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77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77화(877/935)
제877화. 영원의 무덤
“이안 도련님?”
자크 백작가에서 나온 사람이 이안을 단박에 알아봤다.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었는데,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정장 품에는 한 치의 오차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다.
이안은 그가 단순한 심부름꾼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집사겠지?
“안녕하십니까. 자크 백작님을 모시고 있는 집사 알렉서입니다. 먼저 하델 영주 내외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이안은 경비대 사무실에서 나오는 크로니를 발견했다. 그 역시 갑작스레 무슨 일인지 궁금한 눈치로 이안과 알렉서를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백작님께서는 중앙에 계시지 않아 전달이 늦었고, 자제분들 또한 각자의 사정이 있었던 터라 대리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상황을 전해 들은 백작님께서는 직접 하델가를 방문하시길 원하셔서-”
길고 긴 사정 설명이었다.
이안은 저것이 변명인지, 아니면 아예 거짓인지 분간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꿀 바르듯 술술 넘어가는 말속의 진의를 알아채는 건, 저자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않겠나.
“그래서 말입니다, 도련님.”
집사가 싱긋 웃으며 말을 잠깐 끊었다.
“혹 마차나 마부가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준비한 것을 타고 올라가시지요. 허락해 주신다면 뒷수습 또한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중앙까지 겨우 두어 시간 거리인데, 작은 마을보다는 백작저에서 지내시는 게 편하지 않으실까요?”
집사가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이유였다. 이안이 무사한지 확인도 할 겸.
아이는 로만드로를 힐끔거렸다. 어찌하면 좋을지 의중을 묻는 것처럼.
“잠시 실례합니다.”
이안의 신호를 알아챈 로만드로가 아이를 살짝 옆으로 데리고 와 속삭였다.
“이안 님은 어찌하고 싶으십니까?”
“제안으로만 본다면 거절할 필요가 없긴 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크로니와 연이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혹 뒤처리를 맡겼다가 증거가 인멸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요.”
로만드로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제안이지만, 아니라면 제 손으로 순순히 증거물을 상대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크로니가 이 마을에 와 있는 이상 중앙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는 막무가내로 이안 님을 해칠 수 없으니까요.”
증거물을 갖고 있다는 걸 들키기 전, 안전지대로 이동하자는 뜻이다.
“시험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시험?”
“자크 백작가에서 이 일을 잘 처리해 준다면 이안 님의 편일 것이고, 아니라면 크로니의 편이겠지요. 정체 모르는 자를 계속 경계하는 것보다 아예 적의부터 파악하고 대응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일리가 있었다. 모호하게 관계를 맺었다가는 언젠가 크게 화를 입을 터. 초장부터 상대를 정확히 알아 두는 게 좋다.
이안은 로만드로에게 부탁했다.
“하면, 증거 인멸에 대비하여 도적들 조사 내용과 담당 경비병들 신원 파악을 해 주십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로만드로가 잇새로 대답하며 웃었다. 멀리서 크로니가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나. 괜히 시선을 돌리며 집사 알렉서에게 다가갔다.
“예, 그럼. 마차와 마부 지원을 해 주시는 것입니까?”
“바로 타고 가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잠시 짐 정리하고 해도 되겠지요?”
“물론이지요. 자크 백작님께서는 이안 도련님께서 마력운용자라는 소식에 굉장히 놀라고 기뻐하셨습니다. 모든 도움을 아낌없이 전하라는 지시가 있었답니다.”
이미 중앙에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듯싶다. 하델 영주의 다섯 살 난 아들이 마법사라고 말이다. 최초이자 최연소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높은 건 당연하지만.
“이안 님. 먼저 타 계십시오.”
로만드로는 짐을 챙겨 오겠다며 여관 쪽으로 달려갔다. 물론 짐만이 아니라 나중에 상황을 증명할 만한 증거도 포함해서.
“해나!”
“예, 도련님!”
해나 역시 바삐 움직였고, 주변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그 틈에 네르사른은 필리아 쪽을 쳐다봤다.
“…….”
이곳에 남아 환자들을 돌보려는 눈치다. 황궁에 목적이 있는 자신과 달리 그녀는 자유로웠으니까. 필리아가 이안에게 다가갔다.
