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73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73화(873/935)
제873화. 태양 빛 후광
“로만드로. 그 위에 옷을 꺼내 주십시오.”
“이거요?”
“응. 고마워요.”
이안의 부탁에 로만드로가 옷을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작고 귀여운 옷들이 촤르륵 펼쳐지자, 이안은 한껏 고민하는 시선으로 그것들을 살폈다.
로만드로의 설명을 들어 보니, 중앙에 올라가면 당분간 저택에 못 돌아올 게 분명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돌아올 수 없었다.
‘해나를 제외한 누구도 못 믿겠으니까.’
나중에 스스로 지킬 수 있을 때가 되면 배신자를 색출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다.
하지만 그 전에는? 저택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황궁, 마법부에 숨는 게 현명할 것 같다.
“뭘 그리 고민하십니까? 다 멋지고 예쁜 옷들이네요. 모두 챙겨 가시면 됩니다.”
“…거처로 삼을 곳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짐을 최소화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보통 마법사들은 출퇴근을 합니다만 이안 님의 경우는 특별해서 어찌 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황궁에서 지내게 되든 밖에 저택을 구하게 되든 이만한 옷가지 정도는 감당하니 너무 염려치 마시지요.”
“그, 그럼 다 챙기겠습니다.”
이안이 작은 손으로 꼬물꼬물 옷을 개키며 정리하자, 로만드로 역시 옆에서 이를 거들었다. 어찌 옆에서 봐주는 시종이 없어? 그가 속으로 의아하게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똑똑.
“도련님, 저 해나입니다.”
해나가 인기척을 내며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를 발견한 이안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아까부터 얼마나 찾았다고? 지금도 보아! 내가 옷 정리를 하고 있잖아?
“어딜 갔었어?”
“죄송합니다. 그, 그것이-”
해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옷을 착착 개는 로만드로를 힐끔거렸다. 말해도 되려나?
“학습용 마력석이 드디어 미쳐 버렸는지…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를 내지 뭡니까. 몇 시간이 지나도 멈출 기미가 안 보여서 창고 밑에 숨어 있었습니다.”
“마력석?”
로만드로가 의아히 여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력감별 당시 속임수를 쓰려 했다는 걸 짐작하지 못한 눈치다.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껄껄거리며 웃었다.
“아아. 이안 님의 마력이 너무 강해서 그랬나 봅니다. 도련님, 저 너무나 기대됩니다.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분이 되실 것 같습니다.”
이안이 어색하게 웃자, 해나가 로만드로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짐을 싸려는 것이지요? 옷가지만 챙기면 됩니까?”
“일단은. 가져갈 책이나 물건이 있으면 아래층으로 내려보내게. 짐마차가 내일 아침 올 것이네.”
“알겠습니다.”
때마침 창문으로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아마 마법부에서 보낸 답신일 터였다.
“그럼 정리 좀 부탁하네. 도련님, 저는 이만.”
로만드로는 이안에게 인사를 남기고는 방을 나갔다. 이내 문밖 여기저기서 마법부 직원들의 외침이 들려 왔다. 로만드로를 불러 대는 소리였다.
끼이익.
쿵.
“하아, 긴장이 탁 풀리네요.”
문이 닫히자, 해나가 스르륵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이안이 마력운용자라는 것과 크로니의 마수를 한고비 넘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기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지경.
이안은 아끼는 책과 인형을 가방에 챙겨 넣으며 일렀다.
“해나도 이거 정리하고 짐 싸. 너랑만 갈 거야.”
“저도요?”
“그럼, 나 혼자 가게 두려고?”
“당연히! 아니지요!”
그 반응에 이안이 피식 웃으며 보석함을 열었다. 어머니가 남긴 귀중한 보석과 가문의 인장 그리고 각종 열쇠, 증명서 따위가 들어 있었다.
해나는 주머니에서 마력석을 꺼내 그 안에 톡 집어넣었다.
“이안 님. 여기에 크로니 일행의 밀담이 담겨 있습니다.”
“밀담? 무슨 밀담?”
“영주님 시해에 관해서 말을 나누었더라고요. 서랍 속에 있었어서 목소리가 좀 작고 드문드문 잘렸지만… 그래도 증거가 될 것 같습니다.”
이안이 눈을 반짝이며 마력석을 집어 들었다. 아이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해나가 그 손을 확 붙들었다.
“마력, 사용하시게요?”
“응?”
“그, 멈추는 데만 몇 시간 걸렸습니다. 이안 님, 마력을 좀 더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면 그때 확인해 보심이 어떠세요? 아니면 적어도 중앙에 가서,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을 때요.”
저택에는 눈과 귀가 너무 많았다. 혹여 증거로 삼을 만한 마력석이 있다는 걸 크로니가 알게 되면, 어찌 나올지 모르지 않나. 이안은 해나의 충고를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나저나, 마력을 한번 사용한 이후로는 막힘이 없으신가 봅니다.”
