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8
제88화. 구사일생
마리브는 갑작스러운 게일의 방문에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 그저 의연하면서도 영 반갑지 않은 반응일 뿐이다.
“무슨 일이지? 길을 잘못 들었을 리는 없고.”
“어느 천치가 시종한테 기척을 알리라 하고 잘못 든답니까?”
서류에 시선을 떼지 않던 마리브가, 그제야 고개를 쳐들었다. 언제나처럼 게일의 푸른 눈동자가 짐승처럼 빛나고 있었다. 뒤에 서서 게일의 입장을 알리던 시종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바쁘니 본론만 말하거라.”
“이안이 몰린 경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셨습니까?”
“그것참 재미있는 말이구나. 이안이 어찌할지,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게일은 허락도 없이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누웠다. 그리고 한껏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제 이복형제를 노려봤다.
“형님이 그 천한 소생의 것을 밀어주기로 한 것은 말단 서기까지 눈치채고 있습니다. 재미없게 모른 척하지는 마시죠.”
그렇지 않고선 이안에게 영주 자리를 던져줄 리가 없지 않나. 그에게 줄 대기 위해 알랑방귀를 뀌어대는 자가 수십, 수백이었다. 그런 것들을 밀어내고 얼굴도 본 적 없는 녀석에게 작위라니.
“그래서?”
“그놈이 중앙으로 올라올 때, 몰린과 그 일행을 온전히 동행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말이 꽤 거칠구나. 내 귀에는 협박처럼 들리는걸?”
“그럴 리가요. 형님이 그렇게 듣고 싶은 모양이겠죠. 이안이 작위임명식을 지내면 바로 마법부로 귀속이 될 겁니다. 그게 뭘 뜻하는지 아실 텐데요.”
“아아. 알지. 네 애인 웨슬리 치하에 들어간다는 뜻 아닌가?”
몰린과 일행이 죽어서 올라오면, 이안 역시 쥐도 새도 모르게 그리될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마리브가 이안을 온전히 제 사람이라 인식하지 않으면 전혀 쓸모없는 경고였지만 말이다.
마리브는 안경을 벗으며 콧잔등을 가볍게 눌렀다. 그리고 한껏 재밌다는 웃음을 머금었다.
“좀 놀랍네. 게일 네가 몰린과 일행을 그토록 챙긴다니. 솔직히 별로 생각이 없었는데, 나도 흥미가 생기는구나.”
죽여야겠다, 마리브는 말함과 동시에 그리 결정했다. 사실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집무가 바쁜 것도 있고, 몰린과 일행이 황궁에서 그리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지만 게일이 저렇게 나온다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나.
“접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째서?”
“방금 아버지의 궁에 다녀오는 길이거든요.”
게일은 말머리를 돌려 황제의 궁을 먼저 들린 참이었다. 아버지라는 그 이름. 마리브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언제나, 예외 없이 황제와 게일이 만나면 마리브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유쾌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바로 지금처럼.’
“신년회에 대법관 임명 논의가 있는 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당연하다. 마법부와 행정부 일부가 게일의 주축이었다면, 사법부와 입법부가 마리브의 뒤를 받쳐주고 있었다. 대법관이라 하면 사법부의 수장이자, 황궁에서 황족을 제외, 네 번째 권위에 달하는 자리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마법부에서 이번에 개발한 물약 목록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실담물약이라 하여, 집시들에게 주로 보이는 능력을 추출하여 만든 것인데요. 그걸 마시면 진실만을 말하게 해준답니다.”
여태껏 앉아있던 마리브가 결국 일어서고 말았다.
“게일, 네 이놈…….”
“시범으로 대법관 청문회 때 사용하면 어떨지 여쭤보니, 그것참 좋다 하셨습니다. 뱀의 혀로 거짓을 나불거리는 것들이 참 많으니, 신의의 맹세와 선서를 읽어내릴 때 볼만하겠더라고요.”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걸 만드는 부서가 바로 마법부라는데 있었다. 진실을 말하게 한다고 해놓고 거짓만 말하게 할지, 아니면 제조자의 의지대로 선언하게 될지 누가 안단 말인가?
