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58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58화(858/863)
제858화. 보여 줘
“가이아에 있어 동방은 미지의 세계다.”
“동방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진은 자안과 술을 주고받으며 잠시 말을 끊었다. 기절한 베릭을 보아하니 무력으로는 절대 제압되지 않을 자다. 오히려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면 중앙의 제국민이 위험해질 수도.
진은 다른 방식으로 자안의 곰방대를 노려 보는 게 좋겠노라 판단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짤막한 기록을 찾아보니, 동방에서는 의(義)와 협(俠)을 중시한다고 하더군. 사실인가?”
“세상천지를 이루는 근간과 같은 마음입니다. 말만 다르지, 서역에서도 분명 이를 바탕으로 인간사가 순환되고 있을 터이지요.”
타악! 자안은 술잔을 비우고는 흘러가는 시간을 음미하듯 눈 감았다. 미소는 가벼웠으나, 목소리는 한없이 무겁다.
“늙음으로 청춘을 읽고 이별로 사랑을 기억하듯, 세상이 지고 나서야 그것이 세상인 줄 아는 때입니다.”
진은 그의 한탄에 은랑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파악된 자안의 유일한 목적은 괴이 소멸. 귀물의 부작용 또한 원래라면 자안을 비롯한 동방의 대마법사 셋이 감당할 것이었다.
이는 영혼의 풍화를 감내하면서까지 더 강한 힘을 갈망했다는 뜻. 즉 괴이 소멸만큼 자안에게 의미 있는 건 세상에 없음이다.
“동방에서는 괴이라 부르는 것들이 이곳에서는 마물이라 불리지.”
“아아. 저희도 종종 혼용하여 부르고는 합니다.”
“마물의 왕을 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지하신을 봉인한 지난 전쟁의 결과가 자안의 흥미를 끌 수도 있으리라. 그것도 아주 많이.
아니나 다를까, 자안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마물의 왕이라니요?”
“가이아에서는 지하신 혹은 신의 그림자로 불리는 존재일세. 심연 깊은 곳에 존재하는, 모든 마물의 근간으로 파악되었네. 균열이 일고 대지에 틈이 생기면 그 사이로 힘을 펼쳐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어.”
“동방 역시 지진과 대지의 비틀림이 괴이의 전조 증상으로 여겨지긴 합니다만.”
자안은 진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살피는 듯 보였다. 드디어 대화다운 대화로구나. 진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군. 서역이나 동방이나 역시 신의 뜻 아래에서는 하나인 것 같아. 가이아에서는 대마물의 범람 이후 마물의 피해가 눈에 띄게 줄었으니, 한고비 넘겼다고 보는 게 맞겠지. 동방에도 무운이 있길 비네.”
“고비를 넘기셨다고요?”
“그렇네. 얼마 되지 않았지만, 큰 전쟁이 있었지. 지하신을 직접 격퇴한 영광스러운 승리였다네.”
“푸하하하하!”
자안은 별안간 고개를 꺾으며 파안대소했다. 노골적이고 경박한 웃음이었지만, 진은 그가 왜 그리 웃는지 짐작했다.
“믿기지 않는가?”
그도 그럴 것이, 아코렐라가 말하기를 현 황궁의 모든 마법사가 덤벼들어도 자안과 대적하기 쉽지 않다 하였다.
우리가 아는 것을 자안이 모를 리 없다. 그는 황궁의 전력을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진의 말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마법사 셋이 모여 영혼을 바쳐야 이룩할 거사를, 네놈들이 무슨 수로?
“아히고, 아하. 송구합니다. 제가 술이 좀 되었나 봅니다.”
“가이아의 모든 이가 증인인데, 내 무엇 때문에 거짓을 고하겠는가?”
“천자께서 직접 그 지하신이라는 것을 무찌르셨습니까?”
진은 술로 입술을 축이고서 대답했다.
“이안 히엘로.”
“어허?”
또 그 이름이네?
자안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베릭 놈도 그렇고, 하나같이 죄다 황궁에 없다는 이안 히엘로를 입에 담아 댔다. 그자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 견합 마법을 토대로 했다면 가능했겠다.
“이안 경은 견합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네.”