“응. 자연스럽게 뭔가 달라졌어. 로만드로가 표현하기를, ‘영혼의 길’이 트였다고 하더라. 한번 힘을 자각한 이상, 이제부터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거라 했어. 대단하지?”
“네. 정말 대단하십니다.”
해나는 이안이 대견하여 코끝이 찡해졌다. 영주님과 마님이 이걸 보셨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을까? 그토록 아끼고 사랑한 외아들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아셨으면 좋겠다.
“됐어. 얼른 짐 싸.”
“예! 이안 님!”
해나는 이안을 따뜻하게 꼬옥 안아 주고서 씩씩하게 짐 정리를 시작했다.
계절별 옷들, 마님이 직접 짜 주신 손수건, 신발, 처분 가치가 있는 장신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옷들까지. 로만드로와 이안이 어설프게 갠 건 다시 칼 각 맞춰 정리하고, 여행 가방에 빈틈없이 착착!
역시 손놀림이 다르다. 이안은 ‘오오’ 작게 감탄하며 웃었다.
* * *
“다 실었습니까?”
“예, 이쪽은 꽉 찼습니다.”
“뭐가 많긴 하네요. 하하.”
“의사 선생님들 것도 챙기다 보니…….”
하델 저택 앞, 마차 대여섯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리저리 바삐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는데, 이안과 마법부만 중앙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캘리 박사 일행까지 함께하기 때문이다.
진찰을 보러 온 환자가 명을 달리했으니 이제 하델 영지에 머무를 이유가 없지 않나. 필리아 역시 짐 가방을 마차에 올리며 저택을 힐끔거렸다.
‘크로니 일행은 안 가나 보네.’
마차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크로니 일행은 며칠 후에 저택을 떠난다고 들었다. 주인 없는 저택에 남아서 뭘 하려고 저러는 건지, 원.
그런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크로니가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필리아라고 했었나?”
“아. 네.”
“캘리 선생 말로는 약초학에서 우열을 가릴 자가 없다 하니, 대단하군. 내 중앙으로 가면 한번 찾아가지. 아버님께서 요즘 몸이 편치 않으셔서.”
필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꾸벅 고개 숙였다. 다행히 주위가 어수선한지라 이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한쪽에선 시종들이 눈물을 훌쩍이며 이안에게 인사했다.
“이안 님, 몸 건강히 잘 챙기시고요. 식사 잘 챙겨 드시고, 초코케이크는 적당히 드세요.”
“흥. 내가 어린아이인가?”
“예! 너무도 어린아이입니다!”
“시종장은 나를 대신하여 저택 좀 잘 돌보아 주게. 마차로 네 시간 거리이니,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왔다 갔다 할 수 있어.”
“그럼요.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돌아오십시오. 언제나 반짝반짝, 저택 잘 닦아 놓고 있겠습니다.”
이안은 크로니를 살피며 당부했다.
“크로니 경이 중앙에 당도할 때까지 영지와 저택 공무를 봐주신다고 하였지만, 시종장 자네가 더 꼼꼼하게 확인하여야 해. 손님이 돌아가시면 연락 주고.”
“알겠습니다. 여기는 걱정 마시고 이안 님만 생각하십시오. 에효오, 여리신 분이 황궁에서 잘 적응하실까 마음이 무겁습니다.”
“연락할게.”
이안은 시종들에게 일일이 작별 인사를 건넨 다음 크로니를 돌아봤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안과 눈높이를 맞췄다.
“중앙에서 뵙지요, 숙부.”
“예, 크로니 경. 조심히 오십시오.”
그 말이 퍽 우스웠던 것일까. 크로니는 웃음을 터트리며 아이의 손을 맞잡았다.
“숙부야말로 조심하십시오. 요즘 도적 떼들이 기승을 부린다는 소문이 돌아서요.”
그런 소문은 들어 본 적 없다. 중앙에서 내려온 로만드로도 별말이 없었고.
이안은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지만, 마부의 무언의 재촉에 대화를 마무리했다.
“출발하겠습니다! 모두 타셨지요?”
“그래, 가자고! 출발!”
히이이잉!
해나의 무릎에 앉은 이안이 창문으로 식솔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난생처음 영지를 떠나는 날이다. 두려움과 기대, 설렘 등이 아이의 심장을 콩콩 두드렸다.
“이안 도련님!”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여기는 저희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길목 곳곳에 영지민들이 이안을 배웅하고자 나와 있었다. 그들 모두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한평생을 산 자들이다. 소천한 하델 영주 내외를 마음 깊이 애도하고, 하나 남은 아들이 자신들의 주인임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아이 홀로 중앙에 가는 게 마음 쓰일 수밖에 없었다.
타닥타닥!
이안은 마차 창문에 기대어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뒤쪽을 바라봤다. 로만드로와 필리아, 해나는 간식을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잡담했다.
