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23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23화(823/863)
제823화. 수싸움
이안은 한참이나 마차 창문 밖을 쳐다봤다. 무언가 무겁고 복잡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분명했다.
출궁 허가가 제대로 떨어진 것인지, 앞으로 거처는 어찌할 것인지 묻는 로만드로의 질문에도 이안은 침묵을 유지했다.
히이잉!
그들의 마차는 어둠을 헤치며 한참을 내달렸고,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로만드로가 마력석 매입을 진행했던 상단의 거처였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는 아벨 상단지입니다만.”
갑작스러운 방문에 경비병이 경계하는 기색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러자 로만드로는 이안을 돌아봤다. 일단 오자고 해서 왔는데, 왜 왔는지는 아는 게 없어서.
이안은 창문을 내리며 로만드로가 세웠던 가상의 인물 이름을 내밀었다.
“엘리 바그너. 주문한 마력석을 받으러 왔다.”
“예? 이런 시간에 말입니까?”
“문제 있나?”
“아, 아닙니다. 한데 어쩌지요? 지금 상단주께서 외출 중이신데요. 약속하고 오신 게 아니면 기다리셔야 합니다”
상단주인 아벨은 황궁의 급한 호출을 받고 입궁했다. 지금쯤 황제의 명으로 소집된 회의장에서 퀸타나, 카일라와 함께 열띠게 논의 중이리라. 마력석 독점 건에 관하여 말이다.
하지만 이안은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대금은 이미 지불했고, 물건을 가지러 온 것뿐이다. 상단주와 얼굴 마주하고 떠들 생각은 없는데.”
“그…….”
“혹 아벨 상단은 상단주와 경비병 둘만으로 꾸려 가는 구멍가게인가? 이런 식이면 거래를 무르고 싶은데.”
분명 이런 상황을 대비한 대리인이 있을 것인데, 답답하게 굴지 말라는 뜻이었다. 경비병은 아차 싶어 가볍게 경례하며 사과했다.
“아닙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안은 경비병을 따라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난데없는 손님의 등장에 잠들어 있던 상단 식솔들이 잠에서 깨 등불을 들었다.
잠시 후, 대리인인 부단장이 퉁퉁 부은 얼굴로 이안을 맞이했다.
“안녕, 크흠, 안녕하십니까. 엘리 바그너 님. 죄송합니다. 제가 방금 자다 일어나서 목소리가…….”
목소리가 영 안 좋다고 덧붙이려던 부단장이 의아해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잠깐만. 지금 잠이 덜 깼나? 눈에 띄는 금발에 녹안, 상당한 외모, 게다가 범상치 않은 품질의 옷감…. 이거, 아무리 봐도 이안 히엘로가 아닌가?
“호, 혹시 마법부 장관님이십니까?”
“물건은?”
“헉!”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부단장은 당황해서 연신 눈알만 굴려 댔다.
현재 상단주는 황궁의 호출로 부재중. 그것도 마법부 견제를 안건으로 논의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그런데 여기 떡하니 마법부 장관이 나타났다? 엘리 바그너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저기, 이안 장관님.”
“잠이 덜 깼나?”
물건을 내어달라고 하는데 계속 딴소리라니. 짜증이 일 법도 했다. 하나 이를 감안하여도 이안의 말씨는 평소와 달랐다.
로만드로는 이안의 심기가 조금 날카롭다는 걸 알아챘다. 대회의에서 필시 마음 쓰이는 일이 있었던 게다.
“우리는 그쪽에게 대금을 지급했고 그쪽은 우리에게 물건을 내주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리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군. 혹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이라면 서둘러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지금 굉장히 피곤하거든.”
“아닙니다! 물건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상대는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다. 제국의 절대자라 불리는 그 전무후무의 천재 마법사 말이다. 불바다를 일으켜 상단 전체를 홀라당 태워 먹는다 한들, 그 누구도 상단을 구제하지 못하리라. 심지어는 황제조차.
“이, 이쪽입니다!”
이안은 부단장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아래층은 상당히 넓었는데, 칸칸이 드리운 천 너머로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로만 쓰는 공간이었다.
“이드갈 크기와 상관없이 큰 상자로 열다섯 개. 그리고 목록으로 요청하신 상급 마력석과 중급 마력석 두 상자. 열어 보시면 무게별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이안의 눈짓에 부단장이 상자를 열어 확인시켜 줬다. 호박빛의 이드갈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신의 손끝에서 만들어졌을 게 분명한 전쟁의 부산물. 진위 여부는 따질 필요도 없었다. 이안은 대충 훑어보고는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옮길까요?”
