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66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66화(866/935)
제866화.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꼬맹이 눈빛이 예사롭지 않던데요.”
일행 중 누군가 술을 따르며 웃었다. 방금 만나고 온 이안에 대한 말이었다.
크로니는 궐련을 꺼내 들며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마한 것이 눈을 똑바로 뜨고 말이지.
“눈매가 딱 제 어미를 닮았던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들은 침대와 소파, 책상 아래를 손으로 매만지며 도청 장치가 있는지 확인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그들은 마음 편히 소파에 앉아 술잔을 따랐다.
“오래 안 갈 것 같지요?”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지.”
째앵. 그들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며 자축했다.
영주가 죽으면 그다음은 정말이지 일도 아니다. 지방에서 유유자적 생활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 아니던가.
게다가 그 아들은 고작 다섯 살 난 아이이니, 부인을 처리하고 후견인으로 데려오면 모든 건 계획대로다.
‘아이가 죽으면 재산이 공중에 붕 뜨게 되지. 다음 상속자로 넘기는 것보다 다섯 살 난 아이를 데리고 노는 게 훨씬 쉬워.’
“크로니 경. 요즘 폐하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크로니가 고개를 들었다. 타고난 체질이 약골인지라, 그리 좋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나, 마른 나뭇가지처럼 누워 있는 하델을 보자니, 그만하면 또 괜찮은 것 같기도. 크로니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느 때와 같습니다. 다들 왜이리 아프신 것인지. 세상 귀한 것들을 앞에 두고 기력이 안 나시나 봅니다.”
크로니의 조롱에 일행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선대의 황제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후손이 이리도 나약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는 것 없이 숨만 쉬며 살고 있다는 걸.
“제국방위부 장관님은 잘 계시고요?”
“예. 세상이 평화로우니 따분해하십니다.”
“이런! 무서운 말씀을!”
똑똑.
그들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시종들이 음식을 준비해 안으로 들였다. 그중 한 명인 해나는 접시를 나르는 척하면서 연신 주위를 둘러봤다. 그들의 짐 가방이 어디 있는지, 잠금장치는 되어 있는지 등등.
크로니는 냅킨을 무릎 위에 펼치다가, 문득 해나에게 물었다.
“전담인가?”
“예?”
“이안 숙부의 전담 시종인지를 물었다.”
아까 이안을 데리고 있던 시종이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해나는 화들짝 놀라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예. 도련님과 관련된 일은 거의 제가 담당합니다.”
“숙부께서 나를 언짢아하시는 것 같던데.”
“…낯을 좀 가리셔서요.”
“나중에 이쪽으로 모시고 오거라. 앞으로 가까이 지내면 서로에게 좋을 것 같구나.”
부모가 죽고 나면 자신이 보호자가 될 것인데, 그리 날을 세워서 되겠는가? 크로니의 오만한 명령에 해나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충 대답하고서 문밖을 나왔다.
끼이익.
문이 닫히자마자, 해나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작게 투덜댔다.
“참 나, 누구보고 오라 마라 하는 건지, 원. 아무리 나이가 어리셔도 저택의 도련님인데 말이지. 족보상으로도 숙부시고.”
“얘도 참, 뭘 그리 열을 내니?”
“열 안 나게 생겼어?”
“그래도, 손님이시잖아. 도련님이 너무 어리기도 하고. 괜히 신경 쓰면 너만 골 아프다는 뜻이란다.”
우씨, 그걸 말이라고? 해나가 반박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뒤통수를 훅 스쳐 지나가는 서늘한 감각.
시종들은 아무렇지 않게 트롤리를 끌며 몸을 돌렸지만, 해나는 이상한 낌새에 꼼짝할 수 없었다.
‘저것들이 지금 왜 낯선 이방인의 편을 드는 거지?’
처음 보는 손님 아닌가?
해나는 문득 영주의 음독을 의심한다는 필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편으로는 ‘설마, 아니겠지’라며 막연히 부정했는데, 같이 일하는 자들의 태도가 너무 의아하지 않나.
“해나?”
“아, 갈게.”
