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68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68화(868/935)
제868화. 막을 수 없는
“…하실 말씀이란 게?”
사내는 문을 탁 닫고서 집사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 가까이 다가와 널브러진 옷가지 등을 살폈다.
역시 크로니의 말대로 침실에 쥐새끼가 들었다. 그는 테이블 몸을 기대고서 궐련을 꺼냈다.
“대답부터 먼저.”
“예?”
“여기서 뭐 하고 있었나?”
“아, 그, 그게-”
집사가 당황하며 말끝을 흐리자, 해나는 귀를 더욱 쫑긋거렸다.
그녀 역시도 궁금하던 차다. 대체 뭘 찾으려고 온 것일까? 자신은 저택 내의 배신자를 찾기 위해서지만, 집사는 무엇이 필요해서?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 원.”
하지만 사내는 대충 짐작 간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탔다고. 괜히 의심해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하지 마. 너나 우리나 같이 죽고 사는 사이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뭐, 이해는 해. 오랫동안 모신 주인이잖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던걸? 부인께서도 눈치를 챈 것 같고.”
“마, 마님께서 눈치를 채셨다니요?”
해나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그러니까 지금 집사는 크로니 일행과 모종의 거래를 통해 배신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상황. 집사가 대비책으로 무언가를 찾으려 한 것이다. 그 말인즉, 이 방에 저들의 약점으로 쓸 만한 게 있다.
‘근데 마님이 눈치를 채다니? 이안 님이 벌써 말씀하셨나? 그럴 리 없는데.’
“그래서 계획을 좀 수정하려고 해.”
“어디까지 눈치를 채셨단 말입니까?”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지.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해나의 눈이 커졌다. 저 자식들이 지금 무슨 말을 입에 담고 있는 거람?
“집사, 오늘 밤 영주가 죽었으면 한다. 속전속결로 처리하자고. 사용인에게 말해서 기회를 엿봐. 자정이 가기 전에 말이지.”
집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고, 이내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크로니였다. 위층에 올라갔던 자가 내려오질 않으니 무슨 일인가 해서 보러 온 것이다.
자꾸만 사람들이 많아지는 탓에 해나는 더욱 숨 죽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대화 중인가?”
“아닙니다. 끝났습니다. 그럼.”
집사가 허둥지둥 나갔고, 크로니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문이 닫히자 그는 엉망이 된 침실을 둘러봤다.
“한바탕했나 보군.”
“편지를 찾으러 온 것 같습니다.”
“멍청하기는.”
크로니는 편지 뭉텅이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하잖은 집사 놈이 결국에는 손을 대고 만 게다. 고작 그런 게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 생각하나? 그는 혀를 끌끌 차며 사내에게 지시했다.
“부인은 집사에게 시켜 정리하지.”
“예, 알겠습니다. 좀 시끄럽겠군요.”
사내가 급히 떠났다. 그러나 크로니는 한참이 지나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해나도 어서 나가 이 사실을 전해야 하는데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그는 테이블에 앉아 궐련만 뻑뻑 피워 댔다.
“…….”
해나는 혹여 숨소리가 들릴까, 계속 입을 틀어막은 채 기척을 죽였다. 그럴수록 심장은 콩닥콩닥 날뛰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들키면 죽음이었으므로.
* * *
“어머니! 어머니!”
이안이 급히 내달리며 부인을 찾자 시종장이 놀라서 아이를 붙잡았다.
“도련님. 이리 뛰어다니시면 안 됩니다. 해나는 어딜 가고 혼자세요?”
“이거 놓아 봐. 어머니를 뵈어야겠다.”
“지금 마을 소작농 관리인을 만나러 나가셨습니다. 기다리십시오.”
“급한 일이래도!”
“안 됩니다.”
이안이 발버둥 치며 떼쓰자, 시종장은 단호하게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제아무리 힘을 써도 이겨 낼 수 없는 완력이었다. 그러자 이안은 방법을 바꿔 시종장의 어깨를 퍽퍽 쳐 댔다. 단풍 같이 작은 손인지라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진정하십시오, 도련님. 해나 이것을 아주 혼내든지 해야지. 도련님 모시라고 했더니 혼자 두고 어딜 갔답니까?”
