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5
제85화. 리엔이 바람을
“하! 자네!”
황제 폐하까지 거론할 일인가?
하지만 먼저 저리 선수를 쳐버리니 마땅히 대꾸할 말도 없다. 메렐로프 백작은 수염만 연신 쥐어뜯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해댔다.
‘그나저나, 눈에 닿으면 죽는다고? 겨울에도 굴라를 봤던 것 같은데, 개거지 같은 작물이 따로 없군. 물에서도, 모래에서도 자라지만 눈에는 쥐약이라니.’
메렐로프 영지에는 온실이랄 게 없었다. 애초에 농사에 힘을 쏟지 않았으니, 겨울 농사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것이다. 이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굴라를 구매해서 재배와 동시에 온실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서른 닢.”
“죄송합니다.”
“서른한 닢!”
“백작님.”
“자네, 앞으로의 날을 기약하게. 가주로서 살아갈 시간이 얼마나 많겠나? 이쯤 하지. 서로의 과오는 묻어두는 게 진정한 귀족의 자세라네. 서른두 닢.”
되지도 않는 협박까지 아주 우아하게 해댔다. 이안이 쉰 닢이라는 다소 높은 가격을 정한 게 바로 저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반절에 가깝게 깎고 들어갈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로만드로가 헛기침을 하자, 밖에 있던 그의 부하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똑똑.
“이안 님, 로만드로 님. 잠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그래? 급한 일인가? 손님들께서 와 있네만.”
“죄송합니다. 잠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실례하겠습니다.”
과열되었던 분위기를 조금 정리하며, 메렐로프 부인이 백작을 설득할 틈을 주려는 작전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고심하는 듯 표정을 굳히며 백작에게 뭔가를 속삭여대고 있었다.
끼익.
이안과 로만드로가 응접실을 나서자, 부인은 목소리를 조금 키우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쉰 닢이면 총 다해서 금화 5,000닢이네요.”
“미쳤지. 잡초 따위에 금화 5,000개라니.”
“하지만 올해는 좀 상황이 특수하긴 해요. 당장 급한 대로 영지는 살려 놔야 하니까요. 브라츠에서는 임시 배급 후 내년 세율을 더 걷는 쪽으로 진행했다 하더라고요.”
죽으면 되살릴 수 없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부인은 은근히 백작을 은근히 떠보며 물었다.
“한 자루에 얼마 정도를 최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마음 같아서는 금화 한 닢도 아깝지.”
“아니요. 말고, 현실적으로요.”
현실적으로, 이안과 백작의 절충선이 어느 정도가 될 것 같은지를 묻는 것이다. 백작은 수염을 배배 꼬며 당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른다섯 닢 정도.”
“흐음. 서른다섯 닢이라.”
부인은 고심하는 척 그의 말을 따라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인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이안 경이 과연 그렇게 해줄까요? 봤을 때는 한목 단단히 잡으려고 벼르는 중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어린 게 돈독만 올라서는 쯧쯧. 저리 살다가는 오래 못 살지.”
“제 생각에는 마흔 닢 정도에서 결정을 짓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말마따나 눈이 내리면 가격이 더 오를 수도 있잖아요. 그때 되면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수급 자체가…….”
부인의 걱정도 일리가 있었다. 일이 자꾸 꼬여서 결국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나. 물러날 곳이 없다고 여겼으나, 언제나 밑바닥은 존재했다.
“마흔 닢에서 서른다섯 닢. 그 사이로 얘기가 오가면 바로 도장 찍는 게 좋겠어요.”
“흐음.”
“대신 절반 정도는 굴라 알이 작은 것으로, 또 절반은 굵은 것으로 구분해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절반은 재배용이니 최대한 작은 알들로 자루를 꽉꽉 채우면 되는 것이고, 절반은 식용이니 굵직한 게 좋았다. 백작은 그새 반쯤 식은 차를 홀짝이며 고민스러운 신음을 흘려댔다.
“흐음.”