해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들의 뒤를 따랐고, 이내 굳게 닫힌 손님방을 돌아봤다.
* * *
“나를?”
“예. 아주아주 건방진 분이십니다. 제국방위부 소속이라고 하던데, 나랏밥 먹는 분들은 원래 다 그런가요?”
해나가 주먹을 꽉 쥐며 부들댔다. 크로니가 이안에게 오라 마라 하는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아랫것 된 도리로 전달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초코케이크를 먹던 이안이 무언가 생각하듯 침묵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내가 그들과 대화하는 동안 해나가 방을 살펴보면 되겠어. 수상한 물품이 없는지 꼭 찾아봐.”
“저 없이 괜찮으시겠어요?”
“무슨 말이람. 당연히 괜찮지.”
이안은 야무진 손길로 케이크 남은 것을 잘라 먹으며 물었다.
“지금은 어디 있어?”
“침실에서 조식을 들고 있습니다. 어제 과음을 심하게 했나 봐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잘 되었네. 가자.”
“진짜로 가시게요? 도련님이 응접실로 부르시지 않고요.”
“어른께 그런 무례를 보였다가는 어머니께서 난감해하신다.”
해나는 성큼성큼 용감하게 걸어가는 이안을 가만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무슨 생각인지 도통 모르겠다.
저벅저벅.
이안은 손님방 문앞에 섰다. 그다음 잠시 주먹을 쥐었다 피었다. 꼼지락, 긴장을 풀기 위한 행동이다.
똑똑.
“실례합니다. 이안입니다.”
“오, 세상에. 들어오십시오.”
문을 열자 포도주 냄새가 훅 끼쳤다. 어제 아주 진탕 마신 게 분명했다.
그들은 초췌한 낯으로 아침 식사 중이었는데, 사실 시간으로 따지면 점심 식사에 가까웠다. 하나같이 이안이 진짜 올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숙부.”
“안녕히들 주무셨습니까? 침대는 편하셨고요?”
“예, 덕분에요. 토지가 비옥해서 그런지 포도주 맛이 아주 좋더군요. 클리포포드산보다 훨씬 고급이었습니다. 아, 숙부께서는 아직 아시면 안 되는 맛이지만요.”
이안이 싱긋 웃자, 크로니가 멈칫했다. 이것 보아라? 어제만 하더라도 낯을 제대로 가리며 경계하더니, 이제는 웃네? 조그만 것이 무슨 생각일까? 그는 빵을 찍어 먹으며 물었다.
“이안 숙부께서는 식사하셨습니까?”
“예. 저는 디저트까지 먹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모두 중앙에서 오신 분들이시지요?”
“그렇습니다.”
“크로니 님을 비롯하여 몇몇 분은 황궁에서 근무하신다고요.”
“맞습니다. 저는 제국방위부에서, 이자는 법무부에서 일하고 있지요.”
이안은 대단하다는 듯 손바닥을 짝 부딪쳤다.
“황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고 하던데요.”
“과찬이십니다.”
진짜 과찬이었다. 현 황제 말고 그 이전이라면 또 몰라도.
“혹시 오늘 일정이 따로 없으시면 제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을까요? 중앙에서 귀한 손님이 오는 경우가 잘 없는지라, 꼭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학식 토론을 말하는 것이었다.
크로니는 일행들을 가볍게 둘러봤다. 일정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한들 다섯 살짜리 아이를 앉혀 두고 떠들 만큼 한가한 것도 아니었다. 영지 곳곳을 순찰할 예정이었기에.
“아쉽지만-”
“저는 지금 신자연주의 철학 입문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하여 최근에 일어난 중앙의 ‘신전 이전에 대한 문제와 논의’를 배우고 있습니다. 가정교사가 딱 한 명인지라 많은 사람의 의견을 직접 듣는 것이 제 소원이랍니다.”
이안이 덧붙이자 일행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어린것이 무슨 철학 입문서를 읽는단 말인가?
그리고 사회문제에 대해 논하는 것도 한참이나 이르다. 어디서 뭘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영특해 보이고 싶은 치기 어린 혈기라 받아들인 것이다.
