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7
제87화. 처분을 기다리다
이안은 로만드로와 함께 포트로가의 중심지인 은행을 찾았다. 몰린이 일행과 함께 묵었던 관사 근처였으며, 필리아와 공원에서 접선했던 그 동네였다.
이안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은행장이 허리를 깍듯하게 숙였다.
“이안 자작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봅니다. 잘 지내셨죠?”
“메렐로프 백작님과 굴라 거래가 있었다는 말을 전해 듣긴 했습니다만, 한데 이것이 다 금화인가요?”
은행장은 외눈 안경을 슬쩍 들어 올리며 당황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어디 짐짝 옮기는 것도 아니고, 커다란 궤짝에 나뉘어 들어있는 게 다소 우악스러워 보이긴 했다.
“음, 그렇습니다. 금화 1,000닢입니다.”
“수표로 주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그러게 말일세. 돈 좀 만진다는 분이 매너가 이렇게 없어서야 원. 쯧쯧.”
로만드로가 대신 꿍얼거리며 혀를 차댔다. 금화증서 세 장이면 이리 힘들게 오갈 필요도 없을 것인데 말이다.
이안은 하인들과 함께 은행 안으로 들어섰다. 반듯한 ‘하이만 뱅크’ 간판에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중앙과 데르가의 전투가 발발했을 때, 피난처로 삼은 영지민들이 낸 상처였다.
“지낼 만은 하시고요.”
“그럼요. 자작님 덕분에 문제없습니다.”
철컥.
은행장의 뒤로 검은 갑옷을 입은 경비들이 다가왔다. 하이만 뱅크의 상징이자 보안을 책임지는 검은 갑옷들. 사실상 경비의 실력보다도 마력석을 때려 만든 저 갑옷이 살상 무기라 볼 수 있었다.
“옮기면 됩니까?”
“그래. 부탁하지.”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네 궤짝, 한 상자당 250개의 금화가 들어있었기에 성인 남자 둘이 붙어서 겨우 옮기던 것이다. 하지만 갑옷을 입은 경비는 왼쪽 오른쪽 무리 없이 두 개를 동시에 들어 올렸다.
“……!?”
반응이 제일 기가 막힌 것은 베릭. 순식간에 딱 얼어붙어서는 눈만 데굴데굴 굴려댔다. 저게 대체 무슨 힘이냐는 듯. 아마 천려족도 저 정도는 아닐 터다.
“뭐, 뭔데?”
“아, 베릭은 처음 보는가?”
이안 대신 로만드로가 설명을 붙였다.
“마력석으로 만든 갑옷이다. 중앙에는 하이만 뱅크의 본점도 있고, 지원 시 나가는 시간도 짧지만… 이런 변경에서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바리엘의 금융계를 독점하고 있는 자들만 할 수 있는 일종의 재력 과시였다. 저거 한 세트만 해도…….
“그래서 그랬구나.”
“뭐가?”
“브라츠에서 포트로가 치안이 제일 좋긴 했지만, 그래도 도둑놈들이 은행 쪽으로는 오줌도 안 싸더라고.”
사람 머리통을 그대로 박살 낼 수 있게 하는 힘. 그뿐만 아니나 화재에도 견고하며 물리적인 충격, 심지어는 하급 마법에도 내성이 있었다.
“베릭. 혹여 누군가 은행에 위해를 가했더라면, 여기 경비들이 움직이기 전에 데르가가 그놈을 죽였을 것이다. 또 혹여, 중앙군과 데르가가가 싸우던 중 제삼자에 의해 은행이 위협당했다면, 둘은 잠시 전투를 멈추고 합심하여 여기부터 사수했을 터다.”
“뭐, 여기 은행장이 황제 할아버지라도 되냐?”
“바리엘에서 신전처럼 성역 대우를 받는 곳이니까.”
바리엘 안, 제3의 영역이었다. 혹여 실수를 저질러 거래가 거절된다면 막대한 재화를 옮기거나 관리하는 일을 직접 해야 했고, 이는 경제활동 중심 세력에게 배제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건 귀족이나 상인들의 경우지만 말이다.
“그럼 그 난리 났을 때 진짜 누가 은행 털어줬다면, 덜 싸웠겠네.”
