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2
제82화. 굴라의 맛
메렐로프 백작은 인상을 찌푸린 채 테이블 위를 노려보았다. 낡고 작은 주머니 입구가 활짝 열려있었는데, 굵직한 굴라 씨앗이 들어있었다. 다 해서, 쉰 개나 될까 말까한 개수.
“이것들이 자그마치 금화 열 다섯 닢 짜리란 말이지?”
백작은 습관대로 머릿속으로 계산부터 굴렸다.
클라크는 리엔처럼 노예 상단이 영지를 지나갈 때 사들인 노예였다. 젊고 힘 있는 노예는 구하는 것부터가 아쉬운 일이었기에, 당시 금화 열다섯 닢이나 주고 데려왔었다.
하지만 노예라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값어치가 계속 떨어질 것이니, 장기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굴라와 맞바꾼 것이 절대적으로 이득일 테다. 지금처럼 굶주리는 시기라면 더더욱.
“그쪽에서 말하기를, 한 포대에 쉰 닢 이하로는 절대 거래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일단 급한 불이나 꺼보라며 이리 내주었습니다.”
“참나,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다니. 양이 적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굴라를 구입했다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걸까. 집사는 주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채 고개만 조아렸다. 무엇이 되었든 핏줄에 돈이 흐르는 자였다. 마음에 들 리 없지.
메렐로프 백작 부인이 담뱃대로 입구 자락을 스윽 들어 올렸다.
“노예증서를 써주었나?”
“간단히 서명만 했어요. 사안이 급한지라, 공증은 시간 나면 천천히 하기로 하고.”
“흥. 어린 것이라 역시 멍청하군. 누가 증서 이전을 나중으로 미루나? 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래서 이렇게 굴라를 얻었으니, 저희에게는 좋은 일이지요.”
백작은 대꾸 없이 굴라 알만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평소에는 존재만 인식했던 터라, 이리 자세히 보는 게 처음이다. 장장 수십 년을 살아왔음에도.
“그래서, 이걸 어떻게 먹는다고?”
“생으로도 먹고, 삶고, 굽고, 찌고, 볶고. 무궁무진하다고 합니다. 주방으로 내려보낼까요?”
자그마치 금화 열다섯 닢짜리 물건이었다. 아무리 쓰레기 잡풀이라 한들, 값을 치른 마당에 천것들 입으로만 가게 할 순 없었다.
“두 개만 요리하고 나머지는 다 정원에 심어라.”
“네. 주인님.”
두 개라 하면 백작과 백작 부인의 몫을 말하는 걸 테다. 집사가 꾸벅 인사하며 주머니를 가져갔고, 메렐로프 부인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남편에게 바짝 붙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중앙에서는 이미 굴라를 많이 먹는다고 하던데요?”
“다 헛소리지. 이안 그놈이 영지민들 먹이려고 퍼트린 소문이야.”
“정말 그럴까요? 로만드로라는 자 역시 그닥 거부감 있어 보이진 않았어요.”
영지에는 이미 뜬 소문이 즐비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확실한 것은, 맛이 굉장히 좋다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브라츠 영지민들이 환장해서 농사짓고 삼시 세끼 굴라를 챙겨 먹을 리 없지 않나.
똑똑.
“간단한 굴라 요리를 올립니다.”
“어서 들어오거라. 음. 냄새 뭐지?”
“브라츠에서 주워들은 요리법으로 해왔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맞지 않으면, 네가 맞겠지.”
하인의 공손한 말에도 백작의 대꾸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뒤로 물러서는 하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보기에는 퍽 좋군.”
“그러게요. 잡풀이라 말 안 하면 모르겠어요.”
설탕 소스와 함께 바짝 구워낸 것에서는 달작지근한 향이 가득했으며, 가장자리는 노릇하고 바삭하게 익어 있었다.
삶은 것은 또 어떠한가. 푸딩처럼 탱탱하고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모습이다.
하인은 칼로 조금씩 썰어서 백작과 백작 부인 앞에 내밀었다. 사실 크기가 달걀보다 작아서 자른다는 게 의미가 없긴 했지만.
“여보. 먹어봐요.”
백작은 탐탁지 않아 했지만, 조심스럽게 조각을 입에 가져다 댔다. 평소 굴라의 이미지가 있었기에,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어쩌겠는가. 무려 금화 열다섯 닢! 돈 주고 샀으니 맛이라도 봐야지.
“음?”
인상 쓰며 우물거리던 백작이 멈칫거렸다. 혀를 타고 싸악 내려가는, 처음 느껴보는 맛. 부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매를 휘며 웃었다.
“맛이 꽤 괜찮지요?”
“…생각보다는.”
