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70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70화(870/935)
제870화. 첫 번째 안배
“안되셨지, 정말.”
영지민들이 눈물을 훔치며 저택 쪽을 올려다봤다. 농사로 한창 바쁠 때였지만, 그들은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서 그들의 영주 내외를 추모했다.
영주는 오랫동안 앓아 고생했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었지만, 부인의 일은 정말이지 의외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걸 뜻하는 것이리라.
“영주님 잃은 상심에 목을 매셨다지? 마음은 이해하지만, 하나 남은 도련님은 어찌 사시라고.”
“쉿. 그 말은 하지 말게.”
“왜? 내가 모르는 일이 뭐 있나?”
“장례식 기간인데 조문객이 거의 없잖아.”
“그러고 보니…….”
영주 내외가 한날에 죽은 비극이었다. 중앙에서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황궁이나 다른 친인척들의 조문이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 하지만 놀랍게도 영지를 찾는 손님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부인이 죽을 때 집사도 같이 죽은 거, 모르나?”
“누구는 부인께서 영주님을 죽였고, 그걸 눈치챈 집사가 이를 알리려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라 하던데.”
“에이, 설마.”
“하지만 그렇잖아. 평소에 부인이 영주님과 그리 애틋했던 것도 아닌데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으니 말이지. 죽음으로 숨길 수밖에 없는 뭔가가 있다고.”
“억측일세. 괜히 헛소문에 가담했다가 경치지 말고 입 다무시게.”
“친인척 아무도 조문 오지 않는 것도 그 증거지 않겠어?”
“어어? 진짜 그만하라니까?”
“헉! 저기 도련님.”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이안을 발견하곤 멈칫거렸다. 그들은 어색하게 추모한다는 뜻으로 가슴에 손을 올렸고, 이안은 무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다 고개 돌렸다.
끼이익.
저택 안, 시신이 안치된 관 옆으로 백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장식되어 있다. 이안은 검은색 정복을 차려입은 크로니와 그 일행들을 쳐다봤다.
‘검은 정복은 어찌 알고 챙겼을까.’
마치 장례식이 있으리란 걸 예상했다는 듯이.
이안을 발견한 크로니가 이쪽으로 오라며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숙부. 앉으십시오.”
이안 뒤에 서 있던 해나가 자신도 모르게 제 치맛자락을 꽈악 붙들었다. 주인 내외께서 이리된 것은 모두 크로니와 그 작당들의 짓이다. 침실에서 기절한 이안 님을 데리고 나왔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저들이 알기나 할까? 지금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조르고 싶은 마음이다. 어찌,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스윽.
하지만 이안은 순순히 크로니의 부름에 응하여 가까이 다가갔다. 뜻밖의 반응에 크로니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숙부. 마음이 힘들겠지만 다잡으십시오.”
“예, 크로니 경.”
“혹, 친인척들이 왜 안 오는지 아십니까?”
크로니의 질문에 이안이 고개를 살짝 들어 쳐다봤다. 당연한 것 아닌가? 네놈들이 수를 써 둔 것이겠지. 아예 부고를 알리지 않았거나, 영지민들이 떠들어 대는 것처럼 어머니에게 모욕적인 혐의를 씌워 친인척들이 추모를 거부하게 하거나.
최악의 경우, 친인척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한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이안에게는 안 좋은 일이다.
“모르겠습니다. 다들 사정이 있는 것 아닐까요?”
하여, 이안은 그저 모른 척 우물거렸다. 어머니의 당부를 계속 마음에 새기는 중이었다. 살아남으라고, 나중에 자신의 곁에 지켜 줄 사람이 생길 때까지는 숨죽이고 살아남으라던 어머니의 유언을.
크로니가 눈썹을 까딱거리자, 이안이 덧붙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리 오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크로니와 일행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이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가늠하는 눈치다. 이내 크로니는 이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장례식이 끝나면 다시 연락해 보겠습니다. 비록 제가 영내 사정에 밝다지만 그래도 외부인인지라 장례식 준비에 부족한 점이 많아요. 숙부께서는 부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저를 대신해서 일을 봐주시니 감사한 일이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안은 울컥 치솟는 무언의 감정을 꾹꾹 눌러 가며 인사했다. 현재 저택에는 아무도 없다. 집사마저 죽어 버린 터라 일을 봐줄 만한 자는 시종장이 유일했는데, 그녀는 저택의 청소나 잡일에만 능통할 뿐 귀족의 장례식 절차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다섯 살 난 자신이 주관할 수도 없으니, 장례식의 모든 부분은 조카이자 연장자인 크로니의 몫이다.
