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20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20화(820/863)
제820화. 이간질
연회장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은 자들 모두 황궁 정세를 파악하고자 쏟아지는 잠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상황 파악 못 하고 크림파이를 우걱우걱 집어먹으며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으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별말씀 없으시던가요?”
“마법사들은 모두 출궁했다 합니다.”
“이안 장관의 조사는…….”
끼이익.
그때, 천천히 열리는 문. 다들 별 기대 없이 반사적으로 문 쪽을 쳐다봤다가 기함했다. 화제의 주인공인 이안 히엘로가 멀끔한 낯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몰려들던 잠이 단번에 달아났다.
“이안 장관?”
“역시 아직 자리를 지키는 분들이 계셨군요. 생각보다 많습니다.”
“여기 와도 괜찮으신 겁니까?”
“그럼요. 여기도 황궁의 일부인 것을요.”
쪼르륵. 이안이 포도주를 따라 마시자 귀족들은 시선을 나누었다. 뭔가 의도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 조사를 받는 와중 이런 식으로 모습을 보일 리 없지 않은가.
“오늘같이 영광스러운 날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참으로 유감입니다. 경들께도 사과를 전합니다. 파티를 기대하셨을 건데, 이거, 원.”
“아, 아닙니다. 러더포드 그자의 죄이지, 이안 경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은근슬쩍 이안을 떠보는 말이었다. 이안은 싱긋 웃으며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티잉- 하고 부딪히는 청명한 음이 듣기 좋았다.
“이안 경, 근데 정말 괜찮은 것이오?”
누군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혹여 황실기만죄가 성립한다면 지금 그와 이리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 자체가 해였으므로. 이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특별조사단을 편성하여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무도한 자들이 이를 어지럽히지만 않는다면, 황궁은 금방 정상화될 것입니다.”
조사단 내의 불손한 무리가 이안을 모함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귀족들은 이안이 이르는 ‘무리’가 레이번 장관을 주축으로 한 다비온가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다비온 일족들 역시 이를 인지하고서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이안은 일부러 그들에게 인사하며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아아, 다비온가의 손님들이시군요. 반갑습니다.”
“크흠.”
“왜 그러고 계십니까? 술 한잔하시지요.”
이안이 포도주를 들어 올리자, 그들은 마지못해 잔을 내밀었다.
“작금의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황실이 불안정하여 그렇다는 말입니다. 베로시온의 이름을 잇는 자가 황제 폐하밖에 없으시니, 조그마한 바람도 태풍처럼 여겨 호들갑을 떨어 대는 것이지요.”
그 태풍이 바로 자네잖아. 귀족들은 입술을 꾹 다물며 말을 삼켰다.
“서둘러 황실이 안정돼야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응당 옳은 말씀입니다만…….”
“이번 사태가 진정되면 저는 이것을 황제 폐하께 건의할 생각입니다. 다비온가에서도 함께하기로 하셨으니, 이는 분명히 받아들여지겠지요?”
“뭐, 예…….”
상소문은 상소문이고, 황실의 문제는 황실의 문제였다. 다비온가의 사람들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와인 잔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한데, 폐하께서 제게 적합한 자가 있는지를 물으셨을 때 제가 무어라 답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
다들 눈이 커지며 이안을 돌아봤다. 지금 저게 무엇을 뜻하는가? 황후 추천 명단을 받겠다는 뜻 아닌가?
“다비온가에도 클로이 영애 외, 아주 훌륭한 영애가 많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아, 크흠. 그것이-”
“제 딸아이가 이번에 혼기에 들긴 했소.”
“아아. 레돌르 다비온 님이시군요.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영애께서 아주 아름다운 금발을 갖고 계시다고.”
“과찬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출궁하지 말라 할걸 그랬군요.”
“아닙니다. 시간이 늦었는데요.”
클로이는 다비온 가주의 딸이었기 때문에 이견 없이 추천을 받았던 것이지만, 사실 다비온가에 혼기 적절한 영애는 수없이 많았다.
클로이는 이미 시아오시와 연을 맺는 것이 기정사실, 직계혈족이 아니더라도 일단 다비온가에서 황후가 나온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라서 그렇지.
‘딸아이가 황후가 되면…….’
‘내가 황제의 장인이 되면…….’