그 속내를 알아챈 진이 슬쩍 웃으며 덧붙였다.
“대신 지하신의 약점을 읽어 냈지.”
“약점이라 하시면?”
“뭐, 이것저것?”
짜안. 진은 자안이 든 술잔에 제 것을 갖다 부딪치며 대충 무마했다.
어허라, 이것 보아? 자안은 은랑과 호흔에게 해당 부분을 확인해 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그 괴이의 왕이란 것을 격퇴한 게 사실이라면…….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는 게 맞지.’
“아니지. 잠깐만.”
뭔가 이상함을 느낀 자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것 보십시오, 천자님. 아무리 내 망할 제자 놈들이 시작한 짓이라 한들, 남의 집 귀물을 멋대로 사용한 것은 그짝네들 아닙니까? 동방의 평화를 위해 싸게 싸게 알려 줘도 모자랄 판이건만, 어찌 그리 뜸을 들이십니까? 노인네 속 뒤집어지게?”
“그리 쉽게 뒤집힐 속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벌컥! 콰아앙!
그때였다. 아코렐라가 비장한 표정으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손에는 은 쟁반을 든 채로.
그 위엔 웬 술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실실 웃는 모습으로 보아 ‘특별한’ 술임을 짐작하게 했다.
“새 술 받으십시오, 자안 님.”
“오!”
눈이 번쩍 뜨인 자안이 어서 오라며 소매를 걷었다. 진과 아코렐라가 시선을 주고받았고, 뒤따라 들어온 마법사들이 멀찌감치 서서 지켜봤다.
“이건 또 무슨 술인고?”
“귀한 손님에게만 특별히 내는 황궁의 포도주입니다. 클리포포드라고, 바로 밑에 포도로 유명한 나라가 있거든요. 거기 왕자께서 직접 올린 진상품입니다.”
“아이고, 내가 이런 걸 먹어도 되려나 몰라? 으이? 천자, 괜찮을까요?”
진은 마음껏 들라는 듯 손짓하며 권했다. 졸졸졸. 와인잔 한가득 술을 따른 아코렐라가 처억, 절도 있는 자세로 그에게 내어주었다.
“그럼!”
자안이 잔을 집자, 아코렐라의 눈이 번뜩 빛났다. 저것으로 말하자면 그 어떤 자도 막론하고 딱 3분 안에 곯아떨어지게끔 할 수 있는, 아코렐라 최강의 특제 수면제였다.
자안이 입을 살짝 벌리자, 아코렐라는 ‘어서! 마셔라, 영감탱!’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따라 입을 벌려 댔다.
“아 참. 근데 말이지.”
“예?”
“방금 천자께서 흥미로운 걸 일러 주셨네.”
“뭐, 뭐요?”
자안이 마시려다 말고, 문득 생각난 게 있다면서 도로 잔을 내려놓았다. 아코렐라는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천자께서 괴이의 왕을 직접 보고서 봉인까지 하셨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던가?”
“괴이의 왕? 아아, 지하신이요?”
“이안 히엘로라는 자가 주도했다고 하던데.”
아코렐라는 진을 힐끔 보더니 이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오호, 괴이를 절멸하게 한 자가 반역죄로 죽었다고 하니, 이곳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눈에 훤하도다.”
자안이 진의 술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당황한 아코렐라의 눈알이 진동했지만, 진은 의연하게 이를 받았다.
“자안. 말 나온 김에 내 제안하겠소.”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듣는 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견합 마법의 부작용을 해결해 준다면, 우리가 겪었던 지하신과의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리다. 이는 분명 동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지네만.”
“흐음.”
“그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義)를 통하여 서역과 동방의 화합과 발전을 이루고자 함일세.”
화합과 발전이란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황궁에 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 호의적으로 교류하자는 것, 사람을 조심히 대하여 베릭 저것이 진다 한들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것 등등.
자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외다. 하나 동방에서는 연을 맺기 전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법이랍니다.”
자안은 무릎을 세우고서 팔을 기댔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도였다.
“이안 히엘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가이아를 구한 영웅이라며?
