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3
제83화. 재발견
그로부터 며칠 후.
“이안 님! 이안 님!”
이안은 벽난로 앞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해나의 부름에 이안이 고개를 돌렸고, 이내 바로 손에 들린 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익숙한 디자인과 인장. 메렐로프였다.
“메렐로프에서 또 연락이 왔는가?”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바로 답신을 받아가야겠다며, 하인이 아래에서 기다리겠다 합니다.”
“이제 겨우 일주일 지났잖아.”
베릭 역시 등을 노곤하게 지지고 있다가 부스스 일어섰다. 그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만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일상생활로 복귀했다. 다행히 후유증이나 이상 증세는 없었다.
‘몸이 대체 뭘로 이루어진 것인지, 원.’
이안은 서신을 받으며 베릭을 힐끔거렸다. 베릭은 저를 보는 시선도 모르고, 폴짝 뛰어내려 이안 가까이에 왔다.
“뭐 해? 빨리 읽어줘.”
“알겠다. 서두르지 마라.”
인장이 찍혀있었다. 필체 역시 집사의 것이 아닌, 처음 보는 것. 메렐로프 백작이 직접 써서 보냈다는 뜻이다. 베릭이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누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라는 것만 알겠다.
“뭐라 적혀있어?”
“…굴라를 추가로 매매하고 싶다 하는군.”
“그럴 줄 알았지. 한 자루로 뉘 코에 붙이겠냐고요. 그것도 제일 작은 자루였다며?”
“전언한 하인이 별말은 않던가?”
“아무래도 저택에 도둑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도둑?”
물론 브라츠에서도 굴라를 노린 침입이 있긴 했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여길 법하지만, 메렐로프 부인과 나눈 얘기가 있다 보니 합리적으로 부인의 술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언한 하인들은?”
“요리법 물어본다고 주방에 갔습니다.”
소곤소곤, 해나가 말을 덧붙이자 베릭이 코웃음을 쳐댔다. 쓰레기 잡풀이라 개무시할 때는 언제고, 아주 없어서 못 먹는 처지가 되었나 보다. 이안은 서신을 반으로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래. 원한다면 또 내어드려야지.”
“자루를 준비할까요?”
“그래. 하지만 이번에는 시종 몸값 하나로는 안 된다고 해라. 자루당 금화 쉰 닢 이하로는 팔지 않겠다고. 대신 이전보다 실한 것 위주로 챙겨주겠노라 전해. 겨울에 접어들었으니 우리도 어쩔 수 없지 않겠냐는 말도 붙여서.”
“네. 이안 님.”
“자세한 건 서신으로 작성하여 전하마. 로만드로 님은 어디 계시지?”
“오전에 외출하셨습니다. 곧 들어 오실 것 같은데요.”
이안은 왼손으로 서랍장을 뒤적였다. 이전에 로만드로와 함께 메렐로프 정보를 나누며 기록해 두었던 자료가 들어있었다.
‘그때, 재거래 요청 시 양을 얼마나 하라 했더라?’
재건전문가였던 로만드로가 계산해 놓은 게 있었다. 메렐로프 영지의 규모와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어느 정도의 굴라가 필요한지 말이다.
‘100자루면, 반절은 심고 반절은 재배하는 한 달 동안 저택에서 편히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심은 반절 역시 한 달 후에는 영지민에게 균등히 분배할 수 있게끔 번식하겠지요.’
‘메렐로프에는 굴라가 눈을 맞으면 죽는다는 걸 아는 자가 있을까요?’
‘글쎄요. 의외로 없을 수도 있습니다. 뭐, 애초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 거라.’
이안은 로만드로의 말을 기억해 내며 새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100자루를 자루당 금화 쉰 닢, 총 다 해서 금화 5,000닢의 거래 요청서를 작성했다.
“100자루, 진짜 많네. 언제 다 옮겨.”
“대량 거래가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지막이다. 메렐로프에서는 굴라를 자체적으로 재배하고 식용할 능력을 갖추게 되겠지. 물론, 이번 겨울이 지나면 바리엘 전역에서 굴라가 넘쳐나겠지만 말이다.”
“그럼 마지막 거래니까 양을 늘리든가, 가격을 높이든가? 둘 중 하나는 잡아야 한다고?”
“그래. 그리고 메렐로프 백작의 성정으로 보아 차라리 낮은 금액으로 대량 구매하는 것을 심리적으로 좋아할 터.”
게다가 로만드로의 계산법이 영 허튼 개소리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나름의 근거에 기반한 제안서였으니 말이다. 부인 역시 옆에서 살살 몰아준다면, 크게 어렵지 않아 보였다.
