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55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55화(855/863)
제855화. 적의 숙원
진의 집무실.
“그게 뭔-”
베릭이 잘못 들었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아코렐라는 굳게 닫힌 문을 힐끔거리며 조심히 덧붙였다. 혹여 외부로 말이 새어 나갈까 봐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법사들이 밖에서 지키고 있지만, 황궁에는 그림에도 눈과 귀가 달려 있는 법이지 않나. 동방의 대마법사가 궁에 들어섰으니 조심할 수밖에 없다.
진 역시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린 채 아코렐라의 말을 기다렸다.
“영혼의 풍화라니.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인가?”
“영혼 소멸. 다음 생이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망할 노인네 같으니라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만들었나 몰라. 하필이면 다른 것도 아니고, 젠장.”
아코렐라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마른세수를 해 대며 중얼거렸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이안에게 남은 것이라곤 이제 미래로 가서 그의 바리엘을 만나는 것뿐이건만. 그런데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니? 신의 뜻이 있으니 그럴 리 없을 것이라 되뇌면서도,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럼 이안 경은, 어떻게 된 것인가?”
진의 물음에 아코렐라가 난감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이안이 사라진 지 한 해 하고도 반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지만, 마지막에 보여 준 그의 몸 상태 같은 것을 봤을 때 희망은 미미했다. 정말로 어딘가에서 마무리를 지은 것이라면…….
“아코렐라.”
베릭이 탁자를 두드리더니, 자세를 낮추어 아코렐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안이 아직 안 죽었다.”
“…나도 그리 믿고 싶은데, 판단 잘 해야 해. 이안 님의 상태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정해지는 거니까. 그 노인네, 속내가 따로 있는 것 같더라고. 해결 방법을 안 알려 주는 걸로 봐서는…….”
아코렐라가 낮은 음성으로 나지막이 전하자, 베릭이 다시금 허리를 펴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는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대상자의 상태에 따라 방법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희망을 걸 게 아니라, 이안 님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궐련을 꺼내 물었다. 혹여 이안 님이 죽었고, 그에 대한 방법이 따로 없다면 어쩌지? 그건 진짜 파멸이다. 눈앞의 황제 폐하도 그렇고, 마법부인 자신들도 그렇고.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지금 이안이의 상태와 영감탱 속내를 알아내서 방법을 찾는 게 목적인 거지?”
“정리 잘 하네. 대장 느낌 좀 난다?”
“영감탱, 강하냐?”
베릭의 질문에 아코렐라가 한숨을 탁 내쉬었다. 질문 의도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두드려 패서 노인의 입을 열게 하자는 거겠지.
강하냐고?
“존나.”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누가 붙였는지는 몰라도 그에 걸맞은 실력자임은 분명했다. 혼자서 황궁의 보호막을 가볍게 흔들었던 것, 진언 없이 마법을 부리는 것, 나아가 그 귀물이란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경지를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마법 쓸 줄이나 알지, 만드는 건 엄두도 못 내. 능력 밖이라고. 근데 저 영감은 그걸 기물화해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끔 했지. 내가 봤을 때 나이발도 있겠지만, 이안 님보다 위다.”
이안이 자안의 나이쯤 되면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시간선상에 놓고 보면 명확했다.
아코렐라의 대답에 베릭이 혀를 쯧, 찼다.
“할 만할 것 같았는데.”
“할 만하다 해도 안 돼. 여기가 어디 변방 황무지도 아니고, 무슨 일 일어나면 중앙 초토화된다.”
아코렐라는 생각도 하지 말라며 경고했지만, 베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어? 저것 봐라? 아코렐라가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이었다.
“…알아내면 되지.”
침묵을 유지하던 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손끝으로 소파 가죽을 툭툭 두드리며 지시했다.
“우선 마법부는 자안의 편의를 봐주며 극진히 대접하도록 하라. 마법부 자체적으로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척하여 경계를 풀도록 유도해.”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혼자 처먹고 처마시면서 잘 놉니다.”
“은랑과 호흔은?”
“예?”