자안의 기준에서 이는 절대 희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본인조차 동방에서 괴이를 멸하기 위해 영혼 소멸을 각오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희생적인 인물이 어찌하여 반란을 일으켰는지, 그리고 그 이유가 타당하다면 바리엘의 천자의 자질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나.
“반역죄로 이미 죽었다 하면 세상에 있어서 안 될 자이건만 어찌 이리들 찾아 대는지, 그리고 그자와 천자께선 어떤 관계인지 말입니다.”
진은 조용한 회장을 둘러봤다. 널브러진 베릭과 마법사들밖엔 아무도 없다. 그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중앙 광장에 가면 꽃 무덤이 있네. 오래전에 시신을 처리했음에도, 아직까지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지.”
이안 히엘로의 마지막을 기리는 사람들의 흔적.
“이안 경은 그런 사람일세. 존재 자체로 고마운 존재. 아마 경도 나를 그리 생각할 것이라 여기네.”
“가족 같군요.”
“가족이다.”
진이 단호하게 이르자, 자안이 입매를 말았다.
“그렇습니까?”
“베릭도 그리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든 게지. 마지막 내기가 곰방대 부러트리기라고 들었다.”
“맞습니다.”
자안은 손끝으로 곰방대를 휘리릭 돌려 댔다. 그에 따라 연기가 나선형을 그리며 피어오르자 진은 미소를 덧붙였다.
“나도 최선을 다하여 베릭이 승리하도록 도울 것이다.”
“원래 노름에는 참가자가 많아야 재밌는 법이지요!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져도 책임은 베릭 저놈이 질 것이니, 천자께서는 마음 편히 즐기십시오.”
자안의 말에 베릭이 꿈틀거렸다. 기절해 있으면서도 제 이름에 반응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자안이 곰방대로 베릭의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제가 소원권을 쓰면 말입니다, 이놈 데려가렵니다. 귀여워서 종놈으로 부려 먹기 딱 좋습니다그려.”
“음. 곤란한데.”
진은 바르사베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영문 모르고 다가온 바르사베가 진의 곁에 섰다.
“듣자 하니, 동전 던지기에서 자네가 쾌승을 거두었다고 하던데.”
“베릭 놈이 헛똥짓을 해서 그렇지요.”
“한데, 그 곰방대로 바르사베의 손을 쳤다고?”
으잉? 자안은 저게 뭔 소리인가 싶어서 눈을 깜빡거렸다.
“그대는 마법사 아닌가?”
“그게 뭔 상관이지요?”
“게다가 그 곰방대는 ‘부러트려야 하는’ 내기 물건이고. 분명 범상치 않은 귀물임이 틀림없다, 이거지.”
혹시 그것, ‘마법의 지팡이’ 같은 거 아닌가? 절대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가 애용하는 물건이니, 무슨 신묘한 수가 쓰여 세상 그 무엇으로도 부러트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게다.
자안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빽 소리쳤다.
“어허이! 나를 뭘로 보고!”
“의와 협으로 죽고 사는 동방의 객. 하지만 그대가 우리를 의심하듯 우리 또한 그대를 의심할 수밖에. 서로를 잘 모르니까.”
“농이 지나치십니다! 내가 밥그릇에는 장난질 쳐도 야바위 그릇에는 안 치는 인간이외다. 베릭 저놈에게도 그리 말했다니까?”
자안은 뒤로 넘어갈 것처럼 억울해했다. 저게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그대를 잘 아는 은랑과 호흔에게 곰방대에 대해 물어볼까 해. 동의하는가?”
“하이고, 천자.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고것들이 퍽이나 옳게 말하겠소이다. 내가 못 들은 줄 아시오? 뒷문 열어서 도망치게 해 주겠다 살살 꼬이면 고것들, 나더러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우겨 댈 것이외다.”
“아아. 그런가?”
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자안의 성정은 특이했고, 이미 내뱉은 말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의와 협을 중시하는 동방의 객이여, 그대가 술수를 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주게. 그 곰방대가 귀물이 아닌 그저 낡아 빠진 나뭇대라는 걸 보여 주었으면 해.”
“하아?”
어떻게? 진은 고갯짓으로 곰방대를 가리켰다.
“정말로 부러지는 것인지, 내가 보는 앞에서 부러트려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