이안은 제안서를 정성껏 작성하여 해나에게 넘겨주었다.
“자, 여기 있다.”
“네. 이안 님. 바로 전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하인에게는 가는 동안 요기할 수 있게끔 굴라를 조금 쥐여주어라.”
메렐로프 내외 외, 굴라의 맛을 아는 자가 많이 없을 것이다. 과실을 입에 물어본 자가 욕심을 부리는 법. 이안의 말에 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한데요, 영지민들끼리의 거래는 계속 금하실 겁니까?”
“왜 그러지?”
“음, 큰일은 아닌데요. 메렐로프 영지민들이 계속 매매를 요구하다 보니 우리 쪽에서 고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요.”
배부르고 먹고살 만하다 보니, 이제는 창고가 아니라 주머니를 채우고 싶어 하는 욕구가 드는 것이다. 돈을 준다고 하는데 팔지를 못하니 그 얼마나 아깝겠나. 당장 봄이 오면 돈 쓸 곳 천지이건만.
“흠.”
이안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렐로프 백작과의 계약만 잘 마무리된다면 거래를 열어도 될 것 같다. 어차피 개인 간의 거래를 금한 것은 이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시기만 맞춘다면 메렐로프 백작에게 좀 더 큰 엿을 선물해 줄 수도…….
“아니면 볶은 굴라만 파는 건요?”
“볶은 굴라?”
“예. 굴라 씨앗을 볶아서 팔면 재배를 못 하니 식용으로만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해나의 말에 이안이 눈을 크게 떴다. 방금 그 말에 아주 큰 힌트를 찾은 것이다. 그는 웃으며 해나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렸다.
“알겠다. 로만드로 님 돌아오시면 바로 논의해 보마.”
“네. 서신은 바로 전하고 오겠습니다!”
해나가 밖으로 나가자, 베릭이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근데 이안.”
“왜 그러지?”
“만약에 메렐로프 쪽에서 쉰 닢이 너무 과하다고 지랄하면서 병사라도 끌고 오면 어째? 먹는 거 앞에서는 장사 없잖아. 눈 회까닥 돌면 또 전투인가?”
그 말을 하는 베릭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상처가 아물기 무섭게 배에 구멍이 또 뚫리고 싶은 모양이다.
“어찌 신나 보이는구나.”
“그럴 리가? 너어무 무서워서 그래! 무서워서 가슴이 다 두근거리네. 아니, 콩닥거린다고 해야 하나?”
베릭은 낮게 웃으며 태운 구룻잎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등 따시고 배부른 포식자를 보는 것 같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겠지만, 공통점도 확실히 있지. 제일 큰 게 뭔지 아느냐?”
“글쎄다.”
“상대에게 덤비더라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거다. 저기까지는 안 되겠구나. 저 선은 넘어서면 안 되겠다. 목숨 아까운 건 사람이나 짐승이나 마찬가지니까.”
“하하하! 하긴! 내가 딱 버티고 있는데, 암암. 그로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달려오겠어. 천려 전사들도 조금이지만 남아있고 말이야. 으하하하!”
베릭은 자신을 칭찬하는 줄 알고 자지러지며 웃었다. 발로 쿠션까지 팡팡 차대며 으쓱한 꼴이 영 가관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니, 딱히 정정은 않겠다만…….
‘내 말은 중앙을 뜻하는 것이다. 중앙. 베릭아.’
이안이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황궁이었다.
황제와 자문관이 인정하여 성(姓)을 내려주길 기다리는 귀족. 이런 타이밍에 브라츠를 공격한다면 오해받기 딱 좋은 타이밍 아닌가. 메렐로프에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중앙의 세를 쳐내고 브라츠를 흡수하려 한다는 오해 말이다.
‘우리를 건드리면 꼬투리 잡히기 딱 좋아. 중앙군이 내려오면서 데르가와 브라츠 가문이 어떻게 박살 났는지 똑똑히 지켜봤으니까, 그것만은 의식적으로라도 피하려 들 터다.’
타악!
이안은 소리 나게 서랍을 닫았고, 다시 자리를 잡은 채 책을 들었다. 아마 오늘 늦게나, 늦더라도 내일쯤 다시 답신이 올 것이다. 예상으로는 하인이 아닌 메렐로프 백작이 직접 움직일 것 같다만.
똑똑.
“어허! 이안 경, 다녀왔네그려.”
“오셨습니까. 외출하셨다고요.”
“아내랑 아기한테 보내줄 선물을 좀 사느라.”
