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79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79화(879/935)
제879화. 첫인상
“후우…….”
황제의 침실 밖으로 나온 이안과 로만드로. 그저 차분히 서 있는 이안과 달리, 로만드로는 주르륵 주저앉아 숨을 거칠게 토해 냈다. 황제를 이리 가까이 접견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로만드로? 말씀대로 인자한 분이시던데요.”
“예예. 그, 저에게는 인자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서요. 이건 뭐랄까, 크흠. 녹봉 먹는 관리라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이요?”
“이안 님은 어리셔서 아직 잘 모르십니다. 크흑.”
아니지. 앞으로도 모르려나? 어릴 때부터 황궁 마법사의 길을 걷게 되는 귀족 아이에게 무엇이 두려울까? 로만드로는 손수건으로 땀을 훔쳤고, 이안은 그를 일으키려는 듯 끙끙대며 팔을 잡아끌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해나를 불러올까요?”
“아닙니다. 일어나야지요. 굴러서 갈 수는 없으니…….”
로만드로는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났고 곧 시종장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안은 아까 전의 초상화를 다시 보고 싶었으나, 길이 달라졌음을 알아챘다. 들어오는 길과 나가는 길이 다른 것인가? 황궁은 참으로 복잡하고 신기한 곳이었다.
“로만드로. 바리엘 역사에 대해 더 알 수 있을까요?”
“학교에 가시면 차근차근 배우실 것인데, 미리 선행하길 원하시는 건가요?”
“선행도 선행이지만 개인적인 호기심 충족입니다.”
“흐음. 잠시만요.”
이안의 대답에 로만드로가 무언가를 생각하며 턱을 문질렀다. 바로 옆 건물에 황궁 도서관이 있으니 그곳에서 서책을 빌려다가 이안에게 전할까 싶었던 게다. 다섯 살밖에 안 되었지만, 이안이라면 충분히 읽어 낼 수 있으리라.
그때 마차 옆에 선 해나와 마부가 보였다. 로만드로는 손을 흔들었다.
“이보게들!”
“일정은 다 보셨습니까? 마법부로 출발할까요?”
“마법부에서 바로 오라 하시던가?”
로만드로의 물음에 마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법부 업무가 과중하여 잠시 대기하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잘 되었군. 그럼 잠시 도서관에 들를 터이니 기다리시게. 아차차! 네르사른은?”
“네르사른 님은 아직 황궁에서 안 나왔습니다.”
뜻밖이었다. 천려 지도자의 죽음은 사실 황궁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르사른 본인조차 이것을 왜 직접 전언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전언만 하고 바로 나올 줄 알았는데. 로만드로는 일단 알겠다며 손가락을 탁탁 튕겨 댔다.
“이안 님, 이쪽으로.”
“네!”
이안은 해나에게 손을 흔들며 로만드로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본궁과 이어져 있는 궁으로 들어가니 분위기가 확 바뀌는 게 느껴졌다. 조금 더 업무에 치중되어 정신없는 분위기. 이안은 로만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소맷자락을 꽉 쥐며 몸을 바짝 붙였다.
“실례합니다.”
그때였다. 누군가 이안과 로만드로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정복 차림에 허리춤에는 검을 찬 사내였는데, 이안은 혹여 제국방위부의 크로니 수족일까 봐 반사적으로 경계했다.
“혹시 이안 하델 도련님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어찌 아셨는지요?”
“죄송합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자크 백작가의 둘째 영식, 헤르치 자크입니다. 로만드로 님이 낯선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짐작했답니다.”
헤르치 자크. 자크 백작의 아들이로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인 제리아 부인과 똑 닮으셔서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이안은 턱을 살짝 숙여 예의를 보였고, 헤르치는 부하들에게 잠시 물러나 있으라 손짓했다.
“황궁친위대 삼대장 중 한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마력운용자시라고요.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것입니다. 반갑습니다.”
“황궁친위대시군요?”
“예. 황제 폐하의 곁에서 그분의 검과 방패가 되어 드리는 임무를 맡고 있지요.”
“그럼 헤르치 님도 마검사이십니까?”
“맞습니다.”
헤르치는 쪼그려 앉아서는 이안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황궁에 왔구나.
누군가는 대단하다, 부럽다 여기겠지만, 헤르치는 이것이 너무도 안타까운 일임을 알고 있다. 고작 다섯 살. 제 자식과 몇 살 차이 안 나는 걸 생각하면, 아이는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도 차가운 곳으로 들어선 것이다.
