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65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65화(865/935)
제865화. 병문안
“할아버님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크로니가 제리아 부인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며 인사했다. 그녀는 고고한 자세로 이를 받더니, 손님들에게 어서 앉으라는 듯 소파를 권했다.
“중앙에서 의사들이 왔으니 좋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좋아질 것이라 믿는다. 그 뜻은 지금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뜻과 같았다.
크로니를 비롯한 손님들은 안타깝다는 듯이 미간을 작게 찡그렸다. 그들은 집사가 내어준 차를 들며 물었다.
“병명도 아직 모르고요?”
“…안타깝게도.”
“그렇군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적이 일어날 것이니.”
“다들 고맙습니다.”
족보로 따진다면 조모와 손자 관계였지만, 그들은 서로 예의를 갖추어 존대했다. 크로니 측과 제리아 부인이 피를 나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고, 교류 또한 활발하지 않았던 터라 그들은 자연스럽게 깍듯이 대했다.
“병명을 아는 것이 치료의 시작일 터인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중앙에서 실력 좋은 의사를 찾아 따로 보내보겠습니다.”
크로니는 한껏 걱정스러운 투로 제안했으나, 제리아 부인은 찻물을 머금을 뿐 말을 잇지 않았다.
‘경계하자.’
영주를 죽이려는 자가 있다면, 그 죽음으로 인해 가장 큰 수혜를 입는 자가 바로 범인이다-
이에 따르면, 외부에서 보기에 가장 의심받을 자는 본인이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영지 재산을 상속받게 되니까.
‘그다음은?’
그다음은 이안. 하지만 고작 다섯 살 난 아이다. 마찬가지로 의심받을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일정 부분 상속 권한을 가진 친인척들이겠지. 제리아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지금 와 있는 캘리 박사도 상당히 명망 있는 자이니 믿고 있답니다. 마음 써 주신 것은 감사하나, 사양하겠습니다.”
“흐음. 그러십니까?”
크로니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부인은 지금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지 못했다. 손자가 할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여 의사를 보내겠다고 하였음에도 부인은 ‘거절’했다.
혹여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러니까 영주가 결국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때 이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빈틈이 될 것이다.
예컨대-
‘부인은 영주가 죽기를 바란 것 아닌가요? 중앙의 유명한 의사 진찰을 거절했다고 하던데요.’
이와 같은, 빈틈 말이다.
크로니는 모두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들 들었지? 하는 눈치다. 손님들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차를 홀짝거릴 뿐이다.
그렇게 서로 한 번씩 의미 없는 안부를 주고받았을 무렵, 부인은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진료가 끝났을 것입니다. 잠시 침실로 가서 얼굴을 뵈시겠어요? 의식은 거의 없으시지만요.”
“여기까지 왔으니 물론입니다.”
“돌아가시는 일정은?”
“역시 저택에 머물면 좀 곤란하시겠지요?”
크로니가 다시 한번 빈틈을 노렸다. 여기서 그렇다고 하면, 이 역시 나중에 문제가 될 터였다. 부인이 무엇을 숨기는지는 몰라도 중앙에서 문병 온 친인척들을 돌려보내기 바빴다고.
“그럴 리가요.”
부인은 전혀 아니라는 듯 담담히 대답했다.
“푹 쉬었다 가십시오. 별관의 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하시고, 원하시는 만큼 묵으세요. 저택에 활기가 돈다면 저도 좋습니다.”
“친절하시군요. 그리 말씀해 주시다니.”
“이쪽으로.”
부인이 앞장서서 걷자, 손님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저택을 힐끔거리며 알 수 없는 시선을 나누었다.
끼이익.
“박사?”
“아, 예예.”
“잠시 손님들이 와서 말이지요.”
“안 그래도 막 진료가 끝났습니다. 들어오시지요.”
크로니는 한껏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가 하델의 손을 붙잡았다. 마르고, 앙상하며, 놀랍도록 차가운 손. 산 자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 정말 끝이 보이는가 싶었다.