“아직도 회장에서 머리 박고 있나?”
진은 두려움에 질려 빌어 대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자안에 대해 정보를 알아내려면 은랑과 호흔을 이용하는 게 최선이다. 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자는 듯 손짓했다.
“자안이 회장으로 오지 않도록 계속해서 정신을 붙잡아 두어라.”
“술독에 빠지면 바로 뒈질 만큼 독한 거로 계속 올리겠습니다. 노인네 성격이 꼬장꼬장해서 취하기는 할는지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베릭-”
진은 베릭을 돌아봤다. 베릭은 무엇이든 명령만 내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추적해 보자.”
작년에 그만두었던 이안의 흔적을 재추적해 보자는 뜻이다.
당시, 숲 인근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찾지 못한 데 이어 이안 역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모두 그의 의지라 여겨 모든 걸 그만두었다. 이안이 묵기로 했던 시골의 저택도 아직 그대로였다.
“은밀히 진행하라.”
“예, 알겠습니다. 바르사베랑 같이 해 보겠습니다.”
이안의 존재를 아는 사람만 조심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이미 처형당해 죽은 자를 황궁이 찾고 있다는 소문이 돌게 되면 진심으로 난감해질 터이니.
아코렐라는 조금 미덥잖다는 듯이 베릭을 힐끔거렸지만, 바르사베가 함께한다면 그래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르사베가 삼대장으로 임명된 건 다행한 일이었다.
“아코렐라.”
“예, 폐하.”
“회장으로 가자.”
베릭은 아코렐라에게 썩 꺼지라는 뜻으로 고갯짓했고, 아코렐라는 사고 치지 말라는 뜻으로 눈을 치켜들었다. 둘의 대화는 그것이면 족했다.
집무실을 나서자, 바깥을 지키고 있던 마법사들이 진을 뒤따랐다.
타앗.
이내 도착한 회장 한복판.
마법사와 경비병의 감시하에, 은랑과 호흔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둘은 바닥에 끌려가지 않게끔 납작 엎드린 채 여전히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는데, 바닥에 땀이 한 바가지였다.
진은 모두에게 잠시 물러나라는 눈짓을 보냈다.
“으…….”
“정신은 있는가?”
은랑이 턱을 살짝 들어 진을 쳐다봤다. 눈에 실핏줄이 죄다 터져 있다. 진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고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뒤통수를 가볍게 눌렀다.
“아악-!”
아주 작은 힘이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던 은랑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크게 떨었다.
진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계속 그녀의 머리를 눌러 댔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호흔이 잇새로 소리쳤다.
“그…만둬라-!”
“눈물겹군.”
진은 알고 있었다. 호흔은 쉽게 말을 열지 않는 자고, 은랑은 머릿속에 간계가 가득 찬 자임을. 그러니 연정을 이용하는 수밖에.
“호흔. 힘을 더 내어 보아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연인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크흣-!”
진은 감정 없는 눈빛으로 그들의 변화를 살폈다. 그렇게 얼굴이 희게 변하고 정신을 잃겠다 싶을 때쯤, 그는 손을 치워 주며 물었다.
“그대들의 스승, 자안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
“갑자기, 무슨…….”
호흔과 은랑은 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렸다. 이들은 오직 동방과 교류하기 위해 자신들을 인질로 잡아 둔 작자들이 아닌가. 귀물 건도 그렇고 자안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걸로 보았는데, 이제 와서 느닷없이 정보를 캐내려 하다니?
은랑은 뭔가 저들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알아챘다.
투욱.
그때였다. 두 사람을 강하게 짓누르던 힘이 탁, 하고 풀려 버렸다. 마치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실이 끊어진 것처럼.
두 사람이 바닥에 널브러지자, 진이 아코렐라를 돌아봤다.
“자안, 그 영감이 힘을 거둔 것 같습니다.”
우연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이곳 상황을 알고 있다는 것인데.
‘왜 이들을 풀어 준 거지?’
꼭 정보가 새어 나가도 상관없다는 듯 보이지 않나?