“물론입니다, 숙부. 두 분 가시는 길,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크로니는 인자한 투로 그리 이르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말씀드리는데요, 저택은 정리하시고 아예 저와 함께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예?”
이안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사용인들이 있다지만 숙부를 보호자도 없이 이리 혼자 둔다고 하니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현실적으로도 여의치 않고요.”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다는 말은-”
“영지와 저택을 상속받는 과정에서 처리할 일이 많습니다. 여기저기 참견도 많을 것이고요. 그러니 이참에 저와 함께 중앙에 가 지내는 게 어떨까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래, 이자의 목적은 애초에 자신의 후견인이 되는 것이니 같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마 몰랐더라면, 그러니까 크로니가 부모님을 죽인 걸 몰랐더라면, 자신은 기꺼이 그와의 새로운 시작을 반겼을지도 모르겠다.
“…아.”
크로니가 이안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는 일종의 시험이다. 이안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한들 자신에게 복종할 마음이 있는지, 있다면 살려 두어도 될지 아니면 죽여야 할지 결정하는 시험.
“예,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요.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이안은 목소리를 겨우 쥐어 짜내며 그리 대답했다. 이어서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크로니의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듣기에 별로 이상하지 않았는지, 크로니는 만족스럽게 이안의 뒤통수를 쓰다듬었고, 잘 부탁한다는 듯 눈매를 시원하게 휘었다. 일행들 역시 이제 되었다는 미소를 주고받았다.
“저기, 크로니 님.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오, 그래. 금방 가지. 이안 님. 잠시.”
시종의 부름에 크로니와 일행들이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이안은 덜덜 떨리는 손을 붙들며 몸을 움츠렸다. 정신 바짝 차리자, 여기서 저놈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 돼. 그랬다간 죽을 거다.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그때, 누군가 이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안 님.”
필리아였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이안을 보듬었다.
“아, 필리아.”
“괜찮으세요?”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필리아에게 안겨들었고, 그녀는 아이를 품으며 연신 다정하게 토닥였다. 둘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자, 아주 작은 목소리로도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해나에게 들었습니다. 이안 님, 나중에 제가 증언할게요. 영주님의 건강 상태와 관련된 기록들은 제가 책임지고 잘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고마워, 필리아. 그리고 부탁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무엇이든지요.”
“중앙의 자크 백작님께 내 상황을 전달해 줘. 어머니가 유일하게 믿을 만한 분이라 하셨어.”
자크 백작? 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따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고마워. 아마 나는 크로니의 저택으로 가게 될 것 같아. 소식은 그쪽으로 은밀히 전해 줘.”
“크로니의 저택으로 가신다고요?”
“…응. 방법이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 자신의 힘으로는 저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저 힘을 갖출 때까지 납작 엎드려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친인척 아무도 오지 않았잖아. 나를 데려갈 사람은 크로니밖에 없다는 뜻이지.”
“…세상에, 이안 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저랑 같이 가셔요.”
“필리아랑?”
이안이 놀라 묻자, 필리아는 결연한 눈빛으로 이안에게 제안했다.
“집이 크진 않지만, 둘이 살기에는 넉넉합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해나와 함께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필리아. 우리는 얼굴 본 지 얼마 안 되었는걸.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도 아니고.”
“그래도 크로니 저자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이안이 설핏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내가 필리아를 따라간다 하면, 크로니가 필리아를 죽이려 들 거야.”
“이안 님.”
“고마워. 그래도 필리아가 그리 말해 주니, 나, 용기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언제든지 도망칠 곳이 있다는 안정감. 지금 이안에게 너무도 필요한 것이었다.
필리아가 다시 생각해 보라며 이안을 설득하려는 순간이었다.
“숙부.”
장례식을 시작하겠다는 크로니의 부름이 들려왔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필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고마워.”
그러나 필리아, 너를 위해서라도 나는 도망칠 수 없어.
이안은 직감했다. 크로니 저자에게 안전히 벗어나려면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자여야 할 것이라고. 황가의 핏줄인 영주 내외를 죽일 정도이니 어지간한 자들은 나뭇가지 꺾듯 죽일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장례식을 위해 도착한 신부가 성전을 들고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악단이 구슬픈 추모의 음악을 켰고, 몇 되지 않는 조문객들은 묵념하며 손을 모아 들었다.