방계 출신이라 설움 가득했던 그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작위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비온가의 일원들은 연달아 술을 홀짝이며 머리를 굴려 댔다.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에서 그 의도가 엿보일 정도로.
‘이안 히엘로가 무혐의 처분을 받아 복귀하면, 황궁 내 입지는 더욱 단단히 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신하들의 결집이고 뭐고 의미가 없어지겠지.’
황후의 자리에 오르려면 정치적 입지는 필수였다. 이안 히엘로 정도 되는 자를 뒷배로 둔다면 충분히, 아주 충분히 황제를 종용하여 황후 자리를 얻어다 줄 수 있으리라.
“아무튼, 폐하께 말씀을 드리려면 이번 사태가 말끔히 마무리된 이후라야 되겠군요.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안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현 사태가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레이번 장관을 주축으로 한 다비온가의 상소문이 철회되고, 조사 과정에서 눈먼 장난질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에 협조해 주면 너희들의 자식을 황후로 만들어 주겠노라는 제안이다. 뭐, 개중 누가 그 자리를 꿰찰지는 또 나중의 일이겠지만.
‘따지자.’
귀족들은 술을 마시는 척하며 저울질했다. 이안 히엘로가 과연 이번 사태로 몰락할까? 전쟁의 일등 공신이자, 천재 마법사이며, 마법부의 공고한 지지를 얻고 있는 자인데?
게다가 어릴 적부터 황제와 함께한 최측근이다. ‘이안 베로시온’이라는 괴소문이 계속 따라다닌다 한들, 그가 적극적으로 부인하면 어찌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반면, 이쪽에 남아 있을 때의 이득은?’
레이번 장관과 그 세력들이 이긴다고 쳤을 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되었든 이안의 편을 들었을 때보다는 이득이 적을 것이다. 이미 그를 지지하는 자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어찌 보면 이안 히엘로가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게다. 이럴 때가 진정한 기회지.’
귀족들은 속으로 끝까지 황궁에 남아 있었던 자신들을 칭찬했다. 그래,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온다니까.
“그런데 이안 장관님.”
“예, 말씀하십시오.”
“폐하께서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따로 있으시다 하던데.”
누군가 에이린에 대하여 물었다. 그녀의 존재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각성한 성기사가 황제 폐하의 마음을 훔쳤다’는 지지부진한 문장과 함께.
“혈기 왕성하신 나이입니다. 마음에 두신 분이 있을 수는 있지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황후의 자리를 어찌 서민 출신의 여자에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찌저찌 꿰찬다 한들 어떠한 정치적 입지도 없이 얼마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황궁의 생리를 아는 귀족들은 하나같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논의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주제 같군요.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은 터라.”
“아아, 그렇지요.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맞을 것입니다.”
“참, 그놈의 죄인은 죽을 때까지 죄인입니다그려. 어찌 그런 망발을 하여 이안 장관을 힘들게 하는지.”
“폐하께서도 이안 장관의 마음을 알고 계시니, 금방 오해가 풀릴 것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지시한 특별조사단이니 불손한 장난질 따위도 있을 수가 없지요.”
“상소문이… 올라갔으려나?”
“벌써요? 이런.”
“다비온가의 일원으로서 어쩔 수 없이 뜻을 합쳤던 것뿐인데, 사실 저는 그게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른답니다.”
“백작께서 워낙에 급히 간청하시니, 허허.”
상소문을 철회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되면 무조건 이안 장관에게 무혐의 처분이 내려질 테니.
조사 과정을 상세히 지켜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들은 모두 레이번 장관과 그 측근들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아니까.
“아 참,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겉으로는 건강을 걱정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이안 장관의 입지가 건재할지를 확인하는 질문이었다. 이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문제없습니다. 다들 어디서 잘못된 정보를 들으셨는지, 제가 곧 죽을 것처럼 생각하시더군요.”
“하…하하. 말도 안 되지요.”
로만드로는 웃고 떠드는 이 광경을 보면서 작게 입술을 이죽였다. 저저, 연기 하나는 참으로 잘한단 말이지. 성치도 않은 몸으로.
‘그래도 다비온가의 분열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군. 다비온이 흔들리면 레이번 장관 측도 크게 흔들릴 것이다. 흥, 바보 같은 귀족 나으리들! 우리 이안이는 말입니다! 폐하의 사랑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고요!’
