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76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76화(876/935)
제876화. 아군인가, 적인가
이안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로만드로가 하는 것을 지켜봤다.
도적의 입에 물약을 슬쩍 흘려 주니, 피가 단숨에 멎고 새살 돋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파리했던 안색은 선홍빛으로 돌아오고 반쯤 나가 있던 정신 역시 깨어지는 듯 보였다.
로만드로는 연신 아깝다는 듯 꿍얼거렸다.
“이게, 이게 진짜 비싼 건데…. 쯧.”
전설의 마법부 장관 아코렐라가 만든 역작 중에서도 뛰어난 평가를 받는 물약이다. 이것 덕에 사상자를 기록적으로 줄일 수 있었고, 진 베로시온 시대부터 지금까지 태평성대의 한 축을 담당하며 바리엘의 발전을 도운 보물.
유일한 흠이라고는 제조에 필요한 마력석이 굉장히 희귀하므로 대량생산이 불가하다는 것 정도다.
“호강하는 줄 알아라. 네놈이 처먹는 이거, 내로라하는 중앙 귀족들도 줄 서서 기다리는 거니까.”
“커헉, 컥…….”
도적이 움찔거리며 숨을 토해 냈다. 어디 불편해서가 아니라, 고통과 피로에서 갑작스레 해방됨으로써 나온 반응이다.
놈이 슬쩍 고개를 들어 눈을 깜빡거렸다.
“뭐, 뭡니까. 이게.”
“정신이 좀 드나?”
“나, 나, 죽었어요?”
“뭐. 앞으로에 달려 있겠지.”
도적은 멀쩡해진 제 손등을 연신 살피며 상황 파악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로만드로는 한눈 그만 팔고 자신에게 집중하라며 그의 손등을 소리 나게, 짜악- 때렸다.
“묻는 말에 대답하시게. 아까 많이 힘들었지? 또다시 거짓을 고하거나 쓸데없이 침묵하면, 그 과정을 한 번 더 겪게 될 걸세.”
“잠깐, 잠깐만요.”
“혹 도적질이 목적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아 우리를 공격한 것인가?”
로만드로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도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잠깐의 침묵. 로만드로 옆에 착 붙어 있던 이안 역시 어서 말하라는 듯 눈을 세모나게 떴다.
도적이 입술만 달싹거리자 로만드로는 혀를 끌끌 차며 일어났다.
“떼잉. 약만 버렸네. 이보시게, 밖에! 이놈 원상복구 좀 해 주시게!”
“아니, 무슨!”
“왜? 뭐? 아니면 약값 줄 건가?”
밖에서 경비병의 인기척이 들리자, 도적이 희게 질려서는 고개를 휙휙 저어 댔다. 로만드로는 경비병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뜻으로 문을 쿵쿵 두드렸다.
“자아. 그럼, 말해 보시게. 아는 것 모두.”
“저, 며칠 전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초승달이 뜨면 다음 날 낮쯤에 마차들이 지나갈 것인데, 모, 모두 죽여 달라고요.”
초승달이 뜬 다음 날이라. 이안이 하델에서 출발하는 일정을 아는 놈의 소행이다. 로만드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턱을 문질렀다.
“모두 죽여라? 누구를 특정하지는 않았고?”
“…….”
“거짓말입니다, 로만드로 님. 내가 똑똑히 들었어요.”
이안이 재차 덧붙이며 주장하자, 도적이 난감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예, 뭐,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어린 남자아이 하나가 있을 것인데 다른 사람은 놓쳐도 그 아이는 놓치지 말라 하였습니다.”
“사람이 어찌 그래? 보게. 고작 다섯 살 난, 이 예쁜 아이를 죽이고 싶나?”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 일인걸요.”
“세금도 안 내면서 일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따악! 로만드로의 분노에 찬 꿀밤이 도적 머리에 작렬했다. 생각보다 알차게 들어갔는지 도적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그, 그리고 대충 몇 명 정도 될지, 전력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해서 알려 주었습니다.”
“누구였는데?”
“밤이었고… 로브로 모습을 가린 터라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내인 것은 확실합니다.”
“정체도 모르는 자와 손을 잡았단 말인가?”
