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25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25화(825/863)
제825화. 카드를 빌리다
이안은 흘린 찻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진은 자신과 마법사들과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유리한 수를 만들어 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수상이 찾아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밖에서 버티기만 하면 되는 계획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어그러졌다. 다른 방법을 찾아서 타개하지 않는 이상, 진이 원하는 흐름대로 흘러갈 터.
“마법부 별채에 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소. 그는 마법부에서 원하는 대로 하시고, 마력석 독점 건은 황궁의 뜻에 맡기시오.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시장 가격 형성에 개입했던 자들을 따로 조사해 처벌하겠소.”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다정한 음성이었다. 수상은 친히 이안의 찻잔에 찻물을 따라 줬다.
“그러니 결집했던 귀족들을 각자의 자리로 돌려보내고, 이안 장관도 어서 제자리로 돌아오시오. 황후 건 역시 나 또한 그대의 뜻에 동감하는 바.”
황제가 성기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정치적 이득이 없는 자를 그 자리에 올리는 건 수상도 반대였다. 이에 관해서는 이안과 뜻이 맞으니 훗날을 도모하다 보면 또 답이 나오지 않겠는가?
이안은 수상이 따라 준 차를 물끄러미 보다가 황궁친위대원들을 돌아봤다.
‘친위대가 셋.’
“친위대의 머릿수를 세지 마시오. 저들이 누구인지 가늠할 생각도 하지 마시오. 그것은 정말이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니까.”
수상의 경고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직위해제 건은 확실히 예상 밖이었고, 그만큼 위험을 수반하는 선택지였다. 그럼에도 진이 이것을 내밀었다는 건…….
‘내가 마력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는 거군.’
수상 옆에 서 있는 친위대원이 그 증거였다. 원래라면 턱도 없는 경호였지만, 지금의 저들은 이안을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건대 마법사들의 저택 인근에도 배치되어 있을 터. 혹여나 이곳에서 소란이 일어난다면 즉각적으로 대응이 가능하게끔.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인즉, 이안의 진짜 목적이었다. 이안이 원하는 것은 마법부의 권익을 되찾고 황궁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임하겠습니다.”
사임 그 자체임을 말이다.
이안이 단호하게 뜻을 밝히자 수상과 친위대원들의 인상이 구겨졌다.
“황궁이 어째서 마법사들의 직위해제를 내걸었는지 알고 있을 것인데도 그런 말을 하는가? 그리는 불가할 것이네.”
이안이 마법부 장관직에서 내려가는 걸 막기 위해 직위해제 건을 들이밀었다. 그것은 대의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게끔 하는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사임이라? 미안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을 터다.
“그대는 책임감이 있는 자라는 걸 알고 있네만.”
그런데도 이안이 사임을 강행한다면 그 부담은 오롯이 마법부가 지게 된다. 그리고 이건 결국 황궁의 명에 불복종하고 불순한 의도가 있노라 해석할 수밖에 없는 여지를 보이는 일.
“예, 책임감이 있기에 사임하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수상께서는 황궁으로 돌아가셔서 폐하께 제 뜻을 전하십시오. 곧 알게 되실 것입니다.”
수상은 한참이나 이안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그대에게 남은 카드는 없다네.”
“예. 그런 것 같군요. 그래서 카드를 하나 빌려 올까 합니다.”
무슨 말이지? 수상은 의아하다는 듯 이안을 쳐다봤으나, 그는 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수상은 친위대원과 함께 호텔을 떠났다.
로비에 홀로 남은 이안은 천천히 다리를 꼬고는 식은 찻잔을 들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직원이 조심스레 다가와 따뜻한 차로 갈아 주었다.
“실례합니다.”
“고맙군.”
수상과 마법부 장관이 정세를 논하는 자리였다. 로비는 조용했고, 이는 전부 의도된 것이었다. 이안은 그런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듣는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데.”
“예?”
“미안하지만, 메일리데일리 쪽으로 사람을 보내 주겠나? 전달할 말이 있어서 말이지.”
“물론입니다. 펜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말로 전하겠네.”
펜과 종이를 가져오려던 직원이 멈칫거렸다.
“말씀으로요?”
“그래. 잘 듣고 빠짐없이 전하도록.”
이안이 작게 한숨을 쉬며 웃었다. 황궁에서 자신을 잡고서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면 다른 쪽의 손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이안 히엘로가, 반역 가문 하이만의 막내딸 멜라니아를 몰래 살려서 도망치게 했노라고 말이지.”