어느새 영지는 멀어지고 밭과 들이 가득 펼쳐졌다. 이안은 휙휙 바뀌는 풍경이 신기한지 연신 바깥만 내다보았다. 평화로운 경치에 살살 잠이 오려는 때였다.
‘음?’
시야에 낯선 것이 포착되었다.
저 멀리 강 건너편, 마차와 같은 방향으로 말을 모는 한 남자. 붉은색과 금색이 인상적인 로브를 휘날리며, 말을 달리고 있었다. 척 보아도 기마술이 수준급이다.
‘여행자인가?’
아직 영지를 채 빠져나오지도 않았는데 신기한 사람을 보는구나. 이안은 해나가 쥐여 주는 초콜릿을 와그작 깨 먹으며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덩치가 상당한 것 같다.
“무얼 그리 재미있게 보셔요, 이안 님?”
“필리아. 저기, 건너편에 말을 탄 사람이 있어.”
“말 타고 달리는 사람이 신기하셔요?”
“응. 로브가 특이해서.”
아이의 말에 필리아 역시 흥미를 느껴 함께 구경했다. 확실히 이국적인 무늬의 로브다.
하지만 이내 길이 틀어지며 수풀이 사위를 가렸고, 사내의 모습 역시 사라졌다. 자세를 바로 한 이안이 로만드로에게 물었다.
“한데 로만드로. 가는 길목이 좀 위험합니까?”
“위험이요? 인적이 드문 길목엔 강도나 도적이 종종 나타나긴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이 움직일 때는 놈들도-”
쿠웅!
히이잉!
“……!”
로만드로가 말하기 무섭게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맨 앞에서 달리던 마차가 옆으로 넘어지고 만 것이다.
놀란 로만드로와 필리아, 해나가 동시에 이안을 꽉 붙들었다.
“이안 님, 괜, 괜찮으세요?”
“어구구구, 허리야. 갑자기 뭔-”
쓰러진 마차 탓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뒤로 돌기에는 길목이 좁아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꼼짝없이 자리에 묶이고 만 것이다.
해나가 삐끗한 목덜미를 매만지며 창밖 상황을 살펴보다 기겁했다.
“헉! 저, 저기!”
촤아아악!
수풀에 숨어 있던 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검을 치켜들고서 달려드는 게 아닌가?
그들은 도망치려는 마부를 붙잡아 목을 베어 버렸고, 그에 놀란 말들이 이리저리 날뛰며 소란을 피워 댔다.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죽여라! 모두 죽여!”
“그놈은 어디 있지?”
“뒤쪽! 뒤쪽을 살펴라!”
채앵! 챙!
마법부 직원들이 검을 빼 들고 맞섰으나, 수적 열세가 심했다. 로만드로가 재빨리 문을 열며 이안을 안아 들었다.
“해나, 필리아! 왔던 길로 뛰게나!”
“저기, 로만드로!”
“괜찮습니다. 저 직원들, 호위대입니다. 다치지 않게 멀리 떨어지십시오.”
로만드로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검을 다잡았다. 이안이 기본적인 공격 마법이라도 구사할 수 있으면 몰라, 이제 겨우 마력 개방을 마친 다섯 살 난 아이다. 아이를 지킬 이는 자신밖에 없다.
“느으으아아압!”
습격자들이 무자비하게 짐꾼들과 의사들을 베어 내자, 로만드로가 눈을 질끈 감고 달려들었다. 안타깝게도 몇 발 떼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지만.
그 틈에 습격자들 중 누군가가 이안을 발견하곤 신호했다. 저기, 목표물이 있다는 듯이.
휘이이익!
휘파람 소리를 들은 습격자 중 하나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필리아에게 안긴 이안의 이마가 그 표적이었으니.
꽈아아악.
‘아.’
이안은 알아챘다. 어째서 크로니 일행이 자신들과 함께 출발하지 않았는지.
피잉!
알리바이를 위해서다. 연이은 하델 일족의 죽음. 그 중심에 항상 크로니가 있다면, 누군가는 의심하지 않겠나.
끝내 이번에는 자신을 죽이려는 게다. 도적 떼를 가장하여, 제 미간에 저 화살을…….
지이이잉!
이안이 본능적으로 마력을 개방하는 순간이었다.
촤아악!
하지만 그 찰나, 필리아의 뒤로 말을 탄 낯선 사내가 끼어들어 화살을 맨손으로 잡아냈다. 아주 가볍고 무심하게.
툭.
그러고는 덤덤하게 화살을 꺾어 버렸다.
놀란 필리아가 뒤돌다가 발이 꼬이며 크게 휘청거렸다. 사내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낯선 억양. 바리엘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필리아는 구릿빛 피부의 사내를 올려다봤고, 이안 역시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봤다.
“아.”
사막을 연상시키는 사내-
태양 빛이 후광처럼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