“돈 받았는데 그것까지 알 필요가 있습니까?”
“뭐. 그것도 그렇긴 하네.”
이안은 깨달았다. 크로니가 자신과 따로 움직인 것은 알리바이 목적도 있지만, 자신이 배후라는 걸 숨기기 위함이었음을.
함께 움직였다면 의뢰인인 줄 몰라본 도적들에게 함께 공격당했을 게다.
“돈은?”
“예?”
“착수금. 얼마를 받았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 금화 스무 닢 정도입니다. 돈은 이미 다 썼습니다.”
금화 스무 닢이면 일반 농민의 한 해 수입과 맞먹는다. 이를 착수금으로 지급할 정도면 어지간한 재력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뜻-
하나부터 열까지 다 크로니를 가리키고 있었다. 로만드로는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하더니, 문을 열어 소리쳤다.
달칵!
“경비병!”
“예. 여기 있습니다.”
“이자들, 사주받은 게 맞았어. 부당이득이 있으니 다시 처음부터 조사하시게. 꼭 회수해야 하네! 무려 금화 스무 닢이래!”
금화? 경비병들의 눈이 번쩍였다.
부당이득을 회수하면 그중 대부분은 해당 마을의 경비대 예산으로 편성될 것이다. 고기반찬값을 넘어 두둑한 보너스를 기대해도 될 만큼 엄청난 금액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로만드로가 뭔가를 덧붙이려 했지만, 경비병들은 듣지도 않고 조사실로 달려 들어갔다.
크로니에게 사주를 받은 것은 경비대장을 비롯한 소수의 윗선. 떡고물 하나 제대로 받아먹은 것 없는 경비병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콰앙!
로만드로는 확 닫힌 문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저저, 약발 떨어진 다음에 해야 하는데…….”
안 그러면 찢기는 즉시 회복되어 몸은 멀쩡하되 고통은 선명하니, 사람 하나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로만드로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이안을 돌아봤다.
“일단 나갈까요? 도련님.”
곧 문틈으로 끔찍한 소리가 새어 나올 테니까요. 로만드로의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아이를 데리고 조사실을 나오자마자 이내 도적의 끔찍한 비명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 * *
여관방에 둘러앉은 해나, 필리아, 로만드로, 그리고 이안.
네 사람은 탁자 위에 놓인 꼬깃꼬깃한 종이를 말없이 쳐다봤다. 계속 이어지는 침묵에 해나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응? 아니, 아닐세!”
…과연 괴발개발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나가 손님방에 침입하여 크로니의 서신 일부를 베껴 온 것인데, 악필 탓에 내용을 제대로 읽기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드문드문 잘린 문장들까지…….
로만드로는 종이에 코를 박을 것처럼 가까이 살폈다.
“그러니까, 크로니 경이 하델 영주 내외를 살해했고, 나아가 이안 도련님까지 죽이려 한다는 것이군요. 하델가의 유산을 노리고요.”
“해나가 직접 들었고 어머니 또한 알고 계신 듯했습니다. 그리고 이거-”
이안은 마력석을 꺼내 보여 줬다.
“음성 녹취가 가능한 마력석인데, 크로니 일당의 대화가 녹음되어 있습니다. 음질이 좋지 않지만 충분히 들릴 것입니다.”
…끄응. 로만드로가 팔짱을 끼고서 물증들을 테이블 위에 쭈욱 나열했다.
해나의 서신은 사실상 증거로써 효력이 없다. 원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력석은 내용을 직접 들어 봐야겠지만, 이것 하나만으로 크로니와 그 일당을 엮기에는…….
“위험합니다.”
로만드로는 단호하게 결론 내렸다.
영주 내외를 죽이고 도적놈들까지 사주한 자다. 지금 크로니가 어디 멀리 있던가? 여관 밖, 경비대 건물에서 뭘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가 눈치를 챘고, 심지어는 물증까지 들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면 어찌 돌변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황궁에서 제국방위부의 크로니 경에 대한 몇몇 소문을 들었습니다. 성정이 잔인하고 냉정한 데다, 사고 또한 칼과 같은지라 내 편과 네 편만이 있는 자라고.”
