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6
제86화. 금화를 저장하는 곳
백작의 동생, 부인에게는 시숙이 되는 자. 그녀는 잊고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며 대답했다.
“네. 딱 두 번이요. 영지 동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고저택이 하나 있어요. 거기서 칩거하다시피 살더군요. 핏줄은 못 속인다고, 성격이 똑같이 거지 같아요.”
흐음. 이안은 상상으로 백작의 동생을 그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제대로 된 가문의 일원이라면 노예 출신 여인을 백작 부인으로 맞이하게끔 두지 않았을 터. 결혼식 없이 일을 벌였다는 걸 염두에 두면, 얼마나 콩가루일지 짐작은 가능했다.
브라츠 쪽도 그렇고, 메렐로프도 그렇고.
설마 한 게, 100년 전 귀족들이 모두 이런 식은 아니리라 믿고 싶다.
“백작이 죽으면 의문점을 제기할 자가 백작의 동생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여동생도 둘 있다고는 하는데, 외국으로 시집가서 본 적이 없어요.”
“칩거하며 왕래가 없다면 특별히 걱정할 게 없어 보입니다만. 백작이 죽는다고 한들, 누가 부인을 의심하겠습니까.”
그 말에 부인이 멈춰서서는 이안을 빤히 쳐다봤다. 밝은 햇살 아래에서 자세히 보니, 확실히 검은 눈동자 속에 녹색이 섞여들어 있었다. 드라이어드의 자식임을 보여주는 표식이다.
“천륜을 저버린 자는 신께도 버림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녀가 벤 것은 나무였지만, 결국에는 어미의 숨통 아니던가. 제아무리 아버지를 구하기 위함이었다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부인은 손바닥에 남아있는 상처가 죄인의 낙인처럼 느껴지곤 했다.
“하물며 숲의 수호를 죽이고서 제 인생이 평탄하리라 생각하시나요? 가만히 있던 백작의 동생이 들고일어나 의문을 제기하고, 저를 의심하며, 들키고, 다시 노예상에게 팔려가는 모든 것들이 과연 제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최악의 일일까요?”
메렐로프 부인은 알고 있었다. 자유를 얻을 수 있다 한들 행복을 얻지는 못할 거라고. 따라서 최악의 최악만큼은 피하고자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대비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살아요. 천륜을 저버린 저주는 제가 죽어야만 끝나는 거니까.”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뭐를 말이죠?”
“천륜을 저버린 놈은 자신이 저버린 것도 모릅니다. 신께서는 항시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죠. 무슨 사정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부인. 이것만은 확실히 알겠네요. 요정의 자식답게 순진하십니다.”
이안은 자신을 숙부라 불렀던 자에게 끌려 내려왔다. 황궁에서는 권력을 위해 피붙이들끼리 검을 겨누는 걸 개의치 않았으며, 심지어는 부모가 자식을 견제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이에도 등을 보이지 못하는 인생들이니, 말 다 했다고 볼 수 있지.
“순진하다고요? 제가?”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너무 스스로 연민에 빠지지 말라는 겁니다. 부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이 맞으니까요.”
스스로를 저주에 걸렸다 생각하면 그리될 것이고, 아니라 생각하면 아닌 게 될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악인들이 떨치고 다니는 이유도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걔들은 그게 잘못된 것이라 생각을 안 하니까.
리엔 부인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견해였는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저주에 걸렸어요.”
“그래요. 그렇다면 그런 겁니다.”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요정의 나무를 벤 걸 본 적도 없고, 그녀가 어떤 수난을 겪었는지 알 길도 없었다.
부인은 이상하게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기분에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어머니는 항상 요정의 저주를 말씀하셨어요.”
“아아. 저도 들어봐서 압니다.”
드라이어드를 비롯한 자연계 요정들은 약속과 이행 사이에서 존재하는 자들이었다. 무언가를 하기로 했다면 그리해야 할 것이고, 또 그리한다면 요정은 대가로 소원을 들어줬다.