호흔과 은랑은 숨을 헉헉 내쉬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자안, 자안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그래.”
“그럼 거래해.”
은랑은 입가를 닦으며 황제를 올려다봤다.
“우리를 자안에게 보내지 않겠다고.”
“안 되겠는데?”
“바리엘의 중심이자 주인이라는 황제께서 못 할 일도 있던가? 생각을 잘 해 보지 그래?”
이런, 건방진…. 아코렐라가 소매를 걷으며 성큼성큼 다가오자, 은랑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숨겨 달라거나 자안에게 대적하라는 말이 아니야. 그냥, 우리 풀어 주기만 해도 돼. 그러면 멀리 도망쳐서 가이아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을게. 제발.”
“부탁을 할 때는 존댓말이 기본인 것도 모르나?”
“아코렐라.”
진이 그녀를 만류하며 잠시 물러나게 했다.
“동방에는 자안 같은 인간이 둘이나 더 있어.”
“뭐?”
툭 하고 던진 말에, 진과 아코렐라가 멈칫거렸다.
“귀물을 복용하는 데 왜 세 사람이나 필요한데? 절대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 셋을 기준으로 만든 거다. 본인들끼리는 죽어라 물어뜯지만, 그래도 괴이의 절멸을 위해서는 뜻을 합치는 데 이견이 없는 자들이거든.”
은랑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진이 핵심을 짚었다.
“괴이의 절멸이라.”
그 괴팍한 성질머리로 적대적인 상대와 힘을 합칠 정도면 괴이의 절멸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숙원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일순 머릿속이 탁 트였다. 협상의 시작은, 상대가 원하는 걸 알아내는 것부터임을 상기한 게다.
은랑이 제안했다.
“그것 말고, 우리는 우리끼리의 거래를 하지?”
“거래라는 건 서로 주고받는 게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인데.”
너희가 가진 패가 있었던가? 진이 그리 말하자, 은랑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우리가 자안의 손에 이끌려 황궁 밖으로 나가게 되면 즉시 온 세상에 비밀을 알릴 것이다. 거리에 내걸려 죽었던 자가 멀쩡히 살아 있노라고.”
* * *
“아흐, 조오타.”
꺼어어억. 자안은 부른 배를 퉁퉁 두드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기분 좋게 취한 그는 문 쪽에다 대고 소리쳤다.
“들어올 거면 들어오고, 말 거면 말아라!”
연주하던 황궁 교향악단이 당황하여 일순 멈칫했지만, 술 먹고 헛소리하는 게 어디 이번이 처음인가? 그들은 계속해서 연주를 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정말로 문이 열리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인기척을 대체 어떻게 느낀 거지?
“어허, 역시 눈빛이 좋아. 이짝 나라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마음에 든다니까.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고거 하나만큼은 인정한다! 한 잔 받을 테냐?”
“주쇼.”
“고놈 싸가지 없기는. 통성명부터 하거라!”
“뭐 서로 얼마나 친해질 거라고 자기소갤 하래?”
“너는 내 이름 알잖아. 나도 네 이름 알아야겠다. 흐음. 보자…….”
자안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빙그레 웃었다.
“베릭이로구나?”
“…황궁 내 도청은 중죄니까 그만두는 게 좋을 거요. 딸기코 영감.”
“뭣? 딸기코? 허헛!”
베릭은 그의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경고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안은 술병째 들고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도청은 지랄! 눈과 귀가 밝은 것을 날더러 어쩌라고?”
베릭이 맞은편에 앉아 잔을 집으며 제안했다.
“영감. 내기하실래?”
“무슨 내기? 술자리에 노름이 빠지는 것만큼 섭한 것도 없다만- 흐흐. 내 앞에서 그리 말한 놈치고 제명대로 산 놈 없는데.”
“하겠다는 거지? 술맛도 돋굴 겸 삼세판으로.”
“고놈 참 당돌하다. 그래, 무엇을 걸 테냐?”
‘이안보다 강하다고?’
베릭은 아코렐라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항상 이안이에게 진 것은 아니거든.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