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63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63화(863/863)
제863화. 새로운 시작
햇살이 화창한 어느 오후.
밭일하던 농부들이 허리를 펴고서 먼 언덕을 바라봤다. 낯선 마차가 탈탈거리며 다가오는 것 아닌가. 그들은 잠시 쉬어갈 겸, 그늘로 몰려들어 찬물을 찾았다.
“또 중앙에서 의사가 오는 건가?”
“그런 것 같은데. 갈수록 주기가 짧아져.”
“무슨 병인지도 모른다지?”
마차는 농부들을 지나치지 않고 멈췄다. 혹여 괜한 소리를 했나 싶어 눈치 보던 와중, 마부는 길 끄트머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길 좀 물읍시다.”
“예예.”
“영주님 저택이 이쪽으로 가면 됩니까?”
“처음 오신 분인가 봅니다. 저번에 왔던 의사 선생님 마차랑 다른 걸로 봐서요.”
“이쪽 길로 가면 되는지를 물었는데.”
“아, 미안합니다. 저희가 영주님 건강 걱정이 많아서요. 쭉 직진하십시오. 거의 다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부는 쌩하니 채찍을 휘두르며 농부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찬물을 꼴딱꼴딱 넘기며 멀어지는 마차를 지켜봤다.
“의사가 바뀌었나 봐.”
“아무도 못 고치니 계속 바꿀 수밖에. 그나저나 정말 큰일 아닌가? 영주님께 자식이라고는 이제 겨우 다섯 살 난 도련님밖에 없잖아.”
“어허! 말조심하게!”
“아니, 뭐,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지.”
농부들은 손수건을 탁탁 털며 딴청을 피워 댔다.
중앙에서 마차로 다섯 시간 정도 떨어진 이곳은 토지가 비옥해 자급자족하기 알맞았다. 거기다 영지를 둘러싼 산맥엔 크고 작은 광산들이 가득했다. 그런 덕에 지금껏 먹고사는 걸로 문제 된 적 없건만,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그런데 있잖아.”
한 농부가 완전히 사라진 마차 쪽을 힐끔거렸다.
“봤어?”
“…봤지.”
“나도 봤다네.”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여인? 예쁘더라.”
“살면서 그리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보네.”
그들은 격하게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잡생각을 떨치듯 몸을 풀고는 농기구를 붙잡았다.
다시 밭으로 갈 시간이었다.
한편, 마차가 멈춘 곳.
히이잉!
“어디서 오셨습니까?”
“중앙에서 왔습니다. 캘리 선생님이십니다.”
마부의 안내에 문지기가 저택 문을 열어 주었고, 이내 연락받은 집사가 직접 내려와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캘리 선생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함께 오신 분들은?”
“내 제자들입니다.”
“그럼, 이리로.”
체구가 작고 마른 백발의 노인은 집사와 악수한 다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걸으면서, 캘리는 저택을 둘러보았다. 중앙에서 조금 떨어진, 굳이 명명하자면 ‘변두리’에 가까운 영지이긴 하다만, 역시 황실의 방계는 방계인가 보다. 지금껏 가 봤던 그 어느 저택보다 화려하고, 거대했으며, 아름다웠다. 캘리의 걸음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조용히 이동했다.
“서신으로 듣긴 했습니다만, 정확한 증상이?”
“발열과 오한 그리고 심각한 두통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으십니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실 정도로요. 기력이 쇠하다 못해 가끔 손과 발이 떨리고, 간헐적으로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오기도 합니다.”
“흐음.”
심상치 않았다. 캘리는 안경을 바로 쓰며 걸음을 재촉했다.
똑똑.
“마님. 중앙에서 의사가 도착했습니다.”
“어서 모셔라.”
“실례합니다.”
침대에 누운 남자와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여자. 영주와 그의 부인인 제리아였다.
부인은 백금발의 긴 머리칼을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했음에도 과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잘 어울렸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와 주어 고맙소, 선생.”
“아닙니다. 진찰을 먼저 간단히 하겠습니다.”