“신전이나 마법사에 기대지 못하는 자들이 으레 그러지 않습니까. 어디서 요정의 소문을 듣고 산으로, 바다로, 그리고 미지로 향한다지요.”
그런데 영 의아한 것이…. 이안 역시 마찬가지로 걷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어머니와 약속을 한 게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특별히 문제 될 건 없는 것 같은데요.”
“…제가 저주에 걸린 게 아니라면, 저는 지금 왜 이런 거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부인께서 저주에 걸렸다 생각하여 그런 거겠지요.”
리엔 부인은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혼란스러워서 제대로 생각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이안은 그런 그녀를 두고서 클라크가 감금되어 있는 방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어라.”
이안의 명령에 병사가 고개를 짤막하게 끄덕였다. 굳게 잠겨 있던 자물쇠가 아래로 툭, 떨어지자 동시에 틈이 벌어졌다. 클라크가 하도 흔들어댄 탓에 이음새가 어긋난 탓이다.
끼익.
“아, 클라크.”
“…리엔 부인.”
두 사람은 서로를 지켜봤지만, 그뿐이었다. 확실한 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메렐로프 부인은 클라크가 다친 곳 없이 성하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등을 돌렸다.
“그대로 가십니까?”
“그럼요. 제가 볼일이 뭐 있겠습니까. 이안 경께 굴라 받고 팔았으니 그저 살아있다는 것만 봤으면 됐지요.”
클라크 역시 쫓지 않았다. 베릭은 고개를 휙휙 돌려대며 두 사람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얼싸안고 울 줄 알았는데, 너무 담백한 반응 탓이다.
“둘이 뭐함? 진짜 어지간히 육갑 떨어야지.”
“네놈, 이전부터 태도가 참으로 버릇없구나.”
“그쪽 때문에 뇌가 마비됐나 봐. 혀가 제대로 안 움직여. 죄~송합니다.”
“뭐 저런 게……!”
리엔 부인이 불쾌하다며 소리쳤으나, 베릭에게 먹힐 리가 없다. 이미 노예 출신이라는 걸 안 데다, 남편을 죽이려는 계획까지 알고 있는 탓이었다. 베릭이 에- 하고 혀를 내밀자 그녀는 차마 못 볼 것 봤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베릭. 부인께 예를 갖춰야지.”
“장난? 내가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잘 자고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건 그거고, 정신적 충격이 좀 있었어.”
이안과 베릭이 투덕대는 사이, 리엔 부인은 피하듯 다른 응접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저기, 이안 님. 문은 어떻게 할까요?”
병사가 난감하게 열린 문을 힐끔거렸다. 클라크 역시 부인의 태도를 보고 나올 의지를 상실한 것 같다. 남의 연애사에 참견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 말이다.
“다시 닫아두고 자리를 지켜라.”
“네. 알겠습니다. 이안 님.”
“클라크. 저택에 메렐로프 백작이 와 있다. 돌아가면 다시 와서 너의 거취를 결정해 보겠다. 소란 피우지 않는 게 좋을 게야.”
“…….”
끼이익.
이안의 말에도 클라크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리엔 부인이 응접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는 걸 확인 후, 해나에게 문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넋이 빠져있는데요. 괜찮을까요?”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런 거겠지. 다과를 내오고 잘 지켜보고 있거라. 나는 로만드로 님을 도우러 가야겠다.”
로만드로는 혼자서 메렐로프 백작을 상대하느라 진이 다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안이 돌아오자, 시든 이파리가 확 살아나는 것처럼 활기를 띠었다. 발치에는 이미 찢겨나간 종이들이 한 다발이다.
“실례했습니다. 어디까지 보셨습니까?”
“마침 잘 왔네. 마지막 장일세. 수정된 부분은 잉크 색이 짙은 갈색이니 확인하도록 하게.”
이안은 잉크가 마르지도 않은 서류를 읽어보며 백작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 역시 계약서 수정하느라 고되어 보였다.