“이쯤 하니, 중앙에서 유행한다는 게 영 뜬구름은 아닌 모양입니다. 어서 한 달이 지나 제대로 된 요리를 맛보고 싶군요.”
부인이 포크로 조각을 깔끔하게 긁어먹자, 백작이 콧수염을 매만졌다. 인정하기 싫으나 어쩔 수 없다. 확실히 난생처음으로 맛보는 진미 아닌가.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한 후에 집사를 돌아봤다.
“소문이 돌지 않게 철저히 함구하거라. 그리고 정원에는 경비를 교대로 세워두는 게 좋겠다.”
“네. 백작님.”
분명 눈독 들이는 자가 있을 것이다. 명색이 안주인이라는 부인도 헛소문을 믿고 있는데, 배운 것 없는 무식한 놈들이 굴라를 어찌 생각하고 있을지는 빤했다. 자그마치 금화 열다섯 닢짜리 작물이니, 철저하게 관리하는 게 마땅하다.
“그리고 집사.”
“네. 주인님.”
백작은 입가를 스윽 닦으며 지시했다.
“저녁에 두 알 더 올리지.”
“무엇을 말씀입니까?”
“굴라 말일세.”
“아.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요리법으로 해보라는 백작의 말에, 집사는 사색이 되었다. 자루에 든 것도 얼마 없던데 저런 식이면 거덜 나는 것도 한순간이지 않을까 걱정도 있었지만, 그보다 입맛에 맞추지 못해 매질을 당할 것이 두려웠던 탓이다.
끼익.
집사는 한숨을 내쉬며 복도로 나갔고, 사용인들 역시 끝으로 물러났다. 백작과 부인 사이에 숨 막히는 침묵이 팽배했다.
“와인을 따라 드릴까요?”
“가서 무슨 얘기를 했지?”
“보시다시피, 아주 유익한 대화요.”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편의 빈 잔을 가져왔다. 와인 코르크를 열자, 하인이 다가왔으나 그녀는 시선으로 거절했다. 직접 술을 따라주며 브라츠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나눴다.
“…해서, 메리 부인의 방도 확인해 봤죠. 아무래도 없더라고요. 그 소란 속에서 소실된 게 당연하지만.”
“죽은 반역죄인의 물건을 가져와서 무엇 하려고?”
“그래도, 원래 제 물건이었으니까.”
백작은 평소보다 더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으나, 굴라를 가져온 게 생각보다 큰 것 같다. 부인이 돌아오기 전에는 당장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충동뿐이었는데, 지금은 차분하게 와인만 음미하니 말이다.
달깍.
“아, 실례했습니다.”
“쯧.”
한껏 가까운 두 사람의 거리에, 식기를 치우러 들어온 하인이 사과하며 밖으로 물러섰다. 메렐로프 백작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한 순간. 부인은 재빨리 남편의 술에 가루를 솔솔 뿌렸다.
“리엔.”
“네. 말씀하세요.”
“하지만 두 번은 없어. 다음에도 해가 져서 귀가하면 발목을 부러트리겠다.”
“…다음이랄 게 있나요? 이제 제가 브라츠로 갈 일이 없죠. 있다 한들 당신과 함께일 것이고요.”
‘그리고 네놈은 송장이 되어있겠지.’
“대답.”
“알겠습니다.”
백작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고, 와인 잔을 들었다. 부인 역시 마찬가지. 가볍게 잔을 부딪치며 생긋 웃을 뿐이다.
* * *
“음…….”
“상태는 좀 어떤가?”
이안은 의사를 불러 베릭의 상태를 진단하게 했다. 잠꼬대는 간간이 해댔지만, 이상하게 깨어날 기미가 안 보여서였다. 흔들어대도 정신을 못 차리니, 원.
의사는 베릭의 상태를 살펴보며 대답했다.
“수면 중인 건 맞습니다. 피로가 워낙 쌓여 있다 보니 쉽게 못 일어나는 걸 수도 있겠군요. 약이 뭐라고 하셨죠?”
“하완에서 새로 유통되는 마약이라, 성분은 자세히 모른다네. 하지만 수면용 환각제라는 것 같았어. 한 달 정도 과복용하면 무호흡으로 사망하는 약이라 하던데, 베릭은 가루 냄새만 맡고 이리 기절했으니.”
“체질적으로 약이 안 받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그 정도가 좀 심하긴 합니다만, 음용한 것이 아니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수면용 환각제라 조금 조심하셔야 할 게…….”
의사는 베릭의 손등에 수액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마취 효과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게 정확히 어떤?”
“정신을 완전히 차릴 때까지 잠꼬대나 잠버릇, 심하면 몽유병 환자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는 거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로만드로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베릭이 몽유병 증세를 일으키면 진짜 난감했다. 성격은 성격대로, 체력은 체력대로 감당하기 힘든 자 아닌가.