캘리는 청진기를 목에 걸고서 영주의 이불을 걷었다. 훤히 드러난 영주의 몸. 이제 고작 쉰이 넘었을 뿐인데 마른 고목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너무 쇠약했다. 이 잠깐의 움직임에도 정신을 못 차리며 잔기침을 해 댈 정도로.
“쿨럭! 쿨럭!”
“이런, 물을-”
“커헉! 컥!”
영주는 손쓸 틈 없이 붉은 피를 토해 내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캘리의 제자들이 빠르게 다가와 거들었고, 부인은 한 발 뒤로 물러선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숨, 영주님. 제 말 들리십니까? 숨을 쉬십시오. 괜찮습니다.”
“크허억! 허억!”
부인은 창백해진 낯빛으로 죽어 가는 제 남편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더는 힘들었는지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침실을 빠져나왔고, 뜨거워진 물 따위를 나르는 시종의 뒷모습만 넋 놓고 쳐다봤다.
스윽.
제리아는 한숨을 삼키며 빈 복도에 몸을 기댔다. 스르륵 점차 가라앉는 두 다리. 그러나 허리만큼은 꼿꼿했다.
사랑 따위 없는, 목적만이 존재한 결혼이지 않았나? 하지만 막상 남편이 저리 죽어 가는 걸 보니 마음속 무언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두려움일까? 저자가 죽으면 남은 자신과 아들이 어찌 될지 모른다는? 그것도 아니면 연민? 걱정?
‘설마.’
부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원래도 건강한 자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 정확히는 지난여름을 기점으로,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뚝 끊겼다.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부인은 고개를 돌렸고, 이내 자신과 같이 백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아이와 마주했다.
“어머니.”
그녀의 아들이다.
“이안.”
“괜찮으십니까?”
고작 다섯 살 난 아이 주제에 의젓한 물음이 제법이다.
부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내려다봤다. 방금까지 동요했던 눈빛은 사라지고, 언제나처럼 엄격한 얼굴로.
“지금은 수업 시간일 터인데.”
“선생님께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구나.”
“어머니.”
이안은 말끝을 흐리며 제 어미를 올려다봤다. 괜찮으십니까? 다시금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어머니가 답을 주지 않는다는 건, 질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아버지는 괜찮다. 중앙에서 실력 있는 명의가 내려왔어.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며 아버지를 돌볼 것이니 마음 놓고 공부에 매진하려무나.”
부인은 아이가 손끝을 꼼지락거리는 걸 보았으나, 애써 무시하며 시선을 돌렸다. 저택의 누군가가 보고 있을지 모른다.
‘넌 아무것도 몰라야 해.’
아이는 그저 제 아비의 고통과 몸부림에서 멀어져 다섯 살 난 아이로 남아야 한다. 혹여 남편을 해치고 나아가 자신까지 해치려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자와 맞서는 건 자신의 몫이다.
‘그래야 네가 산다. 나는 죽더라도.’
“어서 방으로 돌아가렴.”
부인은 아이의 등을 가볍게 떠밀고서 몸 돌렸다. 드레스 자락이 가볍게 끌리며 사라지는 모습을, 아이는 한참이나 복도에 선 채 바라봤다.
* * *
한고비 넘긴 영주의 침실.
의사와 제자들이 복도로 나가 병명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상태가 중증이다. 그들은 물에 젖은 수건으로 피를 닦아 내며 한숨 쉬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저랬다고?”
“지난여름부터 침실 생활을 했다 합니다.”
“북쪽 대륙에서 발병한 아델루크병 아닐까요?”
“그런 것치고는 피의 색이 지나치게 맑습니다.”
바깥에서 스승과 선배들이 토론하는 동안, 막내는 영주의 곁에서 일지를 작성했다. 펜촉에 잉크를 톡톡 묻혀 써 내린 첫 문장.
-바리엘 1184년, 하델 영지에서의 첫 진료.
그녀는 죽은 것처럼 잠든 영주의 호흡을 확인했고, 안색과 증상 따위를 상세히 기록했다.