네 편과 내 편이 명확하다는 건, 그가 어떤 일을 벌이기 전에 상황 파악을 확실히 할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이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가 영주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손쓸 도리가 없었으리라. 그는 사냥 가능한 먹잇감만 노리니까.
“어설프게 건드려선 안 됩니다. 이안 님. 이미 크로니는 심문 과정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눈치챘다고 생각하겠지요. 이것부터가 벌써 위험에 한 발짝 들어선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자는 말씀입니까?”
“황궁으로 먼저 갑시다. 눈과 귀를 닫고 황궁으로 먼저 간 다음 뒷일을 도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곳에는 크로니의 편도 있지만, 그만큼 그자와 적대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적의 적은 동료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안은 마력석을 다시 잘 챙겨 넣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알겠는데,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중앙에 가서 황궁에 보고서를 올릴 것입니다. 도적들의 습격도 기재할 것인데-”
“내가 아니라 마법부를 노렸다고 적어 주시면 안 됩니까?”
이안이 로만드로의 손을 덥썩 잡으며 부탁했다.
“그리하면 내가 아닌 마법부를 전면으로 세워 크로니의 날을 우회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도도 높아지겠지. 뭐든지 판이 크면 클수록 사람도 모이고, 상대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이다.
로만드로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웃었다.
“저보고 가짜 보고서를 쓰란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요. 그대는 마법부 직원이고, 나 역시도 마법부 소속이니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 도적이 어린아이, 나를 노렸다는 게 명명백백하지만 굳이 그걸 강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게다가 로만드로 당신도 이미 진실의 울타리에 갇힌 것 아닌가? 크로니가 이안을 노렸다는 사실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면, 현장 증인이자 조력자인 로만드로도 위험에 처할 것이다.
로만드로는 능청스럽게 눈썹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뭐. 보고서는 원래 간결하게 쓰는 것이 맞긴 하지요.”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뜻.
로만드로의 대답에 이안이 씨익 웃었다.
“황궁에서 관심을 가지면 도적들을 중앙으로 호송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하고 공정한 조사가 가능해지겠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실담물약을 사용할 수 있게 되지요.”
“실담물약?”
“아, 아까 말씀드린 미친 전 장관 때 만든 것인데요. 진실과 거짓을 밝혀 주는 약입니다. 상용화된 지 오래지만 그만큼 약효를 무력화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절차로 사용하는 건 신뢰가 없어서 말이지요.”
똑똑.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
해나와 필리아, 로만드로가 후다닥 탁자 정리를 하며 소란을 피워 댔다. 그들은 널브려 놓았던 종이 따위를 챙겨 넣으며 대답했다.
“누, 누구십니까?”
혹시 크로니 아냐? 음험한 놈 같으니라고. 혹시 밖에서 계속 엿듣고 있었나? 다들 긴장한 채로 소리치자 어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또 찾아왔소.”
네르사른이다. 필리아가 조심히 문을 열자, 구릿빛 거구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안 도련님을 찾아왔다고 하던데.”
“여기로요?”
네르사른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의아해하며 창문 쪽을 쳐다봤다. 하델 영지 쪽에서는 이미 크로니가 왔는데, 또 어디서 이안을 찾아왔단 말인가? 로만드로는 낯선 마차를 자세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본 인장인데…….”
해나 역시 깃발을 유심히 보다가, 이내 깨달았다는 듯 손바닥을 쳤다.
“아!”
자크 백작의 인장이다. 이안의 어머니인 제리아 부인의 스승! 해나가 반가워하며 이안을 돌아봤다.
“도련님! 자크 백작가에서 사람을 보내셨나 봅니다! 저희를 도와주려는 것이겠지요? 어서 나가 보셔요.”
이안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폴짝폴짝 뛰는 해나와 달리 이안은 차분하게 웃옷을 정리했다.
“글쎄.”
당시 어머니의 당부는…….
“자크 백작은 어미의 스승이시다. 믿을 만한 분이니 혹 어려움이 있다면 그분께 도움을 청하되, 인장을 달라 한다면 바로 뒤돌아 나오거라.”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자다.그리고 무엇보다-
“보면 알겠지.”
부모님의 장례식에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이안은 입술을 단단히 깨물고서 여관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