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61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61화(861/863)
제861화. 순환
“끝인가?”
진은 바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마법의 기운 역시 확 사그라든 것을 알아챈 마법사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 것 같습니다만.”
“자안 어르신! 다 된 것입니까?”
자안은 준비한 청주를 꼴딱꼴딱 들이켜며 뒤를 돌아봤다. 그 모습에 아코렐라와 마법사들은 긴장이 탁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먹어 죽는 줄.”
“그러니까 말입니다.”
“놀라기는, 에끼! 새가슴 군단이로구만! 끌끌!”
“술 먹는 거 아니라면서요!”
“시꺼, 이놈들아! 속에 난 열기를 가라앉히는데 이만한 게 없다. 어우, 이거 맛 좋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의 마법부 뒤뜰에서 일어난 주문이었다. 금빛 글자로 이루어진 거인의 형상을 보자마자 그들은 머릿속이 희게 변했더랬다. 혹시나, 정말로 혹시나 자안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큰일이었으니까.
그들은 경계 태세를 풀고서 헤일을 돌아봤다.
“헤일 대장. 뭐가 좀 달라지셨습니까?”
“…가슴 언저리에서 뭔가가 톡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육신이 아니라 내면의 무언가였어.”
“성공적이었나 보군요.”
“아아, 다행입니다.”
이로써 이안과 헤일의 영혼은 풍화를 면할 것이다. 마법사들은 주섬주섬 일어나서 예를 갖추었고, 가이아식이 아닌 동방의 식으로 자안에게 인사했다.
“자안 어르신, 고맙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우리 대장이랑 이안 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안은 병나발 불며 손을 내저었다. 인사치레는 저리 치우라는 듯.
“꺼어억. 내가 어디 꽁으로 해 준 것도 아니고, 되었다! 그리하면 나도 물건 받고서 그리 인사해야 할 것 아니냐? 저리 치우고 마무리나 하자.”
그가 술병을 휙 던지자 아코렐라가 한 손으로 잡아챘다. 단숨에 들이켰는지 그사이 깔끔하게 비어 있다.
진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자안을 보더니, 따라오라며 고갯짓했다.
“데라족의 무기를 말하는 거겠지?”
“무기를 만드는 종족이 따로 있나 보군요?”
“시초는 그들이었지만 문제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 지금도 그들이 운영하는 대장간 업무 대부분은 고용된 사람들이 맡고 있으니까. 제조법을 가져간다면 동방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정 사정이 힘들다면 완제품을 가져가도 좋고.”
자안은 진을 뒤따라 마법부를 떠났다. 마법사들은 뒤뜰 정리를 시작했고, 혹 금빛 현상을 본 제국민들이 걱정할까 공식 입장을 내기로 했다. 아코렐라의 지시에 맞춰 마법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자안은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내 돌아갈 때 서역의 기술자들을 좀 데려갔으면 싶습니다만.”
“데라족을 말하는 건가?”
“그자들도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고요. 무엇보다 마법부의 인재를 동행하고 싶습니다.”
진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자안의 관심사는 오로지 괴이의 절멸에만 집중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르는 투를 보아 하니 문화적 교류에도 뜻이 생겼나 보다.
“바리엘은 언제나 환영일세. 동방과 가이아의 교류를 통해 더 나은 발전을 도모할 수만 있다면.”
“예에,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읍하옵니다.”
“사절단을 정식으로 선별하지. 우선 데라족의 무기부터.”
“한데 대장간은 황궁 밖에 있다 하지 않았나요?”
“밤중에는 작업을 하지 않으니 지금 가 봤자 볼만한 게 없네. 핌!”
본궁. 진의 부름에 데라족 핌이 호다닥 달려왔다. 작은 키에 제멋대로 생긴 이목구비. 자안은 처음 보는 종족이라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핌은 빠릿하게 경례하고서 두 귀인을 모셨다.
“오셨습니까?”
“무기는?”
“준비해 두었습니다.”
핌은 진열대로 안내했다. 잘 닦인 은빛의 무기들이 벨벳 천 위에 놓여 있다. 자안은 턱을 괴고서 그것들을 신중히 살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일반 무기와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만? 혹시 사기 치시는 건 아니지요? 그, 뭐라더라. 요즘 말로 ‘먹튀’라 하던데.”