“이리 뵌 김에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시간 괜찮으신가요?”
헤르치가 로만드로를 돌아보자, 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무 문제 없다며.
“안 그래도 이안 님이 바리엘 역사에 관심이 많아 책을 빌리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마법부는 지금 정신이 없어 보이니 시간 보낼 만한 곳이 어디 없나 둘러보고 있었지요.”
“잘 되었습니다. 다른 삼대장은 현재 황제 폐하 곁을 지키고 있어서 소개해 드릴 수 없겠지만-”
이안이 기억을 더듬었다. 황제의 침소는 텅 비었다고 느낄 정도로 적막했다. 사람도, 가구도, 장식도 없었는데, 삼대장이 계속 곁에 있었다는 말인가? 조금 놀랍다.
“대신 다른 대원들과 눈도장이라도 찍어 두시면 좋을 것입니다. 마검사와 마법사는 닮은 구석이 많답니다. 마력이라는 공통의 힘을 지닌 데다, 둘 다 황궁 내 중추 기관인지라 같이 일할 일이 많거든요.”
헤르치는 뒤에 선 부하들의 이름을 하나씩 천천히 일러 주었고, 이안은 단번에 외우겠다는 기세로 그들과 눈 마주쳐 인사했다. 짤막한 소개가 끝나자, 헤르치는 사무실 문을 열어 주며 안으로 안내했다.
끼이익.
“헤르치 대장, 오셨습니까? 옆에는…? 자제분인가요?”
“나는 딸만 셋일세.”
“앗, 실례했습니다.”
이안은 대원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벽면의 배지를 쳐다봤다. 사무실 벽을 꽉 채우고 있다. 어림잡아 수백 개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역대 황궁친위대원들을 기리는 것입니다. 친위대는 모두 이리 배지를 달고 있는데, 죽음을 각오해야 할 순간과 맞닥뜨리면, 이리 흔적을 남기고자 떼어 내지요.”
“…대단합니다.”
이안은 넋 놓고 수백 개의 이름을 눈으로 훑었다. 이 모든 이름이 황제와 황궁을 위해 제 목숨 바친 자들이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의가 몰려왔다.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는 것.’
이안은 어쩐지 갑작스레 어머니가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당신 역시 자신을 위해 죽은 것이니까. 잠시 침묵하던 이안은 무심코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어찌 그럴 수 있지요?”
헤르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이의 질문은 쉬이 답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조금 고민한 끝에 그가 답했다.
“저희는 모두 바리엘 제국과 황제 폐하를 소중히 여기고 있으니까요.”
소중히 여기는 것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습니다.
헤르치의 설명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제 손을 꽉 쥐었다. 어머니도 나를 소중히 여기어 그리하신 거구나.
“아, 여기.”
헤르치가 이것 좀 보라며 한 배지를 가리켰다.
“이분이 자크 가문의 선조이십니다.”
이안은 고개를 가까이 들어 이름을 읽었다.
“…세드릭 자크.”
“마검사로서의 재능만을 평한다면, 역사를 통틀어 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셨지요. 평민 출신이지만 무수한 전공으로 작위를 수여받아 이리 가문을 세우셨습니다.”
세드릭 자크. 그 이름을 중심으로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이름들을 이안은 쭉 확인했다.
‘제이럿, 바르사베…….’
“이분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저희 자크 가문에는 이분들의 이름을 계승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제 딸아이도 바르사베라 지었지요.”
이안은 이들 모두가 진 베로시온의 시대에 살았던 인물임을 알아채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
그러다 문득, 이안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추었다. 아이는 조심스레 배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베릭.”
어쩐지 울림이 깊은 이름이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자꾸만 되뇌게 되는 이름. 이상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계속해서 솟아나니, 답답하여 힘들었다.
“그분도 대단한 분이었지요. 여러모로.”
“여러모로라 하시면?”
“세드릭 님의 선배이자 스승이셨습니다. 아탄이라는 이름의 이종족 태생이신데,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분이시지요.”
이것 또한 배울 수 있으려나? 이안은 로만드로를 돌아봤다. 어서 도서관으로 가 보고 싶다는 눈빛으로.
“아, 그럼 대충 다 둘러보았으니 이만 나가 볼까요?”
“그러십시오. 이안 도련님은 나중에 백작저로 오십니까?”
헤르치의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님께 도움받은 것이 있어서 인사도 드릴 겸, 어머니의 소식을 전하려 합니다. 당분간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리아, 아, 그러니까 부인의 아드님은 곧 제 아들이자, 부친의 손주시니까요.”