“이드갈은 여기서 폐기하고, 나머지는 마법부로.”
“예?”
상자를 닫던 부단장이 잘못 들었다는 듯 물끄러미 쳐다봤으나, 이안은 단호했다.
“이드갈을 여기서 폐기한다고 말했다.”
“저기, 장관님?”
“사람을 좀 쓰지. 고운 가루로 만들어서 버릴 것이니 준비해 주게. 마력석을 다루는 상단이니 알맞은 도구도 있겠지.”
가이아 전역에 퍼진 이드갈을 모두 처리하려면 아직 멀었으나, 이 정도만 하더라도 일단 중앙에 있는 이드갈은 모두 정리되었다 봐도 될 것이다. 로만드로는 멍하니 서 있는 부단장을 재촉했다.
“무엇 하시는가? 그것도 돈을 받으시려고?”
이드갈은 마법을 파훼하는 특수한 물질. 마법부의 장관으로서 폐기를 지시하는 건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지시보다는 ‘저지른다’는 느낌이 짙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름 아닌 황궁에서, 마법사들을 견제하기 위해 마력봉인석을 만지작거리고 있지 않나. 상대를 자극함과 동시에 받아치려면 이 길밖에 없음을 로만드로는 잘 알았다.
“아닙니다. 그저 놀라서요. 이게 다 얼마인지는 아시지요? 혹시 전달 과정에서 뭔가 오해가 있으시다면-”
“오해라니? 내가 산 물건, 내가 폐기하는 것인데. 그 누가 말을 덧붙이는가?”
“그, 그러면 알겠습니다. 준비하지요.”
부단장은 달밤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바깥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부하에게 손짓하여 속삭였다.
“황궁에 계신 상단주께 사람을 보내라. 이안 장관이 이드갈을 모두 처분했노라고 말이지.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그리고 애들 좀 내려보내. 파쇄기 챙겨서.”
“알겠습니다.”
이안은 벽에 기대선 채 가만히 부단장을 기다렸다. 그의 시선은 이드갈 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얼 저리 생각하는 걸까. 로만드로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깊고 어두웠다. 곧 가루가 되어 사라질 이드갈 조각을 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안.”
로만드로는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이안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그의 이름을 상기하여 정신을 붙잡아 두려는 듯이.
그러자 이안의 어둠이 거짓말처럼 걷혔다.
“이드갈이 정리되면 로만드로 님은 저택으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인근의 호텔에서 머무르겠습니다.”
“어째서? 같이 들어감세.”
“이제는 정말 안 됩니다.”
이안이 희게 웃었다.
“제가 이드갈을 폐기했다는 소문은 금방 퍼질 것입니다. 폐하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겠지요. 마력봉인석 논의로 인해 어지러운 황궁을 단번에 결집시킬 발화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안,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
“저는 해당 논의가 완전히 폐기되지 않는 한 황궁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일종의 항의지요.”
이안은 팔짱을 끼고서 작게 한숨 쉬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긴 했으나, 그래도 큰 틀은 변함없음에 대한 안도였다.
“로만드로 님 잘 들으십시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정말? 이제껏은 다 무엇이고?”
“마법사들에게 제 지시를 전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황궁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이안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황궁을 계속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곧 있으면 황궁에서는 분명 복귀 명령을 내릴 터. 그때,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애들에게 꼭 제가 명령한 것이라 이르십시오.”
“알겠네.”
훗날 복귀 명령 불복종을 문제 삼더라도 이는 장관의 지시로 인한 것이니 마법사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이안은 진짜 ‘거사’가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느꼈다.
‘마법사들이 복귀하지 않는 게 내 명령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면, 황궁에서는 나를 해임할 수밖에 없다.’
이안이 해임되면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보란 듯이 억울함을 주위에 호소할 것이고, 귀족들은 숨죽여 상황을 살피겠지.
‘그때 내가 작은 여지만 흘리면 된다.’
자신은 황궁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고. 아직도 그는 힘이 건재하며, 이는 명백한 황궁의 실책이라고 말이다.
그리하면 분명 이에 동조하는 귀족들이 이안에게 접촉을 해 올 터.