“…겉으로 보기에는 구분하기 쉽지 않네. 그래서 일반인이 일상에서 사용도 가능하지.”
진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망치 하나에 불과했던 데라족의 무기는 연구를 거듭하여 단검과 창 혹은 농기구로도 제작되었으므로, 저리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걸 사용할 자들은 불시에 마물의 습격을 받을 확률이 큰 농민들일세.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적할 수 있도록 함이 목적이지. 아직 완성도 측면에서는 모자라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쓸 만할 것이네.”
“흐음.”
자안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손끝으로 은빛 날을 매만졌다. 마력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이걸 진짜 믿어도 되려나?
그때였다.
“영감!”
콰앙!
베릭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근신 중이라더니, 팔팔한 게 어디서 요양이라도 하고 왔나 보다. 자안은 베릭을 힐끔거리며 인사했다.
“오냐. 망아지야.”
“비기인가 베개인가 그거, 애들한테 보여 줬다며?”
“뭐? 아아.”
자안이 아코렐라에게 보여 준 보랏빛 구슬을 말하는 게다. 그가 오랫동안 살아올 수 있었던 비밀.
베릭이 버럭 소리쳤다.
“나도 알려 줘!”
“누가 보면 내가 다른 놈들한테는 알려 준 줄 알겠다. 신경 꺼라.”
“혼자만 오래 살아서 뭐 하게?!”
“그러니까. 오래 살아서 뭐 하게?”
자안은 데라족의 무기를 꼼꼼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진심이었다. 목적 없는 영생은 저주와 다를 바 없었기에.
하지만 베릭은 단호했다.
“딱 100년이면 돼.”
“이안 히엘로 만나러 가게?”
“……!”
진과 베릭이 동시에 놀라서 멈칫거렸다. 핌 역시도 소스라치게 경악했는데, 그간 이안의 정체에 대해 잊고 있던 터라 이리 갑작스레 ‘반역자’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진은 핌을 밖으로 나가게 하고서 물었다.
“자안. 어찌 알았는가?”
“뭘 어찌 알아요. 천자께서 그자를 가족이라 칭하지 않으셨소. 황궁에서 사는 사람치고 핏줄에 의미 부여하지 않는 자를 내 보지 못하였으니, 필시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지요. 게다가-”
투웅. 자안이 가벼운 망치를 집어 들고는 덧붙였다.
“황궁 사람들이 내게 바라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그 이안 히엘로라는 자와 연관되어 있으니, 베릭 저놈이 저리 찡얼대는 것도 그것과 관련되어 있으리라 여긴 것입니다.”
“영감, 눈치 좋네?”
“나이를 헛으로 먹은 줄 아느냐?”
“근데 아코렐라가 준 술은 왜 그냥 마셨는데?”
“…술 앞에서는 장사 없다.”
크흠! 그 얘기는 그만하지! 자안이 망치를 어깨에 두르고서 베릭을 쳐다봤다. 똥고집 하나만큼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눈빛이다.
“아무튼, 네 의지는 알겠다만 알려 줄 수는 없어.”
“왜!”
“인연이란 한 번 맺고 끊어지는 게 아니다. 이미 그자와 깊은 연으로 엮였다면 언제고 다시 이어지는 게 운명의 순환이지.”
자신이 죽지 않고 삶을 계속 이룰 수 있는 건 그 운명의 순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업을 이루고 나면 자신은 먼지바람처럼 흩어져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작 만남에 의의를 두고자 순환에서 벗어난단 말이냐? 그리 어리석은 짓이 또 있을까? 다음을 원한다면 착실하게 기도하여 영혼 정화에나 힘써라.”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 혹은 그 이상의 만남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포기하겠다고? 멍청하긴.
자안의 태도가 강경하자, 베릭이 이를 꽉 깨물며 달려들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결정해!”
타앗!
베릭이 자안의 안주머니로 손을 뻗자, 자안은 가볍게 뒤로 물러나 손에 든 망치로 베릭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까아앙-!