“메렐로프 백작님. 송구하게도, 아직 정식 인장이 없는 터라 서명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러지.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한 언급도 방금 수정을 끝낸 참일세. 부인은 어딜 갔지?”
“다른 응접실에서 다과를 드시며 쉬고 계십니다.”
이안의 말에 백작은 대꾸 없이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백작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로만드로는 소파 아래로 쭈욱 미끄러지듯 꿀렁거렸다.
“깐깐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힘드셨습니까?”
“말도 말게. 저런 자는 또 처음 보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도 가격 방어는 제대로 했어. 확실히 훅 깎일 걸 예상한 게 컸네. 굴라 크기를 다르게 담아달라 해서, 내 그것은 임의로 허락했네.”
로만드로의 만족스러운 평가에, 이안 역시 웃었다. 드디어, 드디어 서명만 하면 굴라 100자루를 금화 3,500닢에 파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오지?’
한참 후, 메렐로프 백작은 흐트러진 소매를 정리하며 들어왔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안은 그의 단추에 여인의 머리카락 가닥이 끼어있음을 알아챘다. 그새를 못 참고, 남의 저택에서 손찌검을 한 모양이다.
하여간 품위라곤…….
“흐음. 그래. 자, 다 확인했나?”
이안이 펜을 건네주며 계약의 마무리를 진행했다.
“네. 문제없습니다. 그럼 서명하겠습니다. 백작님.”
“그러지. 굴라는 오늘 바로 가져가는 것으로.”
“혹시 금화를 가져오셨는지요?”
“금화 1,000닢은 지금 줄 수 있고, 나머지는 하이만 뱅크를 통해 옮기겠네. 당장 굴라를 선별하는 동안 은행에 다녀오면 되겠어.”
메렐로프 백작이 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금화 1,000닢이라. 제멋대로 한 자루에 열 닢이면 딱 맞겠다고 생각하여 챙겨온 모양이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서명을 그려 넣었고, 백작 역시 마찬가지로 안주머니에서 인장을 꺼내 거래를 완료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오늘의 거래가 두 영지에게 뜻깊은 순간일 겁니다.”
“흠. 그래. 굴라 선별 작업을 시작하지.”
“밖에, 일꾼들을 모아라. 100자루를 쌀 것이다.”
“자루를 가져와라! 튼실하고 쭉쭉 잘 늘어나는 것으로! 그리고 마차에서 상자를 가져와!”
계약이 체결되자, 저택의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백작의 지시에 하인들이 마차에서 궤짝을 줄줄이 꺼내 내렸다. 성인 남자 셋이서 끙끙대며 옮긴 것은 금화 1,000개. 마차 네 대에 나뉘어 온 것이었다.
“헉!”
상자를 열자, 안쪽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금빛이 새어 나왔고, 그걸 본 사용인들이 죄다 얼어붙었다. 그러곤 이내 당황하며 이안을 돌아봤다.
“살다 살다 옥수수 알 말고 이렇게 누런 게 많이 모인 건 처음 봅니다. 우와…….”
“이, 이, 이거 어, 어떻게 할까요?”
이안 역시 시계를 확인하며 지시했다. 백작은 제 하인들을 끌고 굴라 창고를 헤집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궤를 다시 마차에 실어라. 바로 은행으로 갈 것이다. 다들 메렐로프 백작님과 수하들을 도와 굴라 100자루를 옮기고 있거라.”
“히익! 100자루를요?”
“지금 제가 잘못 들었습니까?”
“저쪽에서 원하는 걸 원하는 만큼 담을 것이니, 크게 고생할 것 없다.”
실하고 알맞은 크기는 모두 메렐로프 영지 사람들이 챙길 일이었다. 사용인들은 그저 옆에서 감독 감시만 하며 안내를 해주면 되었다.
“은행이라 하시면…….”
“바리엘에 은행이 또 있는가? 하이만 뱅크.”
이안의 단호한 말에 하인들이 다시금 궤짝을 마차에 올렸다. 그리고 이내 어수선한 저택을 뒤로하고 정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