크로니 역시 시험하듯 물었다.
“철학 입문서는 어디까지 읽으셨습니까?”
“자에르, 돌빈, 하프카네입니다.”
“……!”
“신전 이전에 관해서는 반대합니다. 카르보 신전은 수천 년간 그 자리에 있었고, 황실과 인연이 깊은 신성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인근에 희귀 광물이 발견되었다 한들, 돈으로는 역사적 가치를 살 수 없습니다.”
침묵이 깃들었다. 누군가는 툭 하고 빵을 떨어트렸고, 누군가는 잘못 들었다는 듯 눈만 깜빡였다. 저게 다섯 살이라고?
“……출생신고가 잘못되었나?”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크흠. 실언입니다.”
이안의 되물음에 사내가 손을 내저었다. 분위기가 넘어온 것을 알아챈 이안이 덧붙였다.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손님’들에게 감사하겠지요.”
병문안을 빙자했지만, 어쨌거나 저택에서 기거하는 객이지 않습니까? 주인이 저리 누워 있는데, 클리포포드보다 맛있는 술을 잔뜩 먹고 놀기만 할 겁니까? 어린 도련님과 어울리며 보답을 해야지요? 이안의 총명한 눈빛이 그리 이르는 것 같았다.
결국, 일행 중 누군가가 일렀다.
“그,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 뭐, 일정이 급한 것은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밑층에 응접실이 따로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시면 모두 그리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안이 빙긋 웃으며 문을 닫고 나가자, 여기저기서 황당한 탄식이 터졌다.
“하하! 보았습니까? 하델 님께서는 어찌 저리 영특한 아들을 두셨을까요?”
“와, 나는 술이 덜 깬 줄 알았습니다.”
“그러게요. 저도요. 우리 아들은 다섯 살 때 덧셈 뺄셈도 겨우 했는데.”
“크로니 경. 놀랍지요? 잘만 키우면 정말-”
다들 놀라서 떠들어 대다 멈칫거렸다. 닫힌 문을 바라보는 크로니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잘만 키우면, 뭐요?”
“아, 그게-”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운 맛이 있어야지요.”
왜 살려 두는데? 부모를 대신해 이리저리 잘 구워 먹기 위해 살려 두는 것 아닌가? 한데 이리 비정상적으로 영특하면 좋지 않다. 아니, 오히려 조금 곤란한 참이다.
크로니는 남은 식사를 천천히 마무리하는 동안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는 그 자리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
한편,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이안이 화들짝 놀라서 멈췄다. 해나가 놀라서 다가왔고, 이내 벌게진 아이의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프세요?”
“하아. 이런.”
“볼! 볼이 훅 붉어지시잖아요. 의사를 데려올까요?”
“…실수했다.”
“예?”
이안은 창피하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아이의 볼이 사과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하프카네가 아니라 하카프네였어.”
“무, 무슨 말씀이신지?”
“…자에르, 돌빈, 하카프네.”
“예?”
다시 들어도 모르겠다. 해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에 이안은 되었다는 듯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다과를 준비해. 식사를 마치면 곧 내려올 거니까.”
“아, 예예!”
해나는 계단 밑을 쳐다보며 이안을 급히 불렀다.
“저기, 이안 님!”
“응?”
“그, 조심하십시오.”
이안의 뒤에서 크로니를 본 해나였다. 이안은 긴장해서 눈치채지 못한 듯싶지만, 아이를 살피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제 느꼈던 섬찟한 감각.
“저택에 배신자가 여럿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무슨 엉뚱한 말을 하느냐는 듯이.
“당연하잖아.”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였어. 너무도 많은 사람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는데, 그걸 속이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건 한두 명의 소행이 아니라는 거지. 해나도 조심해. 내가 저들을 잡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눈이 보고 있을지 모르니까.”
타앗!
이안은 그리 말하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해나는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이안이 했던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긴장이 조금씩 완화되는 게 느껴졌다.
“…네. 도련님. 조심하겠습니다.”
실력 발휘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