이상적으로 보면 제국에 꼭 필요한 물약이지만, 시기상조다. 적어도 마법부에 불순한 의도를 싹 걷어내고서 진행하는 게 확실했다.
“헤일롯 경을 대법관으로 점찍어둔 모양인데, 그렇게 하고 싶다면 신년회에 몰린과 일행을 참석시키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인재를 찾아봐야 할 거예요.”
“게일. 네놈이 하는 짓이 바로 제국을 후퇴시키고 있다. 정녕 그걸 모르겠는가?”
“네. 모르겠는데요. 불은 위험하지만, 쓰임새로 따지면 꼭 필요하지요. 실담물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초반에는 혼란이 많겠지만, 시기가 지나면 그 가치가 확실히 굳어질 겁니다. 아마, 혼란의 시작에는 헤일롯 경이 서 있겠군요.”
게일이 입꼬리를 쓰윽 올리자, 마리브는 손에 잡힌 것들을 죄다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다른 도발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마법부’가 끼어있다는 것이다. 워낙 독보적이고 독립적인 부서다 보니, 그들을 견제할 만한 수단이 없었다.
‘물약을 쓰레기처럼 만들어도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거지. 젠장. 게일 이 새끼, 진짜 사사건건…….’
마리브와 게일의 표정은 언제나 반비례였다. 한쪽이 웃으면 한쪽의 인상이 구겨지기 마련이다. 마리브가 침착함을 유지하며 한숨을 삼켰다.
“그게 통과가 될 것 같으냐?”
“몇몇 장관들은 반발이 좀 심하겠죠. 이런저런 이유로.”
마리브처럼 본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놈도 있을 거고, 아니면 시커먼 속내를 들키기 싫어서 반대하는 놈도 있을 터다.
“하지만 사법부 견제에 관한 전반적인 결정은 행정부에서 내리게 될 겁니다. 아버지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인정하기 싫지만, 황제의 마음은 언제나 마리브보다 게일에게 치우친 상태였다. 어미 때부터 이어온 사랑의 불균형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웃기는군. 그깟 물약, 처먹으면 제일 곤란할 게 네놈 아닌가?”
“저요? 음.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전 형님이 더 난감하실 거라 짐작했는데.”
게일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마리브는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일단 마법부 수장인 웨슬리를 끼고 있으니 당연한 자신감이기도 했다.
“아무튼, 생각 잘하길 바랍니다.”
“선택지를 주는 척 그만하지? 몰린을 죽이든 죽이지 않든, 어쨌거나 청문회에서 헤일롯은 의도가 잔뜩 담긴 실담물약을 먹어야 할 거 아니까.”
그럴 거면, 그냥 몰린을 죽이는 게 낫겠다. 물약 관련한 건은 시간이 조금 있으니 최대한 방법을 찾아보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게일은 외투를 걸치며 피식 웃었다.
“이래서 형님과 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뭐?”
“형님이라면 그렇게 하겠지요. 헤일롯이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와 관계없이, 하고자 한다면 하실 겁니다.”
헤일롯은 보기 드물 정도로 업무 능력 및 대외적인 평판과 업적이 훌륭한 자였다. 그런 자를 보복용으로 꺾어버리는 건 영 수지타산에 맞지 않았다. 바리엘의 미래를 염두에 뒀을 때 말이다.
“전 형님의 그런 사고방식이 영 마음에 안 듭니다. 타고날 때부터 다 주어져서 그런가, 아까운 줄 모르잖아요. 사람도, 뭐도.”
“닥쳐라! 네가 뭘 안다고!”
게일의 말에 마리브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태어났을 때부터 다 주어졌다고? 허튼 개소리도 작작 해야 들어주지, 저놈은 뚫린 입이라고…….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부디 비보가 날아오지 않기를.”
콰앙.
게일은 그대로 마리브의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동시에 보좌관이 눈치를 보며 안으로 들어섰는데, 마리브는 머리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됐네.”