“제 말 들리십니까? 크로니입니다. 어서 쾌차하시어 건강을 되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리아 부인은 뒤에서 그 모습을 가만 지켜봤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이상한 점 하나 없이 모두가 진심으로 영주의 건강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모를 일이지.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마님.”
바깥에서 시종이 고하자, 제리아가 고개를 틀었다.
“실례합니다. 잠시 계십시오.”
“예, 편히 일 보세요. 부인.”
부인이 밖으로 나가자, 크로니를 비롯한 손님들의 표정이 한층 건조해졌다. 그들은 영주의 손을 놓고는 노골적으로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는데, 마치 부검실에 모여 토론하는 의학자들 같았다.
“상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안 좋아 보이는군.”
“캘리 박사라고 했나?”
“그래. 아주 실력 있는 자지. 나도 몇 번 들어 본 적 있어. 젊었을 적에는 황궁의로 일했다던가?”
“나이가 있으니 일어나더라도 예전 같지 못할 거다. 쯧쯧. 이래서 사람 인생 어찌 될지 모른다고.”
그들이 속닥거리며 하델이 덮은 이불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동안, 크로니는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
궐련을 꺼내 문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발코니로 나가 저택 전경을 내려다봤다.
…봐도 봐도 아름다운 곳이다. 침상에 누워 꼼짝 못 하는 반송장과 그 가족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 * *
“이안?”
제리아 부인은 의아한 눈빛으로 제 아들을 내려다봤다. 평소에는 자신처럼 담담하고 차분한 아이인데 왜인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이안은 어미에게 한 걸음 다가와 드레스 자락을 붙들었다.
“어머니. 저 손님들, 누구입니까?”
“아, 이안, 너는 모르겠구나. 중앙에서 온 친인척들이란다. 네가 숙부고 저들은 조카이지. 족보상으로는 그러하지만 어른들이니 예의를 갖추려무나.”
“잿빛 재킷을 입은 사람은요?”
“누구?”
“눈이 이렇게 찢어지고, 입매는 이렇게 생긴 사람 말입니다.”
이안이 손으로 눈을 찢고 입을 쭉 내리자, 제리아는 당황했다. 아들의 행동이 너무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크로니 경을 말하는 거니?”
“크로니.”
이안은 뭔가 충격받은 것처럼 그의 이름을 연신 중얼거렸다.
그에 제리아는 해나를 돌아봤다. 얘가 대체 왜 이러냐는 듯. 하지만 해나 역시 영문을 모른다며 고개를 잘게 저었다.
“어머니. 그분, 뭔가 무섭습니다.”
“크로니 경?”
“예, 어서 돌아가라고 하면 안 될까요?”
시선이 마주한 순간 엄습했던 불안감. 가슴 밑바닥을 콕콕 찌르고 살살 긁어 대어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제리아는 난감하다는 듯 이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만하라는 신호다.
“어째서 이리 무례하게 구니, 이안.”
“하지만-”
“아버지가 걱정되어 먼 길 오신 분들이다. 이제 막 도착하여 겨우 차 한잔하였는데, 이대로 돌려보내는 게 올바른 행동일까?”
이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촉촉한 눈망울은 쭉 째져 있었으니, 불만을 숨기지 않는 표정이다.
제리아는 예상치 못한 아들의 반응에 놀란 듯 멈칫거렸다.
“가정교사는?”
“수업은 진작 끝났습니다.”
영주가 저리 몸져누운 터라, 영지 내 공무 대부분은 부인의 몫이었다. 워낙에 바쁘다 보니 아들의 수업이 언제 끝났는지 스스로 아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제리아는 이안의 팔을 붙들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내일부터는 수업 시간을 좀 늘려야겠구나.”
이리 천지 분간 못 하고 떼를 써 대니, 가르침을 더욱 받는 수밖에 없다.