“내가 심부름을 시킨 게 있다!”
“심부름이요?”
그때였다. 이안은 멀리서 지나가는 필리아를 보고서 소리쳤다.
“필리아!”
갑작스러운 부름에 필리아가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이안이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에게 손을 뻗고 있는 것 아닌가. 제발 좀 도와달라는 듯이, 애처롭게.
필리아는 반사적으로 달려와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
“아이고, 선생. 괜찮습니다. 도련님이 오늘따라 투정이 심하셔서 그래요.”
“필리아, 필리아…….”
“자! 어서 갑시다!”
“잠깐만요!”
필리아가 시종장의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뭐가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아이를 보냈다가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제가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선생께서요? 바쁘신 분이?”
“시종장님보다 더할까요. 안 그래도 쉬려던 참이었으니, 괜찮습니다. 이리 주셔요.”
이때다 싶어 이안도 온몸을 비틀며 시종장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나 이것 참. 별수 없구나.
그녀는 필리아에게 아이를 넘겨주고는 괜히 서운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봤던 분이 어찌 이러실까? 그녀는 괜히 툴툴대며 필리아에게 당부했다.
“그럼, 부탁 좀 드립니다.”
“예예. 걱정하지 마셔요.”
이안이 필리아의 품에 확 안겨 고개를 파묻었다.
시종장이 사라진 뒤, 필리아는 한숨과 함께 아이를 내려놓았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다.
“이안 님. 울지 마세요.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를 해치려는 자들, 분명 어머니도 해칠 거다. 어머니에게 그 말을 전하고 싶은데 만날 수가 없어.”
“아. 영주님 일을 대신하시느라 바쁘신 듯합니다.”
“알려 주고 싶은데…….”
“이안 님. 저 보십시오.”
필리아가 아이의 볼을 두 손으로 붙잡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안 님이 아시는 걸, 부인께서 모르실까요?”
뜻밖의 질문에 이안이 멈칫거렸다.
아이에게는 아버지지만, 부인에게는 남편이다. 필리아의 말처럼, 어쩌면 어머니는 이안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볼까요? 부인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제가 곁을 지키겠습니다.”
젖은 이안의 눈동자가 작게 반짝였다. 하늘을 그대로 담은 것과 같이 맑고 투명한 시선. 이안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네?”
“해나가 손님방에 들어갔어.”
속닥속닥. 이안의 고백에 필리아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를 낮추는 것을 보아 몰래 들어간 것 같은데?
“뭔가를 찾았다면 내게 알려 줄 것인데, 소식이 없으니 걱정돼.”
“손님방이면… 별관인가요?”
“응. 막 학식 토론을 하다 화장실 간다 하고 이리 온 것이거든. 돌아가긴 해야 하는데 가서 상황 좀 같이 봐 주면 안 되겠나?”
“안 될 것 없지요.”
필리아가 이안의 손을 붙잡고 별관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서재는 텅 비어 있었다. 기다리다 지쳐 떠난 것인지, 아니면 이때다 싶어 흩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안은 계단을 뛰어 올라갔고, 이내 꽉 닫힌 손님방 문을 노려봤다.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해나가 방에 숨어 있는 걸까? 그래서 못 나오는 건가?’
똑똑.
이안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자, 크로니가 얼굴을 보였다. 작게 열린 틈으로 안쪽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시야가 한정적이었다.
“숙부. 미안합니다. 다들 일이 생겨서요.”
“아, 저기-”
“학식 토론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을 기대하겠습니다. 저는 몸이 안 좋아서 좀 쉬려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방해하고 썩 물러가려무나. 어린애 상대할 시간 따위 없단다. 크로니는 그렇게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 노골적인 거절에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내 꼭 닫히는 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안 님.”
필리아가 아이에게 속삭였다.
“이만 물러나심이 좋겠습니다. 계속 시도했다간 의심을 살 수도 있어요. 혹 해나가 정말 안에 있는 거라면, 도리어 위험해질 수도 있고요.”
나중을 기약하자.
필리아의 제안에 이안이 동의했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은 물러서는 게 좋았다. 혹 해나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정말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안은 괜찮다. 그는 저택 주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고, 귀족이며, 어쨌거나 어린아이니까.