베릭이 거침없이 말하자 경비들이 멈칫거렸으나, 이내 의도가 불손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다시금 궤짝을 옮겼다.
“목숨 내놓고 그런 일할 만한 자가 어디 있겠어?”
“게다가 대피 장소로 쓰여서 문 앞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지요. 털려고 마음먹는 순간 반대로 먼저 털렸을 겁니다.”
은행장이 유쾌하게 넘기며 그들 앞으로 차를 내왔다. 소파와 테이블은 낡았지만, 열심히 관리한 태가 났다. 브라츠 자체가 변경이다 보니, 중앙의 은행과 비교하면 진짜 시골 주점 수준이긴 하다만.
“총 다해서 금화 1,000닢이라고 하셨죠?”
“그렇네.”
“잠시 수를 셀 시간이 필요합니다. 앉아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로만드로는 차를 홀짝이며 은행을 슥 둘러봤다.
“금화 3,500닢 정도의 수익을 냈으니, 헌납금의 일부는 충당한 셈이네. 세금은 평년보다 더 걷힐 테지만 수가 미비할 터, 음. 전체적으로 당장 무리는 없네만 당장 내년이 문제군.”
문제는 돈 나갈 곳이 앞으로 천지라는 것이다.
우선 신년회를 위해 수도로 올라가면 출발하는 순간부터가 돈이었고, 위에서 만나는 중앙 귀족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품위 유지비가 또 나갈 것이다.
“마력운용자에서 마법사가 되기 전에는 최소 생활비만 보장되는 건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지.”
“하하하. 신혼이시라면서요.”
“같은 방에서 잘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당장 올라가기 전에 헌납금의 4할 가량을 마련하지 않았습니까. 다 잘 될 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안과 로만드로가 얘기하는 사이, 베릭은 다과를 와구와구 먹어대기만 했다. 돈 걱정 따위는 제 일 아니라는 태도가 여실했다.
“아무래도 증세가 제일 쉽고 편한 방법이긴 한데.”
“저한테는 쉽고 편하겠지만, 영지민들에게는 그것만큼 힘든 일이 없습니다. 이미 굴라를 배급하면서 내년 세율을 조금씩 올렸습니다.”
“기왕 한 김에 더 십시일반 모으면 되지 않나. 기간을 길게 주면 그에 따라 저들도 대책을 마련할 걸세. 당장 내일까지 내놓으라는 것도 아닌데.”
쫑알쫑알 조언하던 로만드로가 이안의 표정을 살피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자네, 듣고 있질 않는구먼.”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까지 맞장구쳤는데요.”
“아니아니, 그러니까, 증세할 생각이 없어.”
이안은 방긋 웃기만 했다.
확실히 그것에 제일 쉽고 확실한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전투의 폐해를 수습하였고, 굴라로 막 겨울 준비가 끝난 참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황궁에 가기만 한다면, 이안의 계획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굳이 부담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다.’
“제가 영지를 오래 비울 거란 건 로만드로 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겨울을 앞두고 당장 죽네 마네 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어 그렇지, 봄이 오면 그들도 이런저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 겁니다.”
천민 출신 가주가 작위를 받고서 내려오지도 않고, 세금만 올려 받는다고 말이다.
신께서 보고 있음에도 죄를 저지르는 인간들이다. 하물며 저 멀리 있는 영주라면… 저택의 사용인들이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로만드로 님의 걱정은 제가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씀임을 알지만, 저의 고집이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이안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로만드로는 체념하며 차를 홀짝였다. 금화 수량 확인 작업이 계속되는 동안, 이안은 문득 생각나서 베릭을 돌아봤다.
“베릭. 메렐로프 백작에게 동생이 하나 있는데, 영지의 어느 고저택에서 칩거하고 있다 하더구나.”
“그런데?”
“자세히 좀 알아 오라는 뜻이지.”
“으에에엑.”
또 일이라니. 베릭은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 굴라만 와작와작 씹어댔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되게 열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게으른 성격이.
드르륵.
“이안 님. 정리는 다 되었는데요, 위조 금화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증서를 먼저 쓰시겠습니까?”
그때, 안쪽에서 금화를 세던 은행장이 다시 나타났다. 마력수로 위조 확인을 하다 나온 것인지, 젖은 손을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그러지. 문제는 없나?”