이안이 못마땅하다는 듯 볼을 불리는 순간이었다. 궐련을 다 태운 크로니와 그 일행들이 영주의 침실에서 나왔다.
“오호. 이안 숙부시로군요.”
“……!”
크로니를 가까이 마주한 이안의 몸이 굳어 버렸다. 그는 허리를 숙여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크로니입니다. 저는 이안 숙부가 태어났을 때 본 적 있는데, 이안 숙부는 저를 처음 보시지요? 반갑습니다. 이거, 실제로 뵈니 참으로 늠름하시고 단정하십니다.”
“이안.”
인사해야지? 제리아가 이안의 등을 떠밀며 재촉하자, 아이는 더욱 안색을 굳혔다. 하지만 더듬더듬,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고개 숙였다.
“…안녕하세요.”
“예, 반갑습니다.”
“크로니 경, 미안해요. 이안이 낯을 많이 가린답니다.”
제리아의 인사치레에 크로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나이쯤 되는 아이들은 다 그렇다면서.
“머,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예에. 고맙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다시 돌아가시려면 힘드시겠어요.”
“이안.”
제리아가 잇새로 아들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기어코 무례한 말을 하려는 거니?
하지만 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의사가 그랬잖아요. 아버지는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손님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건강이 먼저라.”
돌아가라, 돌아가. 저택에서 떠나.
크로니는 마치 이안이 그리 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박또박 제 의견을 말하고 있긴 한데, 뭐랄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해야 하나. 고작 다섯 살 난 아이가 뭐 그리 깊은 속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애쓰는 것이 귀엽다.
“물론입니다. 하여 별관에서 지내다 이른 시일 내에 돌아갈 것입니다. 말들도 지쳤고, 마부도 새로 구해야 해서 말이지요.”
“크로니 경. 아이의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니요. 할아버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집니다. 참으로 기특하시군요.”
“그럼, 별관을 안내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부인은 해나에게 이안을 데려가라 눈짓했다. 해나가 재빨리 이안을 안아 들며 꾸벅 인사했다.
“이안 숙부. 또 봅시다.”
크로니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했지만,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해나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고서 인상을 찡그렸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해나가 이안의 등을 토닥였다.
“어찌 그리 날을 세우셔요. 도련님.”
“…이상해. 기분 나쁜 자야.”
“뭐, 인상이 좋은 편은 아닌데… 그래도 생긴 걸로 뭐라 하면 나중에 혼나십니다. 원해서 못생기게 태어난 것도 아니고요. 아, 그렇다고 해서 크로니 님이 못생겼다는 뜻은 아니고요.”
뭐래. 이안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잠깐 발버둥 쳤다. 이제 그만 내려 달라는 듯이.
해나가 조심스레 내려 주자, 이안은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서 그녀를 올려다봤다.
“있잖아, 해나.”
“예.”
“해나는 사람을 잘 보지?”
“…어떤 식으로요?”
“계속 지켜보는 거. 그리고 문고리도 잘 딴다 하던데?”
“누, 누가요? 아, 아닌데요?!”
해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경망스럽게 손을 저어 댔다. 하지만 이안은 꼼짝하지 않았다.
“해나가 크로니 경이랑 일행을 잘 좀 감시해 줘.”
“이안 님, 저 진짜 그런 사람 아닙니다?!”
“무서워. 기분이 안 좋고.”
아, 이거, 원! 해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자기는 이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닌데! 모시는 도련님이 저리도 풀 죽은 목소리로 부탁하는데, 어찌 거절한단 말인가?
해나가 뜸을 들이자, 이안이 덧붙였다.
“저번에 내 만년필 예쁘다고 했었지?”
“헉.”
“이번 일 잘 해 주면 ‘선물’로 줄게.”
혹여 어머니나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지 못하게끔 마음을 듬뿍 담아서.
해나는 발끝을 배배 비비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꼿꼿이 폈다.
“아이, 참. 손님들이 어느 방에서 묵는다고 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