로만드로는 유쾌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두 손 가득한 짐들. 그날의 베릭 장난이 지나쳤는지, 마주할 때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게 안쓰럽다.
“로만드로 님. 저 멀쩡하다니까?”
“누가 뭐랬나? 맨날 동태눈깔이라 그런 거지.”
“에엥? 설마. 이안, 내 눈이 그래?”
“가끔 맛이 가 보이긴 하다.”
“혹시 메렐로프 백작도 성격 지랄 맞은 게 약 때문이 아닐까?”
“그건 아닌 듯한데. 부인이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거든. 아마 이제부터 슬슬 시작할 것이다.”
한 달 정도 천천히 잠식시켜 과호흡으로 사망하게 하는 환각성 마취제. 로만드로는 실로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털며 중얼거렸다.
“변경이라 그런가, 참으로 대담한 여인일세.”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베릭은 로만드로의 선물을 구경하며 물었다.
“중앙은 이런 거 안 합니까?”
“중앙? 더 하지!”
“근데 뭘 ‘변경이라’고 해요?”
전체 귀족들의 절반 이상이 모여있는 중앙. 당연지사 하루걸러 하루씩 온갖 난잡한 스캔들이 터지는 사교계의 중심 아니던가. 로만드로는 수염을 돌돌 말며 꿍얼거렸다.
“그래도 요즘에는 다들 별장이나, 저기 가면무도회 같이 은밀한 곳에서만 하는 분위기일세. 게일 저하께서 일전에…….”
게일. 로만드로의 입에서 2황자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이안이 계속하라는 듯 재촉하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네그려. 이게 궁에서는 감히 이름을 올리지도 못해. 워낙 보고 듣는 사람이 많고, 와전되기 쉬우니까.”
“이해합니다.”
편 가르기가 세상에서 제일 치열한 장소 아니던가. 1황자 마리브의 부하인 로만드로가 쉽게 올릴 이름이 아니긴 했다.
“아무튼, 그 게일 저하께서 일전에 언제였더라. 작년인가? 홀린 공작 조카의 파티에서 피바람을 냈었지.”
“피바람?”
후계자 신분이 아닌 황자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우선적으로 귀족들의 인맥을 쌓는 게 중요했다. 그들 하나하나가 곧 힘이 될 테니까. 그런데 불구, 공작 조카의 파티에서 난동을 피웠다?
훗날 반란까지 일으킬 정도로 그 힘을 탐하는 사내가?
“마약에 취해서 현실 분간 못하는 자들의 노예들을 모두 죽여버렸네.”
“가능합니까? 그게?”
“가능했지. 했으니까. 자네 모르는가? 변경이라도 얘기는 들었을 터인데?”
세상이 뒤집혀도, 언제나 거기서 벗어난 삶을 사는 자들이 있다. 그때의 이안이 그러했다. 황제가 바뀐다 한들 의미가 있나? 당장 먹고 살기 정신없는데.
“당연히 각 가문에서는 난리가 났지. 어쨌거나 그들의 재산 아닌가. 마약이 죄긴 하지만 공공연히 다 하던 것들이고, 무엇보다 황가가 귀족에게 그런 행동을 한다면 무력 견제와 마찬가지니까.”
“어찌 수습했습니까?”
“돈.”
“예?”
“죽인 노예들을 죄다 새로 사서 보내주었다네.”
“미친 새끼네.”
질색하며 중얼거리는 베릭과 달리, 이안은 굉장히 놀라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 뜻을 알아챈 로만드로가 한숨을 푹 내쉬며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내가 마리브 저하의 곁을 보필한 시간이 있긴 하지만, 게일 저하께서도 보통은 아니란 말이지.”
노예란 자고로 사고팔 수 있는 물건. 배상만 제대로 해준다면 전혀 문제 될 게 없겠지만, 골자는 ‘게일’이 준 노예라는 것이었다.
“정말 여러모로 대단하군요.”
“사실 그때를 기점으로 게일 저하의 추종 세력이 확실하게 늘었네. 마법부의 수장인 웨슬리가 그 돈을 대주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더더욱 라인이 확고해졌지.”
“뭔데? 왜 그걸로 세력이 늘어나요? 나 같으면 미친 새끼다, 하고 한판 떴을 텐데.”
“베릭. 여기가 변경인 것을 감사해라. 황궁은 초상화에도 귀가 달려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설명을 좀 해주셔.”
베릭이 귀를 후비적거리자, 이안은 한숨을 삼키며 그 뜻을 풀이해 줬다. 감히 말하건대, 황제였던 이안조차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정치적 한 방’이라 표현해도 좋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