한데, 해나는?
‘집에서 쫓겨나는 건 물론이고, 경비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모진 일을 당할 수도 있어.’
이안은 슬쩍 뒷걸음질 쳐 별관을 빠져나왔다. 해나가 무엇을 찾았는지 궁금하지만, 그걸 알게 되는 때가 분명 올 것이다.
이안은 웃으며 필리아를 올려다봤다.
“필리아. 내 방 구경하지 않겠나?”
“그럴까요? 기대되는걸요, 도련님.”
끼이익.
이안은 필리아를 자신의 방에 초대했다. 깔끔하고, 아기자기하며, 어디선가 푸릇푸릇한 풀 내음이 나는 방이다.
“원래라면 이 시간에 무엇을 하십니까?”
“책을 읽다가 낮잠을 잔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읽어 드릴까요?”
“좋네.”
이안은 생각했다. 어머니가 외출에서 돌아오시면 시종장이 제 말을 전할 것이다. 그러면 분명히 연락을 하시겠지. 아니면 찾아오시든가.
이안은 담요를 품에 끌어안으며 편히 누웠고, 필리아는 그 머리맡에 앉았다.
“뭘 읽어 드릴까요?”
“<카르보 신전의 전설> 읽어 줘. 요즘 중앙에서 카르보 신전 때문에 시끄럽다지?”
“어, 예. 맞습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가정교사가 주에 한 번씩 토론거리를 가져다준다네.”
“훌륭하십니다. 그럼 읽겠습니다. 편히 눈 감으세요.”
필리아는 아이의 가슴을 토닥이며 동화책을 읽었다. 나긋나긋하고 따뜻하여 마음속 깊이 안정되는 느낌. 그 안온한 감각 속에서 이안은 천천히 부유했다.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다.
‘…어머니.’
그러다 문득 떠오른 어머니의 상. 이안은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멈추었다.
‘……?’
어머니를 떠올렸는데, 어째서 필리아의 얼굴이 그려지는 걸까. 지금 옆에서 다정히 자리를 지켜 주고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당장 답을 찾기엔 온몸이 너무나 나른했다. 이안은 까무룩 잠들었다. 창 너머, 해가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쿵쿵! 쿵!
얼마나 지났을까?
이안은 낯선 소리에 눈을 반짝 떴다.
“……?”
필리아도 없고, 해나도 없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발소리. 이안은 무언가 불길한 느낌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단단히 잡아야 합니다! 피가 통하면 안 돼요!”
“주, 주인님! 제발 정신 좀 차려 보십시오!”
“뭐 해! 정신 안 차려?!”
“따뜻한 물이랑 깨끗한 천입니다!”
“피 묻은 이불을 걷어 가라! 그리고, 그리고 어서 마님께 연락을-!”
어수선했다. 시종들은 더러워진 이불을 짊어진 채 달려갔고, 캘리 선생과 그 제자들까지 더하여 바삐 침실을 오갔다. 거기엔 필리아도 있었다.
놀라서 멍하니 서 있던 이안은 한 시종의 어깨에 부딪혔다.
“아! 이안 님!”
이안이라는 이름에 모두가 일순 동작을 멈췄다. 이불이 헤쳐진 침대 위, 영주는 힘없이 널브러져 피를 쭉쭉 토해 내고 있었다. 사람의 형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몰골로.
충격받은 이안이 그대로 굳어 버리자, 누군가 아이의 눈을 가리며 잡아끌었다.
“아-!”
“보시면 안 됩니다!”
“아, 아버지, 아버지!”
“이안 님, 이쪽으로 오셔요!”
“놔라! 놓으란 말이다! 아버지!”
이안이 울부짖으며 달려들었지만, 시종들이 가로막았다. 필리아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캘리의 지시대로 지혈에 힘썼다. 비릿하고 끔찍한 혈향이 저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이고, 이런.”
그때였다. 누군가 이안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무슨 소란인가 해서 왔더니, 쯧쯧.”
크로니였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평온한 표정. 이안의 낯빛이 굳어지며 점차 일그러졌다.
크로니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가볍게 안아 들고서 시종에게 물었다.
“부인께서는? 아직 저택에 안 들어오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