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64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64화(864/935)
제864화. 저택의 배신자
“이안 도련님?”
가정교사의 부름에 아이가 정신을 번뜩 차렸다.
이안은 작은 손으로 펜대를 단단히 붙잡고, 아무렇지 않게 글자를 따라 적었다. 가정교사가 의아한 미소를 지으며 이안의 안색을 살피자, 이안이 입술을 오므렸다.
“미안하네.”
“아닙니다. 쉬었다 할까요?”
고작 다섯 살 난 아이다. 이리 차분히 앉아서 글공부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집중하려 애쓰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가정교사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초코케이크를 이안 앞에 내놓았다.
“도련님이 좋아하는 초코케이크입니다.”
이안이 눈썹을 까딱이자, 가정교사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휘핑크림을 케이크 위에 잔뜩 올렸다.
“너무 많이 드시면 치아가 상합니다.”
“걱정 말게. 칫솔질을 열심히 하고 있어.”
“다행입니다.”
가정교사는 턱을 괴고서 아이를 지켜봤다.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 모습은 영락없이 다섯 살 아이인데, 이토록 가끔 보이는 벽안은 놀랍도록 성숙해서 낯설게 느껴졌다. 귀족의 품격이란 게 이런 걸까?
“아버지 말일세.”
“예, 중앙에서 의사들이 왔다지요?”
“다들 병명에 대해서 뭐라 하던가?”
“아.”
가정교사는 난감하게 말끝을 흐렸다. 이안에게 영주의 건강 상태에 대하여 언질하지 말라는 부인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안은 어서 말하라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선생께서 자식 된 도리를 내게 알려 주었지 않아? 부모님을 공경하고 존경하며 사랑하라고.”
“예, 그리하였지요.”
“그러니 어서 말해 보아. 어머니는 무엇이 두려우신지 아버지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으셔.”
포크 쥔 이안이 엄격한 투로 선언했다.
“선생께서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아버지 걱정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네. 글자 쓰는 법도 까먹을 것이고, 숫자 공부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흥. 억지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지.”
이안은 보란 듯이 케이크를 먹으며 눈을 비죽거렸다.
하지만 가정교사도 어찌할 수 없었다. 다섯 살 난 아이에게, 아버지가 죽을 고비에 서 있노라고 어찌 말한단 말인가?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됩니다. 케이크를 다 드시면 다음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이안이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냈으나 가정교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두 시간에 걸친 수업이 다 끝나자, 이안은 인사도 남기지 않고 서재를 뛰쳐나왔다.
‘다들 왜 이리 비밀로 하는 거람.’
자신도 아버지를 걱정할 수 있고, 어머니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몰라, 그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이리 쉬쉬하는 것은 정말이지 부당한 일이다.
“도련님! 도련님!”
“따라오지 마!”
“아이참, 혼자 어디를 가시려고요?”
시종을 따돌리고자 열심히 뛰어 보았지만 무리다. 이안은 저택 뒤뜰로 도망치다 결국 포기하고는 숨을 헉헉 내쉬었다. 시종 역시 힘들다는 듯 땀을 훔쳐 냈다.
“도련님. 날이 갈수록 잘 뛰시네요.”
“따라오지 말라니까-”
바스락.
그때였다.
이안은 풀숲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시종 역시 마찬가지인지 동시에 같은 곳을 쳐다봤다. 바깥 짐승인가? 이안이 고갯짓하자, 시종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토, 토, 토끼가 들어왔나?”
“토끼였으면 하는 바람이겠지. 흥.”
“도련님, 왜 이리 심술이십니까?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훠이!”
시종이 나무막대기로 수풀을 푹 찌르자, 무언가 움찔했다.
“꺄앗!”
금발에 녹안을 지닌 여인, 필리아였다. 그녀는 머리칼에 나뭇잎을 덕지덕지 붙인 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봤다.
“어머, 아, 안녕하세요.”
“헉! 중앙 손님 아니세요?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 예. 잠시 확인할 것이 있어서요.”
그녀는 옷을 탁탁 털며 수풀에서 빠져나왔다. 손에는 풀떼기 같은 게 잔뜩 들려 있었는데, 이안은 이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확인할 것이라니?”
“제 전공이 약초학이거든요.”
“그래서?”
“그…….”
끄응. 이걸 말해도 되려나?
필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자,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방금 가정교사에게 무시당해 속이 상하는데, 필리아까지 이리 나오다니.
아이의 실망한 눈치를 단박에 알아챈 필리아가 쪼그려 앉아 설명했다.
“오, 그렇게 울먹이지 마세요. 도련님.”
“울먹이다니. 누가?”
“영주님의 병증은 굉장히 복합적입니다. 그러니까, 한두 가지의 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혹시 병을 유발할 만한 독초가 저택에 서식하고 있는지 살펴보던 참이랍니다.”
필리아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이안은 또래보다 훨씬 똑똑한 아이라는 점이다.
“그 말은-”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질병을 불러일으키는 독초야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신과 어머니를 비롯하여 저택에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만 유독 거기에 반응하여 중병을 앓게 되었다? 이상하지 않나?
“아버지만 그걸 따로 드셨다는 말인가?”
“아니요. 그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두고자 확인하는 것이니, 단언하실 일은 아니지요.”
“자세히 설명해 보게.”
“저기, 도련님.”
“설명해 주지 않으면 당장 그대의 스승에게 달려가서 이 일을 논의할 것이다.”
“예에?! 어찌 그런?”
다정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어찌 그리 무서운 말을? 필리아가 경악하며 한 걸음 물러서자, 이안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부탁하네. 응?”
어째서일까. 필리아는 이안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시종을 힐끔거렸고, 시종 역시 말리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어쩔 수 없이 한숨 쉬었다.