이안 역시 마음껏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에게 기도했다.
‘어머니, 아버지.’
제발 저를 지켜 주세요. 그리고 언젠가 제가 두 분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두 분의 죽음과 연관된 자들을 모조리 처단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잘 살아남을 수 있게 부디…….
쿠웅.
“아이고.”
느닷없이 들리는 소음. 경건하게 기도하던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봤다.
통통한 남자 한 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무릎을 문지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크흠. 급히 들어온다고…. 계속하시지요.”
“누구십니까?”
신부가 계속 기도하려고 했으나, 크로니가 가로막았다. 친인척들이 장례식에 올 리는 없고, 영지민들은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정신머리 없는 부랑자는 아닌 것 같은데?
“아아. 황궁에서 나왔습니다.”
“…황궁?”
“근데, 기도 안 하십니까?”
장례식 중에 인적 사항 확인이 그리 중요한가? 사내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자, 크로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신부를 돌아봤다. 뜻을 알아챈 신부가 계속해서 기도를 덧붙였다.
우우우-
“에, 아름답고 영광된 삶을 살다 가는 작은 영혼이 있습니다. 신께서는 부디 이를 가엽게 여기시고…….”
훌쩍! 훌쩍! 방금 들어온 자가 콧물을 먹어 대며 훌쩍이자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렸다. 이안은 물론 크로니와 그 일행들, 기도하는 신부까지.
그렇게 정신없이 장례식이 진행되고, 이내 마무리를 위해 신부와 사제들이 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쿠웅.
단단히 닫힌 두 개의 관. 모든 게 끝났다. 이제 조금 기다렸다가 매장하기 위해 이동하기만 하면 된다.
크로니는 기다렸다는 듯 낯선 이방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황궁에서 나왔다면 황제의 조문객인가? 하지만 황제는 지금 이런 변두리의 일까지 돌볼 만한 상황이 아닐 건데?
“크로니 알파트입니다.”
“아, 예예. 안녕하십니까. 제국방위부 소속이시지요? 저는-”
사내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마법부 소속의 로만드로라고 합니다.”
“마법부?”
황제가 보낸 조문객이 아니다. 대체 마법부에서 여긴 왜 왔단 말인가?
“용건이 있으신가?”
“그럼, 있지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
로만드로는 엣헴, 목을 가다듬고는 품속에서 공문을 꺼내 건넸다.
“열 살 미만의 귀족 자제가 보호자를 잃으면 마법부에서 직접 마력운용자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걸 위해 왔습니다.”
“뭐? 무슨 그런 절차가 있단 말이오?”
크로니는 처음 듣는 것이라며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마력운용자 확인이라니? 금시초문인 건 둘째 치더라도, 귀족을 대상으로 시험하겠다는 건 더더욱 어불성설이었다. ‘귀족 태생 마법사’는 역사적으로도 전례가 없지 않나?
그러자 로만드로 역시 어깨를 으쓱거렸다.
“워낙 변방이라 소식이 늦었나 봅니다. 뭐, 사실 흔치 않은 일이지요. 저도 처음 행하는 일이고요. 법이 제정된 이래 고작 다섯 번 시행되었다고 하니, 원.”
“…다섯 번?”
“예. 사실 어린 귀족 자제분께서 한날한시에 부모님을 잃는 경우가 잘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 무슨 전쟁 통도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린 말이었지만, 크로니는 폐부를 찔린 듯 움찔했다. 로만드로가 찡긋 웃으며 덧붙였다.
“번거로워도 어쩌겠습니까. 까라면 까야지요.”
“…….”
크로니는 마법부 인장이 찍힌 공문을 연신 확인하며 되뇌었다. 뭔가 일이 꼬인 것 같다고. 물론 이안이 마법사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난 건 불쾌한 일이다.
“참 나. 대체 누가 이런 법안을…….”
크로니가 불평하듯 중얼거리던 차였다.
“엇, 누구냐고요? 그건 제가 잘 알지요.”
로만드로가 크로니의 손에서 공문을 쏙 빼냈다. 지난밤, 열심히 공부한 티를 낼 절호의 기회였으니.
“진 베로시온 황제, 그의 치하 때 제정되었답니다. 상당히 오래된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