풀리자, 러더포드는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며 턱을 좌우로 돌려 댔다. 처형집행인이 그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고, 러더포드는 이안을 돌아보며 웃었다.
“잘 있어라, 이안-”
“어서 가!”
“아아, 이런.”
마지막 인사도 못 하게 하나? 냉정하기는.
러더포드는 비척거리며 단두대 위에 올라섰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수군거렸고, 정면에선 황제와 사절단들이 낯빛을 굳힌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러더포드. 네놈은 지하신의 간계에 빠져 가이아를 어지럽힌 죄를 인정하는가?
“내게 죄가 있다면 패배한 것이지, 다른 게 있지 않다.”
“저, 저런! 괘씸한!”
“뚫린 입이라고!”
러더포드는 무릎을 꿇으며 단두대 위에 고개 숙였다. 어서 목을 치라는 듯이.
“잘난 척하기는. 솔직히 네놈들은 이안 베로시온이 없었더라면 진즉 다 죽어 지옥의 밑자락을 구르고 있지 않았겠나? 신께 감사 기도나 올려라.”
“……!”
“……!”
술렁거림이 단박에 멈췄다. 모두 숨조차 쉬지 않고 굳어 버렸다. 다들 지금 자신이 뭘 잘못 들었냐는 듯. 하지만 러더포드는 이를 신경 쓰지 않고 온힘을 다해 외쳤다.
“이안 베로시온을-”
“저, 저-!”
“어서! 어서 칼날을!”
미친놈! 집행자들은 러더포드가 더 허튼 말을 하기 전에 목을 잘라 내기 위해 서둘러 안전장치를 풀었다.
“바리엘로 보내준 것을 말이지.”
촤아아악!
칼날이 빠른 속도로 내려와 러더포드의 목을 내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