직원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이안은 정신 제대로 차리라는 듯 그의 옷깃을 탁탁 털어 정돈해 주며 덧붙였다.
“이는 러더포드를 잡고 싶었던 마법부 장관의 독단적 결정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의도한 대로 되었지만 황실의 신의를 배반한 것에는 문제가 있음이니, 메일리데일리는 이를 파고들어 자세하게 조사하고 바리엘 전역에 알리는 것이 좋겠노라고.”
“저기, 이안 님?”
“내가 제보했다고 전해도 되지만 그것까지 귀담아듣지는 않을 것 같군. 증거라 하면 황궁 내 마법부에 있을 것이니 그쪽으로 요청하라 하시게.”
알겠지? 이안이 다 되었다는 듯 직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이안의 재촉에 일단 호텔 밖으로 달려 나갔다. 땀 좀 흘리면 금방 제정신 돌아오겠지.
‘반역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하이만을 살려 준 행위 자체가 중죄니까. 백성들이 이를 알게 되면 황궁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나를 처벌할 수밖에 없겠지. 진 역시 자신이 가담했노라 선언하지 못해. 마법사들은 모르는 일이니 엮지 못할 것이고.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나의 파면만이 길이다.’
문제는 마법사들이었다.
황궁에서 직위해제를 빌미로 이안을 압박하려 했던 걸 그들이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아마 황궁에서도 이를 염려하여 이안에게만 이를 전했을 터.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지도. 그 전에 서둘러 나와 마법부 간의 관계를 끊어 내는 것이 좋겠어.’
그렇게 되려면 차기 장관을 이안이 직접 선발하여 위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터다.
이안은 다리 꼰 발을 까딱거리며 잠시 고민했다. 헤일과 아코렐라 중에서 누가 나을지…….
“이보게.”
“예!”
이안의 부름에 다른 직원이 와다다 달려왔다.
“제1중앙로 12번가로 가고 싶은데, 마차를 준비해 주겠나?”
“여기서 그리 멀지 않군요. 바로 출발 가능합니다. 골목 안쪽까지 가셔야 합니까? 마차를 작은 것으로 내올까요?”
“아니. 대로변을 끼고 있는 저택일세.”
“아아, 혹시 그 폭발이 자주 일어난다는?”
아코렐라의 저택이었다. 이안은 차기 장관을 아코렐라로 낙점하고서 그녀를 만나 현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 것이다. 마법부원들에게는 건강 악화를 핑계 삼으면 되겠지. 이러면 적어도 사임을 만류하는 이는 없을 게다.
타닥타닥!
직원의 말대로 호텔에서 저택까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다만 황궁이 어수선해서일까, 길거리도 상당히 분주하고 어지러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난장판인 아코렐라의 저택. 마당은 제멋대로 널린 온갖 상자와 포대들로 가득했다.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풍경이다. 아코렐라의 저택에 온 건 처음인지라 이안도 조금 당황했다.
“장관님. 여기가 맞습니까?”
“…아마도.”
“사람이 살았다가는 병 걸려 죽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아코렐라가 저택으로 안 들어가고 마법부 지박령처럼 지냈던 건가? 이안은 잠시 기다리라 손짓하고는 저택 대문을 두드렸다.
끼기긱! 끼긱!
쿠우웅!
현관문이 내는 소리도 기이했다. 그 소리에 하나둘 이웃들이 나와서는 알은체를 해 댔다.
“뉘시오? 혹 타국에서 오셨소? 또 희한한 물질을 배달하러 온 것이라면 대충 마당에 던져 두고 가시오. 괜히 저택 문 두드렸다가는 갑자기 폭발하는 수가 있소이다.”
“저택 주인이 마법부 소속 마법사, 아코렐라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예, 잘 찾아는 오셨소. 근데 그자를 만나려면 마법부로 가는 게 빠를 것이오. 여기는 뭐, 1년에 두어 번 오나? 가끔 물건 찾으러 오는 것 말고는 얼굴 보기 힘들지.”
덕분에 저택 안에서 별별 희한한 실험체들이 날뛰어도 통제할 방도도 없고! 무슨 술수를 썼는지, 그것들이 저택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안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코렐라 대장이 저택에 오지 않았습니까?”
“저택에? 왜요?”
“왜냐니…….”
출궁 명을 내리면서 저택에 기거하라 명했으니까.