“…감사합니다.”
“제 딸아이와 또래이시니, 친하게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밖으로 안내하지요.”
헤르치는 손수 문을 열어 주며 이안과 로만드로를 배웅했다. 두 사람은 황궁친위대원들에게 인사를 남긴 뒤 도서관으로 향했고, 이내 두 손 가득 책을 들고 나왔다.
“어머, 뭘 저리 많이…….”
해나와 마부가 그 모습을 보고서 화들짝 놀라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참으로 다양한 내용의 책들이다. 우선은 바리엘의 건국 설화 관련한 도서들. 이안은 만족스러운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해나. 황궁 도서관이라서 그런지 책이 정말 많았어!”
“이, 이걸 다 읽으시게요?”
“그래 봤자 바리엘 건국 당시의 이야기인걸.”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익히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해나와 마부는 책들을 마차 뒤에 싣고는 아이를 뒷좌석에 앉혔다.
“그럼, 이제 마법부로 출발합니다!”
“그래, 가지.”
“아이고, 드디어 마법부군요!”
로만드로는 참 긴 여정이었다며 등받이에 기대어 축 늘어졌다.
반면, 이안은 자세를 반듯하게 하여 마차가 가는 방향을 주시했다. 마법부라니, 그 얼마나 위대하고, 설렘 가득한 공간일까? 이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렀다.
* * *
“죽겄다, 죽겄어. 이러다가는 여기 다 죽어요오오!”
“그러니까 마감 잘 좀 지키지 그랬어.”
“뭐야, 너 지금 그 발언? 마법사끼리 연대해야지!”
“책상 위에 도장 보신 분?”
“아니 시이바아! 왜 자꾸 문서 작성을 이따위로 하는데! 나랑 해보자는 거지? 엉?!”
콰앙! 쿵!
이안은 멀리서 들리는 소란에 우뚝 멈추고 말았다. 마법부엔 아직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어찌 고함 소리가 들린단 말인가? 내용은 또 왜 저러고? 기대감에 부풀었던 이안의 표정이 조금씩 식어 갔다.
“계단 오르시지요. 이안 님.”
“그, 로만드로. 지금 와도 되는 것 맞습니까?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요.”
“예? 평소에 비하면 조용한데요? 괜찮으니 이쪽으로.”
이게 조용한 거라고? 이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로만드로를 따라 걸었다. 로만드로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곳이 마법부 본관입니다. 다른 건물과 달리 층수가 명확하지 않다는 게 특징이지요.”
“몇 층인지 모른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마법이란 신의 권능이자 세계의 신비, 그 원천을 다루다 보니 뭐든 명확하지 않은 것이 바로 마법부의 특징입니다. 아, 그래도 저건 예외지요.”
로만드로가 우측을 가리켰다. 비교적 새 건물로 보이는 작은 별관이다.
“마법부 별채입니다. 각종 자료와 재료들을 보관하는 곳이지요.”
“예에.”
이안은 마법부 별채를 슥 둘러보다가, 어느새 계단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드넓은 로비. 여기저기 널브러진 마법사들과 바삐 뛰어다니는 직원들로 혼잡했다.
“엣헴! 로만드로, 복귀했습니다!”
한껏 목청 높여 소리쳤지만, 그 누구도 주목하는 자가 없다. 이에 로만드로가 뻘쭘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이안 하델도 왔는뎅.”
우뚝.
동시에 멈칫거리며 이안을 돌아보는 마법사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로만드로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이안이 긴장하여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마법사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 뭐야. 왜 이리 일찍 왔어요?”
“이것도 일찍인가?”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해요.”
찬바람 쌩 날리며 지나가는 마법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역시 만만치 않겠구나. 잘 해내야겠어.
타앗!
한편, 마법사들 역시 눈을 치켜세우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는데, 이는 요동치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이를 보고서 사무실 안쪽에 있던 마법사들이 다가와 물었다.
“이안 하델 왔다고?”
“어. 로비에.”
“어때?”
“어떻긴? 뭐, 걍 어린애지…….”
최초의 귀족 마법사 어쩌고저쩌고인 어린애라는데…….
‘조, 존나 귀엽잖아아앗!’
마법사들은 차분함을 유지하며 속으로 고함을 내질러 댔다. 마법사 체면이 있지, 침 흘리며 소란을 피울 수는 없지 않은가? 다들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혼자 유난 떨 수도 없고!
“크흠.”
아직은 표현에 서툰 자들이다. 마법사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헛기침을 해 댔고,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