“이안 님.”
“필리아, 자네는?”
“저는 여기 남겠습니다. 부상자들을 두고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쯤은 여기 남아 상황을 계속 지켜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이안이 걱정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필리아는 집사 알렉서와 크로니의 동태를 기민하게 살필 생각이었다.
이안은 마음이 좀 놓인다는 듯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고마워. 중앙에서 보자고.”
“네. 찾아뵙겠습니다.”
“꼭. 알았지?”
“물론이지요.”
이안과 필리아가 가볍게 포옹을 나누었다.
이를 가만 지켜보고 있던 네르사른은 손을 내밀었다. 제국식 인사가 어색했지만, 아쉬운 감정이 이상하리만치 몰아쳐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필리아는 살포시 웃으며 인사했다.
“또 뵙겠습니다. 사막의 전사님.”
“…….”
이안은 굳어 버린 네르사른을 힐끔 올려다봤다. 흐음, 이거 뭐지? 아이의 눈길에 의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딱딱한 표정은 변함이 없는데 묘하게 귓불이 붉어진 것 같은…….
“숙부.”
“아, 크로니 경.”
“지금 바로 가십니까?”
크로니는 너무 갑작스럽지 않냐는 듯 웃었다. 그러고 보니 하델에서 소식을 듣고 온 크로니는 마차나 마부를 데려오지 않았다. 꼭 중앙으로 가는 여정이 지체되길 바라는 것처럼.
이안은 마차 쪽으로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예. 자크 백작님께서 이리 신경을 써 주시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요. 두 시간 정도만 가면 된다고 하니 서두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곧 하델을 정리하고 올라가겠습니다. 입궁 잘 하십시오. 숙부의 품격이 곧 하델의 품격이 될 터이니.”
“예. 잘 해내겠습니다.”
그쪽의 걱정이 쓸데없는 일이 되도록, 잘.
이안이 눈빛을 쏘아 대고는 마차에 휙 오르자, 로만드로와 해나가 짐가방을 들고서 급히 뛰어왔다.
“집사, 마차는 한 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짐칸이 모자라시는지요?”
“아니, 그건 아닌데. 혹 또 도적들을 만날까 봐서요.”
“아아.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알렉서가 인자하게 웃으며 문을 닫아 줬다.
“백작님께서 그리 두지 않으실 것이니 말입니다.”
타악.
집사의 신호에 마부가 채찍을 크게 휘둘렀다. 천천히 출발하는 마차. 이내 속도가 붙으며 풍경이 빠르게 흘렀다.
일이 폭풍처럼 진행되는 것 같아 이안은 창문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창밖으로 크로니와 필리아가 스쳐 지나갔고, 뒤로는 네르사른의 말발굽이 크게 울렸다.
해나는 네르사른이 가까이 있음을 확인하곤 무심코 로만드로를 쳐다봤다. 에, 표정이 왜 저러시지? 낯빛이 썩 편치 않아 보였다.
“로만드로 님, 근심 푸셔요. 아까 네르사른 님이 싸우는 거 눈으로 보셨잖아요. 무엇이 그리 걱정이세요?”
“아니, 뭐… 혹시 몰라서 그러지. 아무리 저 사막 부족 전사래도 마검사는 이기기 힘들잖아.”
“마검사요?”
“아, 모르는군. 이안 님도 모르십니까? 자크 백작님이 어떤 분인지요.”
이안은 자세를 바로 했다. 어머니의 스승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자크 백작만이 아니라, 중앙의 많은 귀족들에 대해서 아이는 들은 바가 없다. 아직 대외적인 활동을 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 뵌 적도 없습니다.”
“큼큼흠, 제가 잠시 설명해 드리지요. 자크 백작가는 그리 오래된 가문은 아닙니다. 100년 정도 되었으려나요? 가문의 역사가 짧은 것치고는 중앙에서 입지가 아주 높답니다. 특히 무가(武家) 중에서는 으뜸이지요. 시조가 저기, 황궁친위대 출신 마검사거든요.”