에이린을 황후로 세우기 위해 무슨 일까지 했는데? 클리포포드 왕가로 입적까지 시켰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꼴이라니! 바보들 같으니라구, 으휴.
‘아무리 날고 기는 귀족들이라지만 왕족을 어찌 이기려고? 게다가 황제 폐하의 사랑까지 받는 에이린을? 여하간, 이제 조사만 끝내면 된다, 이거지. 나중에는 이안이 마법부에 없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생각을 정리하던 로만드로는 급격히 우울해졌다. 이안이 없는 마법부를 떠올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들 이안이 몸 상태를 좀 알아주면 좋겠는데, 지금 상황에서 이것이 알려지면 오히려 약점이 될 터. 로만드로는 조사가 끝나는 즉시 황제에게 달려가 이안의 상태를 알리겠노라 결심했다.
“로만드로 님.”
“으응?”
이안은 손가락을 튕겨 로만드로의 주의를 끌었다. 다시 조사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 뜻을 알아챈 로만드로가 후다닥 밖으로 나가 마차를 준비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 * *
한편, 마법부.
사위는 어두웠으나 마법부 건물만큼은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마치 오가는 쥐새끼는 모조리 잡아내겠다는 듯이. 때마침 마차 여러 대가 그 앞에 멈추자, 황궁친위대원들이 가까이 다가가 확인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어, 수고가 많네.”
“어쩐 일이신지?”
“동방의 마법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할 것이 있네. 러더포드의 시체가 뒤에 있으니 지하 감옥으로 내려주시게.”
동방의 마법사를 왜? 친위대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협조하여 시체가 든 관을 내렸다.
“시체에 마법의 흔적이 있는지를 살펴볼 예정일세.”
“동방의 마법사들을 믿으십니까?”
“안 믿지. 그래서 실담물약을 사용할 걸세. 마법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마법사의 힘이 꼭 필요하니, 지금으로서는 방도가 없지 않나.”
“위에서 결정된 사안이고요.”
“그렇다니까. 서두르게. 러더포드가 라로메디아의 환각 작용 때문에 헛소리를 했노라 짐작하는 의견이 우세해. 이때 동방 마법사들의 증언까지 더해지면 사태는 순식간에 마무리되겠지.”
마법부의 결백을 믿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어서 움직이라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윽고 지시받은 병사들이 시체를 옮기는 동안, 친위대원들은 실담물약을 찾기 위해 2층 마력석관리부로 올라갔다.
딸깍.
“실담물약…….”
어딘가에 있을 건데…. 마법부원이 아니다 보니 물약 하나 찾기도 쉽지 않았다. 친위대원들이 칸칸이 세워진 진열대를 살펴 가며 사무실을 샅샅이 살피던 중-
사락.
“음?”
어디선가 들리는 희미한 인기척. 친위대원들은 조용한 사무실을 둘러보며 의아한 시선을 나눴다. 잘못 들었나?
“아. 찾았다. 실담물약.”
“근데 여러 개네.”
“제일 최신 게 뭐지?”
물약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해 한참이나 서 있는 친위대원들. 이에 사무실 책상 아래에 숨어 있던 아코렐라는 제 입을 틀어막으며 짜증스럽게 눈을 부라렸다.
‘거참, 빨랑빨랑 나갈 것이지.’
왜 자꾸 2층으로 올라오는 거람? 기억력 회복 물약 몰래 만들어야 하는데…. 이른바 회상물약! 회심의 역작이 완성되기 직전이었다.
“어? 근데 저기-”
막 물약 챙겨서 나가려던 친위대원 하나가 실험대 위에 켜진 알코올램프를 발견했다. 그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낯선 액체 또한.
“이게 왜 켜져 있지?”
“몰라. 대장이 미친 자라 그런가. 저기 1층 사무실 의자에 앉았던 애는 벼락 맞았다더라.”
“미친. 얼른 가자. 우리도 화 입을라.”
후욱! 친위대원들은 망설임없이 램프 불을 꺼 버리곤 사무실을 나섰다.
책상 밑에 숨어 있던 아코렐라는 다시금 눈물을 질질 흘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 또 끄고 가네, 개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