“커헉!”
“오?”
청명한 소리와 함께 와락 나뒹구는 베릭. 자안은 뜻밖의 위력에 놀라서 눈빛을 반짝였다. 아주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타격감이 상당했다.
“정말이네?”
이거라면 일반 백성들도 괴이와 맞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적어도 속수무책인 개죽음은 면할 수 있겠지. 자안은 신나서 연신 허공에다 망치를 휘둘러 댔다.
“어허, 이거 물건입니다그려. 허허허!”
“아오 씨, 영감!”
“떽! 시끄러, 인마! 그렇게 만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가서 만나든가.”
베릭이 혹 난 머리를 쥔 채로 자안을 노려봤다. 예전에는 한 대 맞고 바로 뻗었는데, 이제는 기절하지 않을 정도는 됐다.
“견합이 거두어졌으니, 이제부턴 나 역시 이안 히엘로의 흔적을 쫓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사이 어디 가기 전에 직접 만나 보라고. 대사막 어디인지는 대충 아는 눈치더만?”
알다마다. 무조건 천려지.
베릭이 입을 비죽이며 꿍얼거렸다.
“내가 뭐 지처럼 한가한 노인네인 줄 아나?”
“어쭈? 이놈이? 너 이리 와라!”
“오라면 못 갈 줄 알고?!”
까앙!
“키야, 손맛 좋도다!”
까앙!
자안이 베릭의 머리를 북 두드리듯 두드려 대는 동안, 진은 서랍에서 잘 엮은 서류 뭉치를 꺼냈다.
“이건 전쟁의 마지막 열흘간의 기록일세.”
“오! 그렇군요.”
“본디 황궁의 기록에는 이안 경에 대한 것이 빠져 있는 터라. 새로이 편집한 것이니 가이아 어디에도 유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시게.”
“물론이지요!”
“요약하자면, 지하신을 이긴 것은 ‘믿음’이었다고 할 수 있네.”
자안은 서류 뭉치를 건네받으며 싱긋 웃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좋은 말 같습니다.”
“자, 그럼-”
이제 사절단에 대해서만 의견을 나누면 될까? 진이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시종장이 바깥에서 인기척을 냈다.
똑똑.
“폐하.”
“무슨 일인가?”
“마법부의 전언입니다. 동방의 마법사 은랑이 이르기를, 주술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합니다.”
“뭐?”
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봤다. 베릭 역시 있는 정신 없는 정신 바로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아아-”
자안만이 은랑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턱을 문질렀다. 이어 쩝- 하고 운을 떼더니, 베릭의 등을 발로 밀었다.
“시간이 다 되었나 보다.”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건데?”
“은랑 고것이 살을 날렸다 하지 않았니? 보아하니 이안 히엘로가 이대로 죽으면 내가 뒤집어쓸 것 같아 이실직고하는 게다.”
“이안이가 죽다니?”
“말 그대로.”
베릭이 벌떡 일어나 자안의 멱살을 붙들었다. 하지만 자안은 농담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베릭의 시선과 마주했다.
“무엇이든 제 역할을 다하면 거두어지는 법이다. 너무 미련 두지 말아라.”
“야-!”
타닥타닥!
그때, 궁 밖으로 울리는 마법사들의 발소리. 하나같이 희게 질린 낯이다.
“폐, 폐하!”
“은랑이 이상한, 이상한 말을 합니다!”
“뭔가 이상해서요, 가서, 봐, 봤으면 하는데…….”
결단이 필요한 순간. 진은 잠시 멈칫거리며 자안을 돌아봤다. 아무리 급하다 한들 동방의 마법사만 황궁에 남겨 두고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여기서 대사막의 천려까지 포탈을 열 수 있겠는가? 어마어마한 마력 소모도 소모지만, 좌표를 제대로 계산할 수 있을지부터 미지수였다.
“폐하?”
진이 무어라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굳어 버리자, 자안이 읏차! 하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을 이리저리 돌리며 능청스레 일렀다.
“하도 소문이 무성하니 낯짝이라도 보고 싶구나. 나 지금부터 고놈 보러 갈 건데, 같이 갈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