“일단 잠시 앉으십시오.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이안과 시종은 필리아와 마주 보고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손에 든 풀떼기를 하나씩 늘어놓으며 설명했다.
“순서대로 하상초, 대꽃풀초, 도롱초입니다. 특별한 것들은 아니고요, 산과 들 어디서든지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다만 제조 방식에 따라 그 효능이 크게 바뀌지요.”
필리아는 턱을 가볍게 받치며 덧붙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쯤의 일일 것입니다. 바리엘 동북쪽에 하완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아시나요?”
“들어본 적 있네.”
“동방을 비롯한 타국의 물건들이 하완을 통해서 많이 들어옵니다. 그중에서는… 아주 나쁜 약들도 섞여 있고요.”
마약 혹은 미약(媚藥).
필리아는 차마 이안에게 이 낱말들을 말할 수 없어 돌려 일렀다. 정작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마약인가?’를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선황의 시해에도 사용되었을 정도라고 하니, 당시에는 굉장히 무시무시한 독초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고, 이제는 민간에서도 흔히 쓰여 하상초, 대꽃풀초, 도롱초와 함께 섞어 제조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자네 말은, 지금 아버지가 그 제조 독에 노출되었다는 건가?”
“말씀드렸다시피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증상을 독립적으로 본다면 의심할 만한 근거가 있어서요.”
“어머니에게는?”
“…아직.”
사실은 ‘아직’이 아니다. 필리아는 앞으로도 계속 부인에게 보고하지 않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스승인 캘리에게 하겠지. 누가 범인인지 모르니까. 혹여 부인이 주도자라면… 상당히 곤란해질 터다.
그러자 필리아는 불안해졌다. 곧 ‘왜?’냐고 물어 올 아이가 머릿속에 그려진 까닭이다.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말하지 말게.”
“예?”
이안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어머니를 믿어. 하지만 저택의 다른 사람들은 모를 일이지. 괜히 보고했다가 자네가 화살을 맞을 수도 있으니, 조용히 조사하게.”
필리아는 이안의 말뜻을 곧장 이해하지 못해 멈칫거렸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이 다섯 살 난 아이에게 ‘배려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의 심계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다는 사실도.
감탄도 잠시, 필리아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위험한 발언이었다. 누군가 들었다면 경을 칠 수도 있을 만큼.
마침 필리아의 눈에 시종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이의 시종이다. 그러자 이안은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해나는 믿을 만한 시종이니까.”
“…도련님. 저를 믿어 주시는 겁니까?”
해나라 불린 시종이 눈을 반짝이며 이안에게 찰싹 붙자, 이안은 그녀를 밀어 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뒤뜰에 오가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이안은 생각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운 것은 지난여름. 배신자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단번에 죽이지 않았다. 표적이 죽지 않았으니 이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
아직 저택 안에 배신자가 있다. 이안은 작다란 손을 꽉 쥐며 차오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 모습에 해나가 안절부절못하며 아이를 위로했고, 필리아 역시 어쩔 줄 몰라 하며 껴안았다.
“제 기우일 것입니다, 도련님.”
“예, 도련님. 중독이었으면 그간 의사들이 못 알아챘을 리 없지요. 영주님은 원래 몸이 좀 안 좋으셨으니까요. 너무 두려워 마세요.”
“두려운 게 아니다.”
“예?”
이안은 손등으로 눈물을 슥슥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두려워하다니? 자신이 무엇 하러?
“화가 나서 그래.”
감히 저택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해치려 한 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고 너무도 어려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 온 지난 시간이.
‘누가 그리한 것인지 알아내야겠어. 그리고 어느 정도 상황이 확실해지면 어머니께 말씀드려야지.’
“필리아.”
“예, 이안 도련님.”
“알려 줘서 고마워.”
아이는 담담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쉬이 입을 열지 않았지만, 필리아 덕분에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 한 것인지…….”
“분명히 말하지. 내게 도움이 되었다.”
“그렇습니까?”
필리아가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영주의 독살 의혹이 퍼지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유달리 차가워 보이던 부인 때문일까-
필리아는 이 작은 아이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기특하면서도 안쓰럽기도 하고…….
“그럼, 또 보지.”
이안은 그리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가, 성큼 필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러고서 손수건을 건네며 당부했다.
“흙이 많이 묻었어.”
“고맙습니다, 도련님.”
이안이 성큼성큼 뛰어가자, 해나가 그 뒤를 따르며 꾸벅 고개 숙였다.
필리아는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초를 그러모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녀가 할 일은 딱 하나, 영주의 병명을 파악하는 것. 목표가 뚜렷해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타앗!
“도련님. 같이 가요!”
이안은 머릿속이 복잡해졌음을 느꼈다. 음독이라면 역시 주방 쪽일까? 지난여름에 왔던 자가 누가 있지? 기억나지 않았다. 수상한 자는? 그 역시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
“어? 손님이 오셨나 봅니다.”
“손님?”
“처음 보는 마차인데요…….”
이안이 해나에게 팔을 뻗었고, 해나는 자연스레 아이를 안아 들어 창밖을 보게 했다. 잘 차려입은 귀족들이 집사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집사. 오랜만이군.”
“어서 오십시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우리는 뭐, 여느 때와 같지. 하델 영주께서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에 이리 병문안 왔네.”
“감사합니다. 응접실로 드시지요.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의 안내를 받던 사내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문 쪽을 바라봤다. 순간 눈이 마주친 이안이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고, 후다닥 아래로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본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크로니 님?”
“그래. 가지.”
자신의 작은 숙부께서 이제 겨우 다섯 살이라지? 귀엽기도 해라. 크로니는 제 일행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