“이안, 그, 쇠사슬이라도 갖고 와서 묶어두어야 하지 않겠나?”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효과가 좋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그리고 베릭 저놈이 아무리 날고뛰어봤자 사람 아닌가. 쇠사슬을 손으로 끊을 수도 없을 텐데, 뭐.”
로만드로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후다닥 밖으로 나가며 사용인들을 찾았다. 아주 크고 튼튼한 사슬을 갖고 오라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려왔다.
“흐에, 으헤헤…….”
그런 처지도 모르고, 베릭은 무슨 꿈을 꾸는 건지 헤벨레 웃으며 입맛을 다셔댔다. 의사는 수액 바늘이 들어간 손등에 반창고를 붙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체력 보강을 하는 수액입니다. 내일 점심 중으로 안 깨어나면 다시 호출해 주십시오.”
“옆구리 상처는?”
“아, 상처요?”
이안의 말에 의사가 어이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예쁘게 아물었습니다. 그래도 안쪽은 덜 아물었을지도 모르니 항시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하라고 해서 들을 자가 아니라.”
“그래도요. 연락 주십시오.”
“수고했네. 들어가지.”
끼익.
의사가 나가자, 이안은 다시 책상에 앉아 서류를 펼쳤다. 벽난로 타는 소리와 함께 베릭의 호흡만 조용히 울리는 방. 한참 집중하던 이안은 뭔가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베릭 쪽을 쳐다봤다.
“아.”
깜짝이야.
베릭이 두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이안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안이 움찔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수액 효과가 좋긴 좋구나.”
“…나 여기 왜 누워있지?”
“리엔 부인의 분첩 냄새 맡고 기절했다. 의사를 다시 불러야겠군. 어디 몸 안 좋은 곳은 없나?”
베릭은 천천히 일어나서 멍한 표정으로 창가에 걸어갔다. 그리고 나지막이 한숨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하아, X발 진짜.”
“베릭?”
“나 지금 꿈꾸고 있나?”
“아니. 깨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눈 깜빡이는 게 느릿느릿, 눈동자에도 총기가 없다. 혹여 저것이 몽유병의 일종인가? 베릭은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대며 잠을 깨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베릭.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아, 나 이상한 게 보여.”
“이상한 거? 마약이니 환각이 보일 수 있다. 일단 진정하고, 숨을 깊게 들이쉬어라.”
순간, 쇠사슬 가지러 갔던 로만드로가 왜 이리 안 오나 싶다. 이안은 베릭이 흥분해서 날뛸까 봐 천천히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기 힘들다면 한숨 더 자는 게 좋겠다. 의사를 불러올 터이니…….”
“아니. 그건 구분 가능해.”
베릭은 짜증스럽게 관자놀이만 꾹꾹 눌러댔다.
사실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이미 죽어서 뼛가루도 남지 않은 자신의 가족이 멀뚱히 서 있을 뿐이다. 어떤 말도 없이, 그저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
베릭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좀 더럽네.”
달깍.
그때, 로만드로가 사용인과 함께 쇠사슬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내 멀쩡히 서 있는 베릭을 보며 뒷걸음질 쳤다.
“눈떴네?”
“뭐여.”
손에 든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말이었으나, 로만드로의 얼굴은 희게 질려서 말을 더듬어댔다.
“나, 나, 나를 못 알아봐?”
“뭐?”
“이안, 이안! 저것 좀 어떻게 해보게.”
“진정하십시오. 로만드로 님.”
생각보다 멀쩡하다고 알려주려 하는데, 이내 상황을 파악한 베릭의 입가에 미소가 씨익 돌았다. 그리고 장난스레 손목을 돌려대며 로만드로에게 다가갔다.
“어디서 말하는 돼지가 굴러들어왔네.”
“히익! 이안 경! 이안!”
“잡아 먹어야징! 배고픈데 구워 먹어야징!”
“처, 처, 천려 전사들! 어딨나? 전사들!”
장난치는 꼴을 보아, 확실히 회복이 빠르다. 로만드로는 사슬을 내던지며 밖으로 도망갔고, 베릭은 잡을락 말락 그 뒤를 내쫓아 따라갔다.
“꿀꿀아! 어디 가? 일루 왕!”
“으, 으아악! 저, 전사들……!”
쿵! 쿠웅!
우당탕탕!
“이안 님, 베릭 님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응? 그런 것 같다.”
헛것을 보지만 그게 허상임을 인지할 정도였으니, 문제없을 것이다. 확실히 정신력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수준.
‘괜히 마검사 체질이 아니지.’
사정을 모르는 하인은 애꿎은 쇠사슬만 닳도록 매만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