이웃들은 깔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왔으면 분명히 그들이 알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한번 왔다 하면 창문 와장창 깨 먹지, 지붕 폭삭 무너지지… 조용할 날이 없었으니 몰랐을 리 없지요. 백이면 백, 마법부에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안은 깨달았다. 아코렐라가 출궁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마부에게 신신당부했는데, 대체 어떻게 꾀어서 속였는지 모르겠다.
‘미치겠군.’
아코렐라에게 연락하려면 황궁으로 사람을 보내야 하는데, 그리하면 분명 진이 알아채고서 중간에 개입할 여지가 있다.
로만드로를 보내는 건 더더욱 안 된다. 지금 황궁은 적진이나 마찬가지. 그를 보냈다가 또 어떤 방식으로 이안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될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이안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아코렐라…….”
이안은 작게 중얼거리며 입을 딱 다물었다. 덕분에 일이 다시 한번 꼬이고 말았다. 아주 고맙게도.
* * *
“아우, 귀 간지러.”
아코렐라는 귓구멍을 이리저리 후비며 중얼거렸다. 누가 내 얘기를 하나? 하여간 할 일도 없지.
“나는 바쁘다, 인마.”
황궁 관료들이 실담물약을 가져간 이후로 2층은 조용했다. 덕분에 아코렐라는 마음껏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점차 대담해져서 이제는 대놓고 실험 물품을 늘어트리고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코렐라는 보글보글 끓는 물약에 코를 가져다 대고는 킁킁거렸다. 이 뜨끈하면서도 톡 쏘는 알싸한 냄새!
“보자, 보자…….”
아코렐라는 찬장을 뒤적거리며 필요한 물건을 마구 꺼내었고, 혹 부족한 게 있으면 마법부 건물에 사용된 마력석을 떼 어내서 사용하기도 했다. 뭐, 나중에 들키면 한 소리 듣겠지만 나중 일은 나중 일이지.
보로로로록!
“오오오!”
마지막 재료를 넣으니 반응이 바로 올라왔다. 거품이 일며 오색찬란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 것이다.
아코렐라는 황홀한 눈빛으로 이를 꽉 깨물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대로 환호성을 내지를 것 같아서.
“됐어, 됐어! 됐다고!”
마지막 젓기까지 완료. 아코렐라는 스틱을 내려놓고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고는 어두컴컴한 실험실을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엉덩이를 씰룩이기 시작했다.
“이제 실험체만 찾으면 끝이다. 아오, 씨. 답답해서 뒈지는 줄 알았네.”
기억의 빈틈을 채워 줄 비장의 회상물약! 바야흐로 완성이올시다! 아코렐라는 물약이 식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동안 미친 듯이 실험 기록지를 써 내려갔다.
그때-
저벅.
“-!”
복도에서 들리는 인기척!
이런 젠장! 저 새끼들은 몸에 자석이라도 붙어 있나? 왜 물약만 만들었다 하면 처 기어 오고 지랄?
아코렐라는 허둥지둥 실험대를 천으로 덮었고, 물약은 통째로 챙겨 숨었다. 뜨겁고 알싸한 냄새 때문에 힘들지만 이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2층은 다 보지 않았어? 그때 자료 다 가져갔잖아.”
“어, 근데 한 번 더 찾아보라고 하시니까.”
“와씨, 여기 진짜 뭐 있나 보다. 또 실험 도구 널려 있는데?”
아코렐라는 혀를 할짝거렸다. 들고 있는 회상물약을 한번 핥아 볼까 말까 고민하는 듯. 그러나 이어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분해졌다.
“마법사들은 언제 돌아오려나.”
“좀 걸릴걸? 장관이 박차고 나가 버렸으니까, 일 해결되기 전에는 절대 제 발로 안 들어오지.”
“……?!”
이안 님이 박차고 나갔다고? 출궁하셨다는 말인가? 어디로? 왜?
“그러다 해임되겠다.”
이안 님이? 누가? 어떻게?
아코렐라는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저놈들을 붙잡아서 족쳐 볼까, 아니면 좀 기다리며 기회를…….
“수상께서 이안 장관 보러 갔다 하니, 전달되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동작 그마아아아안!”
“으아아아악!”
아코렐라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고,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관료들은 기절한 듯 벌러덩 엎어졌다.
아코렐라의 주황빛 눈동자가 미친 듯이 번들거렸다.
“동작은 그만, 주둥이는 계속 나불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