종이 두어 장이 빼곡하게 채워질 때쯤, 문소리가 들려왔다.
“아.”
웬 어린 남자아이 하나가 무덤덤한 낯으로 서 있는 것 아닌가? 그녀는 아이가 저택의 도련님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일어나서 인사하려 하자, 아이는 작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일을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도련님. 저는 중앙에서 온 캘리 선생님의 제자랍니다. 아버님이 걱정되어 오셨군요?”
다정한 물음에 아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다가가도 되겠나? 허락을 구하는 눈빛에 여인이 펜을 내려놓았다.
“그럼요. 다만 잠드신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조심해 주십시오.”
아이가 조심히 다가와 침대에 손을 올렸다. 거기까지만 허락되었다는 듯.
“많이, 안 좋으신가?”
여인은 무어라 답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멈칫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깊이 중독된 상태다.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차치하고 당장 오늘내일 어찌 될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사실대로 전달하기에는…….
“가감 없이 알려 주게.”
이안은 반듯한 눈빛으로 여인을 돌아봤다. 다섯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성숙한 자세다.
“어머니께서도 쉬이 알려 주지 않으시니 내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나쁜 생각만 떠오르네.”
“도련님.”
아아. 안쓰러운 아가.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안에게 허리 숙였다.
“영주님께서 많이 아프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있어요. 그것을 위해 저희가 온 것이고요. 최선을 다하여 영주님을 살릴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희망이라는 걸 붙잡아야 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으신 것이로구나. 아이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잠시 고민했다.
‘대체 왜?’
병명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은 한 저택에 살면서 같은 음식을 먹었지 않나? 게다가 피까지 이어져 있는데, 어째서 아버지만 저리 병이 나신 걸까? 그것도 유명한 명의들도 손쓸 새 없이 갑자기.
‘설마.’
이안은 문밖을 힐끔거렸다. 설마 누군가 아버지를 의도적으로 병들게 한 걸까?
아이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여인이 이안의 손을 잡아 주려는 순간이었다.
“이안 도련님?”
바깥에서 부르는 시종의 목소리에 이안이 몸 돌려 침실을 나섰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알리는 게다. 그에게는 주어진 숙제가 너무 많았으므로.
아이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여인을 돌아봤다.
“아버지를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끔 이리 아버지를 뵙고 싶은데.”
어머니가 허락해 주질 않으셔. 이안이 조금 시무룩하게 덧붙이자 여인은 안쓰럽게 웃었다.
“언제든 오십시오. 아마 제가 침실을 담당하여 주로 있을 것입니다.”
“고맙네. 자네 이름이?”
금빛 머리칼만큼이나 화사한 미소다. 이안의 물음에 여인은 녹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필리아입니다.”
“필리아. 나는 이안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
“잘 부탁하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이안이 나가자, 필리아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다시금 펜을 잡았다.
귀엽고 의젓한 아이로구나. 지금껏 봐 온 귀족 아이 중에 제일인 것 같아.
“이안 도련님.”
“시끄러워.”
“이리 침실에 드신 걸 부인께서 아시면 제가 혼납니다.”
“의사들도 따로 복면을 쓰지 않았다. 전염병이 아니라는 뜻이지. 그리고 나보다 너나 더 걱정하려무나. 나는 이제 처음 아버지를 뵈었지만 너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침실을 오가잖아?”
아이의 똑 부러지는 대꾸에 시종은 입술을 오므렸다. 고작 다섯 살배기 아이긴 하다만, 말로 이기기가 힘들다. 그러니 호소하는 수밖에.
“그래도요. 도련님은 어리시니 병에 더 취약하십니다. 혹여 몸이라도 아프시면 제가 마님께 매질을 당합니다.”
“몰라.”
“아이, 도련님!”
히엘로라는 이름이 시간의 흐름에 잠겨 완전히 사라지고, 아직 눈감지 않은 노인들만이 지하신과의 대전쟁을 어렴풋이 기억하게 된 어느 시절-
이안 베로시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