이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명망 높은 무가의 주인이 어떻게 어머니의 스승이셨단 말인가? 어머니가 무예를 익혔다는 말은 들은 적 없거늘.
“아, 마검사는 마법사와 비슷하지만서도 조금 결이 다른 자들입니다. 마법사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수가 희귀하여 대부분 황궁 정예로서 일한답니다.”
“마법사만큼 귀한 자들이라.”
맞습니다. 그런 마검사를, 자크 가문은 대대로 배출했습니다. 물론 한 세대에 한두 명 정도이지만요.”
“그것도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사실상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합니다. 아무튼, 자크 백작님은 마검사는 아니지만 예전에 바리엘대학 교단에 서신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때 이안 님의 모친과 연을 맺지 않았을까요?”
만나 보면 알 수 있겠지.
마차가 언덕을 오르는지 크게 기울었다. 로만드로는 놀라지 말라는 뜻으로 둘에게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만 넘어가면 곧 중앙이 보일 겁니다.”
“생각보다 더 가까웠네요. 걸어왔어도 됐겠는데요.”
“하핫! 짐말들 생각은 좀 다를 겁니다. 언덕 경사 좀 보세요. 걸어 올랐다간 숨넘어갑니다.”
로만드로의 농담에 이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말대로 전경이 탁 트이며 중앙이 한눈에 들어왔다.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건물들. 이안의 벽안이 청명한 하늘빛으로 반짝였다.
“어떠십니까?”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예, 가이아의 심장입니다. 중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안 님.”
“와아…….”
조금씩 중앙이 가까워질 때마다 이안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흥분이 최고조에 달했지만, 귀족 가문의 자제답게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물론 발 끄트머리는 계속해서 까딱까딱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타닥타닥!
히이잉!
하델은 다른 지방 영지와 비교하면 작고 낙후된 지역은 아니나, 역시 중앙과는 비견할 수 없었다.
별천지라는 게 이런 걸까? 온갖 특이한 차림새, 외국인, 낯선 동물, 거대한 대로변, 건물과 건물을 잇는 끝없는 우편 줄, 거대한 마차들, 날아다니는 사람……?
“어?”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방, 방금 사람이 날아갔습니다.”
“아. 마법사인가 봅니다. 누가 이 시간이 나왔담?”
“그럼 저도-!”
이안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저도 날 수 있나요?”
신의 권능자라는 것만 알고 있지,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로만드로는 아이의 반응이 퍽 귀여웠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나는 것뿐이겠습니까? 산을 옮기고 강을 뒤집을 수도 있지요. 크로니가 왜 저리 날을 세우고 있는데요? 이안 님이 조금만 성장하시면, 그 누구도 위해를 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와아. 날 수도 있구나. 이안이 주먹을 꽉 쥐며 로만드로에게 부탁했다.
“먼저 황궁으로 갈 거지요? 마법부를 제일 먼저 들르고 싶습니다!”
“그럼요. 황궁에 보고하는 게 먼저지요. 자크 백작저에는 나중에 일 다 보고 갈 것입니다.”
로만드로의 말에, 이안이 다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호들갑 떤 것 같아서 조금 겸연쩍다는 표정이다. 아이는 다시금 천천히 바깥 풍경을 구경하기 시작했고, 이내 의아한 것을 발견했다.
“무덤인가요?”
중앙 광장 가운데 쌓인 꽃 무덤. 분명히 무덤의 형태인데, 사람들은 일상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그 주위를 오갔다. 몇몇은 꽃 따위를 새롭게 던지기도 했다. 마침 마차가 거리에 멈춰 선 터라, 이안은 그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아. 예. 광장의 꽃 무덤입니다.”
“누구의 무덤이지요?”
“모른답니다.”
“몰라요?”
로만드로는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가리며 비밀이라는 듯 속삭였다.
“아주 옛날, 바리엘과 가이아를 위해 신께서 내려 주신 ‘금빛 마법사’를 기리는 무덤이라 합니다.”
“전설 같은 건가요?”
“글쎄요. 기록으로는 없지만 전설이라 하기에도 좀 그렇습니다.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서요.”
로만드로는 가만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그냥 그런 것이라고.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지난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자세한 건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시면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안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