“네. 없습니다. 금화 1,000닢이라니, 저도 실로 오랜만에 작업해 봅니다. 수거반이 올 때까지 금고가 가득 차겠어요.”
“증서는?”
“여기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가죽 케이스에 담긴 서류. 이안은 소파에 앉아 가볍게 펜을 놀렸고, 이내 그의 이름으로 금화를 안치했다.
‘…은행 업무를 본 적이 있나?’
로만드로와 은행장이 동시에 의문을 가졌지만, 이내 서로 눈이 마주치는 것으로 해소했다. 어련히 서로 알려줬을까 싶어서.
“네.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할 말이지. 수고가 많네. 사흘 이내로 메렐로프 백작님이 금화 2,500닢을 추가로 넘길 걸세. 미리 수표 작업을 해두면 좋겠군.”
“아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참! 여기 안내문입니다. 겨울철이라 수송단 길목이 막히는 경우가 많아서요. 특히 당분간 카렌나, 론긴, 자일쿠프 지점은 이용이 불가합니다. 카렌나는 치안이 너무 안 좋아서 도적끼리 서로 터는 경우도 허다하답니다.”
“갈 일이 있나 모르겠어. 아무튼 고맙네.”
“네. 감사합니다.”
이안의 말에 지점장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모든 업무가 무사히 완료되었다는 의미다. 이안은 가벼운 손으로 저택에 돌아왔다. 확실히 자루 100개가 예삿일은 아닌지, 아직까지도 다들 일이 한창이었다.
“이안 님, 다녀오셨습니까?”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지?”
사용인이 땀을 닦아내며 뒤쪽, 메렐로프 일행들을 힐끔거렸다.
“서른 자루는 미리 싸둔 게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아 글쎄 죄다 뒤집어서 상태를 보고 가져간다지 뭡니까.”
하나하나 선별하는 게 까탈스러워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부하들 사이를 헤치며 하나하나 간섭하는 메렐로프 백작의 뒷모습을 보곤 고개를 내저었다.
“고생 좀 하시게.”
“네. 그래도 저녁 먹기 전에는 끝날 것 같습니다.”
“알겠네. 나도 정리 후 다시 내려오지.”
이안은 저택 안으로 들어서며 로만드로에게 제안을 하나 내놓았다. 해나가 말했던 볶은 굴라에 관한 일이었다.
“메렐로프 백작이 굴라를 오늘 심는다 해도 한 달 동안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렇겠지?”
“저희 말입니다, 메렐로프에 굴라 매매를 허용할까 합니다. 초반에는 볶은 굴라만 팔았다가, 메렐로프에서 수확 시기에 다다르면 생굴라도 파는 게 좋겠습니다.”
당장은 메렐로프 저택에서도 굴라가 나오지 않으니, 식용을 원하는 영지민들은 이쪽에서 굴라를 사 먹을 수밖에 없었다. 백작은 이안이 했던 것처럼 굴라 씨앗을 나눠주며 내년 세율을 걷어 올릴 생각이겠지만…….
“백작, 혈압 올라서 죽겠는데?”
하지만 그때 이안 역시 생굴라를 팔게 되면, 영지민들이 세율을 올리며 배급받을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그 전에 리엔 부인이 손 쓸 거라 괜찮습니다.”
이안의 대꾸에 로만드로가 어설프게 웃었다. 이게 웃어야 할 일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것이다.
“메렐로프 백작이 영지를 떠나자마자 영지민들에게 알리세요. 곧 볶은 굴라에 관해서는 거래 제한을 풀 것이라고.”
“알겠네. 그렇게 하지.”
“그리고 말입니다.”
이안은 문득 집무실로 올라가려다가 멈칫거렸다.
“몰린 경을 어떻게 하라는 연락이 아직 없습니까?”
작위 임명 소식을 받은 지 꽤 되었다. 분명 마리브 황자가 뜻하는 바가 있다면 진즉 전서구로 서신이 날아왔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들의 처분에 관해서는 들리는 바가 없었다.
“나도 일전에 다시 확인해 봤는데, 일단 기다리라는 말만 내려오더라고. 아무래도 일이 좀 바쁘신 것 같네.”
일이 이상하게 꼬인 것은 아니고? 이안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만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