부인의 설득이 계속되었다. 굴라를 최대한 싸게 사자는 것보다 어떻게 해서든 적절한 선에서 거래가 성사되는 것에 중점을 맞추자는 게 핵심이었다.
이내 시간이 지나, 이안과 로만드로가 다시 응접실로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일 처리가 좀 늦었습니다.”
“크흠. 차가 다 식어버렸네.”
“이런, 실례했습니다. 해나!”
“네. 주인님.”
메렐로프 백작은 주도권을 갖고 오기 위해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헛기침만 해댔다. 그 옆에서 부인은 난감하다는 듯 귓불을 매만졌다.
차락.
화려한 귀걸이와 손톱 부딪히는 소리가 이안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손가락 세 개를 한 번 펼치고, 이내 다섯 개 전체로 어루만지는 손길. 이안은 신호를 알아차린 채 소파에 앉았다.
‘쉰을 불렀는데 서른다섯이 최대라.’
참으로 만만치 않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것이 메렐로프에서 내올 수 있는 최대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안은 부인의 협조를 믿기로 했다.
‘안 파는 것보다 낫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백작 외, 메렐로프 영지민들과도 거래할 게 있으니 말이야.’
100자루니 다 하면 금화 3,500닢. 중앙에 내야 할 세금 중 3분의 1이 모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로만드로와 눈짓하며 운을 떼었다.
“금액은 어찌, 말씀들 나누셨습니까?”
“이안 경. 아무래도 쉰 닢은 너무 많아요. 시장을 저택에서 잡고 있는데 이런 가격이라면 대놓고 우리와 거래하지 못하겠다는 것으로 들리거든요.”
부인이 턱을 가볍게 쳐들고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백작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고민하는 ‘척’ 인상을 찌푸렸다.
“좋습니다. 그럼 조건을 하나 달지요.”
“조건? 무슨?”
“자루당 금화 마흔 닢에 드리겠습니다. 대신, 앞으로 이곳 영지에서 어떤 경제활동이 일어난다 한들 간섭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작성하시지요.”
“…경제활동에 간섭하지 않는?”
뜻밖의 조건에 메렐로프 백작의 눈매가 의뭉스럽게 휘었다. 부인 역시 마찬가지. 한편을 먹긴 했으나 이런 조건이 무슨 속내를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별로이십니까?”
“아니, 별로라기보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조건 아닌가.
백작은 복도를 오가는 천려의 전사들을 보며 어림잡아 변방족과 수작질을 부리려는구나, 짐작했다. 그쪽으로 뭔가를 빼돌리려는 건가?
‘바보 같은 조건이군. 우리가 간섭하지 않는다고 한들, 중앙에 고발하면 그쪽에서 저지가 들어올 터인데. 쯧쯧.’
하지만 이안은 그런 백작의 생각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깐깐한 백작이 돈 쌓아두는 재주는 있어도 깊게 보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다.
‘천려족을 의심하는 것 같은데. 잘못 짚고 있네만.’
고민을 가장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로만드로는 둘의 눈치만 보고 있었고, 부인은 찻잔을 드는 것으로 적막을 깨었다.
“이안 경께서는 황제의 임명을 받은 가주 아닙니까. 각 영지의 경제권은 가주의 자치권이나 마찬가지니, 당연한 조건을 거시는 게 의아하네요.”
“그런가요? 당연하니 금액 조정은 없어도 되겠군요.”
그 말에 백작이 눈을 희번덕 뜨고 부인을 노려봤다. 뭣 모르면 조용히 입 닥치고 있으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부인은 내심 머쓱한 척 눈을 깔았지만, 이안은 그것이 그녀의 의도였음을 알아차렸다.
“좋네. 메렐로프를 어떻게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자의 권리 보장은 당연한 것 아니겠나. 대신 그대들도 메렐로프의 경제활동에 이의 제기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금화 서른 닢에 마무리함세.”
“백작님. 마흔 닢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거참, 알겠네. 서른한 닢.”
“앞자리 수가 두 번이나 바뀌는 것은 너무 한 것 아닙니까? 백작님?”