‘황실의 존귀함보다 정세를 저울질하여 속에 칼을 품고 있는 자들.’
이안은 그자들을 모조리 엮어서 황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내어주면 된다.
그리하면 진은 반란을 일으킨 마법사와 귀족들을 제압하여 권력을 견고히 하고, 이를 발판으로 이안이 아는 철혈의 황제로 거듭나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게…….
“저기, 파쇄기 가져왔습니다.”
“그래.”
정말 이 귀한 것들을 전부 부숩니까? 아이고, 이게 다 얼마인데…. 상단원들이 다시금 시선으로 되물었지만, 이안은 단호했다. 그들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상자에 담긴 이드갈을 옮기기 시작했다.
“로만드로 님도 저택에 들어가시면 가능한 한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그럼 이안, 자네 일은?”
“제 일은 제가 봅니다.”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 이안이 희게 웃었다.
“저기, 멜라니아 영애는?”
“영애는 저택에 없을 것인데요?”
“음? 그럴 리가. 연락받은 게 없는데?”
“영리한 여인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득 될 것 하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터이니, 진작 저택을 떠나 숨어들었을 것입니다. 다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면서요.”
정말 그럴까? 로만드로는 궁금했지만, 이내 이드갈이 갈리는 소리에 목을 움츠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르르륵! 그륵!
우드드!
이안은 이드갈이 고운 가루로 변하는 것을 빠짐없이 지켜봤다. 한 줌도 남지 않고, 세상 어딘가로 흘러가길 바라며.
* * *
“사라졌습니다.”
황궁친위대원의 보고에 진이 이마를 짚었다. 그의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아직도 피가 조금씩 배어났다.
“확실한 것인가?”
“주점 주인장의 말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합니다. 출근했던 에이린이 골목을 쓸러 나가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고요.”
성실한 자라고, 그런 식으로 사라진 게 너무도 수상쩍고 걱정된다며 주인장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에 목격자를 수소문해 보았으나 무용지물, 들려 오는 정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말 그대로 증발한 것이다. 순식간에.
“조금 더 자세히 찾아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
솔직히 거짓일 줄 알았다. 이안이 내민 것을 그저 서로를 압박하는 수단이라, 혹은 면피를 위한 것이라 마음 한구석으로 믿고 있었나 보다.
혼란스러웠다. 에이린이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이안이 이용했다는 게. 내가 알던 이안 경이 맞나? 진실로?
‘차라리 전쟁이 안 끝났더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진이 계속해서 이마를 짚은 채 침묵하자, 대원들은 안타까운 시선만 주고받았다.
똑똑.
“폐하, 수상이 들었습니다.”
근신 중이던 수상이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그는 깊게 고개 숙여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안타깝다는 듯 말을 건넸다.
“송구합니다, 폐하. 황궁이 혼란하여 폐하의 심정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전부 제 부덕입니다.”
“인사치레는 거두시오.”
진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말을 섞고 싶어서 부른 것이 아니다. 현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수습하라 부른 것이지.
“송구하오나 폐하, 길이 없습니다.”
“속 편한 말을 해 대는군. 근신이 꽤나 편안했던 것 같아.”
“이안 장관이 출궁했다 들었습니다. 한번 나간 자가 쉬이 돌아올 리 있겠습니까? 의견을 관철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이에 마법사들도 동조할 것입니다. 버티고 선 마법사들을 이길 방도는 없습니다.”
수상은 소파에 앉으며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하여, 제 생각에는 이안 장관을 해임하고 새로운 장관을 선출하여 마법부를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만-”
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안 경을 장관직에서 해임하면 고삐를 놓아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게 정말 최선의 수일까?
“아니지.”
그런 식으로 압박해서는 안 된다. 이안은 그런 식으로 다뤄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진은 알고 있다.
“…반대로 해야지.”
이안 경이 소중히 여기는 게 무엇이지?
업무가 중단된 와중에도 마법사들이 애먼 소란에 휘둘리지 않게끔 출궁을 명했다. 그는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침묵하였고, 마법부의 권리에 대해서는 크게 반응했다.
“모두 들으라. 황명을 내리겠다.”
답은 간단했다. 이안이 에이린을 쥔 것과 같이 진은 마법부를 쥐면 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조금 뒤흔드는 것도 괜찮겠지.
“마법부에 명한다. 황궁의 지시 사항을 따르지 않으면, 누구든 직위를 해제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