위에서는 내려가고, 아래에서는 올라가는 협상의 단계상 마흔과 서른의 중간지점은 정해져 있었다. 몇 번의 내지름 끝에, 결국 메렐로프 백작이 먼저 한계선에 도달했다.
“서른다섯! 더 이상은 나도 절대 안 되겠네.”
서른 다섯 닢. 부인이 은밀하게 알려줬던 가격이다. 이안은 팔짱을 낀 채 로만드로에게 눈짓했다. 일종의,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거래이기 위한 쇼라고 보면 된다.
“하아. 좋습니다.”
바로 이것.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양보하고 들어간다는 말 한마디. 이안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한 자루당 금화 서른다섯 닢에, 100자루. 총 다하여 금화 3,500닢에 거래하겠습니다.”
“좋아. 잘 생각했네. 계약서를 작성하지.”
이안과 백작이 손을 맞잡는 동안, 로만드로는 말아둔 기본 계약서를 꺼내왔다. 장장 열 장에 달하는 내용이었으나, 모두 귀족 사이에서 통용되는 기본 항들이었고, 중요사항은 맨 앞 장과 뒷장뿐이었다.
차락.
백작은 단어 하나하나 씹어먹을 듯이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웃옷까지 하나 풀어헤친 것으로 보아, 시간이 꽤 걸릴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여기서 ‘신선한’이라는 단어를 ‘수확 후 일주일 된’으로 수정하지. 괜찮겠나?”
“음. 대신 수확 일정에 따라 변동할 수 있다는 걸 덧붙여주시면 됩니다.”
“알겠네. 새 종이를 내오거라.”
“여기 있습니다. 백작님.”
찌익!
이런 식으로 고치고, 또 고치고.
그의 발치에는 수정의 벽에 걸린 계약서들이 찢긴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안과 로만드로가 번갈아 가며 그를 상대하고 있을 때였다. 부인이 참지 못하고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피곤하십니까? 부인?”
“아. 미안해요. 결례를 저질렀군요.”
“아닙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으니, 다른 방에서 편히 쉬고 계심이 어떻겠습니까?”
이안은 백작을 돌아보며 물어봤으나, 그는 계약서에 시선만 고정하고 있었다.
“여보. 듣고 있어요?”
“알아서 좀 하시게. 귀찮게 하지 말고.”
“…….”
부인은 딱히 상처받은 것 같지 않아 보였고, 오히려 관심 없어서 고맙다는 미소를 지었다, 이안은 로만드로에게 백작을 맡기며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인. 제가 안내해 드리죠. 저도 잠시 바깥바람을 쐬어야겠습니다.”
그 말을 하자, 백작의 눈매가 이안의 뒤를 쫓았다. 하인을 두고서 저가 직접? 왜? 피가 거꾸로 솟듯, 의처증 역시 울컥울컥 목구멍을 통해 터질 것 같았으나, 백작은 귀족이었다. 황궁의 자문관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순 없었다.
“백작님?”
“아, 미안하오. 다시 말해주겠소?”
“3조 3항을 고치게 되면 뒤쪽 5조 1항 역시 수정을 하셔야 형평성에 맞습니다. 그리할까요?”
“음. 그래. 그러지.”
끼익.
부인은 복도로 나오자마자, 벽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부인.”
“…클라크는요?”
“저택에서 팔자가 제일 좋지요. 방에서 음식만 받아먹고 있으니 말입니다.”
연인 사이 아니라고 하더니만, 백작의 레이더에서 벗어나자마자 찾는 것이 클라크였다. 이안은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했다.
“원하신다면 팔을 잡아드리지요.”
“됐어요. 코르셋 때문에 허리만 좀 아플 뿐, 다리는 멀쩡해요.”
그녀는 한껏 당당하고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잡고서 걸었다. 늦게 들어간 그날, 그녀에게 멍 꽃이 더 피었을지 궁금했지만, 이안은 묻지 않았다. 상처는 어떤 식으로든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 아픈 것이기에.
대신 넌지시 다른 화두를 던졌다.
“메렐로프 백작의 동생을 본 적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