게일의 행동으로 보아, 몰린이 죽으면 추가 조사단도 파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리브는 어금니를 바득거리며 지시했다.
“당장 총회의를 소집해.”
“네. 알겠습니다.”
보좌관은 변경에서 올라온 서신을 책상 구석에 놓고서 뒤돌아 나갔다. 로만드로에게 꼬박꼬박 올라오는 보고서 더미였다. 몰린의 처분을 묻는 부분이 반복되어 올라왔지만, 마리브는 ‘보류’라는 답신밖에 쓸 수가 없었다.
‘젠장.’
마리브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게일의 목에 검을 쑤셔 넣고 싶은 기분이다.
* * *
“왜. 몰린이 계속 신경 쓰이나? 지하에만 있으니 나는 가끔 있는 것도 깜빡깜빡하던데.”
로만드로의 말에 이안은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행정관의 처분 하나 정하지 못할 상황이 무엇인지 가늠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게일 측에서 어떤 공작이 들어왔으니 보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 같은데, 의외군. 다른 말로 한다면 게일이 몰린을 살리기 위해 손 쓰고 있다는 말 아닌가?’
몰린의 중요도가 그 정도였나? 잘 모르겠다. 브라츠 담당이긴 했으나, 지금 보면 행정부에서도 밀려난 처지인 것 같고, 충성심은 뛰어나나 전반적인 업무 수행에서는 너무 노쇠하여 제약이 많았다.
몰린에게 숨겨진 가치가 있든지, 아니면 게일이 제 식구 하나만은 제대로 챙기는 성격이든지, 그것도 아니면…….
‘브라츠에 있나?’
많고 많은 변경 중 브라츠여야만 하는 이유. 이안은 문득 간과하고 있던 걸 깨달았다. 다른 변경에도 병력 배치 거점을 위해 물밑 작업을 하고 있으리라 어림잡아 짐작한 것. 그런데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메렐로프 쪽은 반응이 없는 것 같고.’
중앙에서 온 손님이라고는 로만드로가 오랜만이었던 눈치였다. 이안이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어느덧 리엔 부인이 있는 응접실에 당도했다.
“부인?”
“아, 일은 끝났나요?”
그녀는 소파에 몸을 반쯤 눕히고 있었는데, 지루하다 못해 좀이 쑤신다는 표정이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는 게, 자세 때문인지 아니면 백작의 짓인지 모르겠다.
“아니요. 아직 옮기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다 날 새겠어요.”
“원하신다면 영지 구경이라도 시켜드리죠.”
“그랬다간 또 우리 부군께서 개지랄할 것 같으니,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부인은 손톱에 바람을 후, 불며 앞으로의 멋진 계획을 중얼거렸다.
“오늘부터 날짜를 세는 게 좋을 거예요. 앞으로 한 달 후면, 기대하던 것을 만날 수 있으니까.”
“한 달 후?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아, 여보.”
리엔 부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화사하게 웃으며 남편을 맞이했다.
메렐로프 백작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이안과 부인을 번갈아 훑어봤다. 아내 또래의 젊은 남자가 신경 쓰일뿐더러, 이안은 객관적으로 미남 축에 속했다. 메렐로프 백작의 신경이 곤두서기에 딱 알맞은 조건이라는 뜻이다.
“한 달 후면 굴라 재배가 가능하잖아요. 그 말 하고 있었어요. 끝났나요? 나 진짜 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어요.”
한 달 후. 분명 환각용 수면제의 부작용이 올라오는 시간이었다. 백작이 수면 중에 숨이 끊어지는 날. 이안은 부인의 의중을 알아차렸지만,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보니까 아직 먼 것 같은데요.”
“아, 이안 경. 다른 게 아니라 지금 메렐로프에 있는 하이만 뱅크에서 연락이 왔거든.”
“네. 말씀하십시오.”
“최근에 타 지역에서 도적이 들끓는 데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겨울이 되면서 산맥을 넘기에 매우 힘든 상황이라 하네.”
“그런데요?”
어어? 이거 밑밥 까는 게 영 수상쩍다. 로만드로가 콧김을 씩씩거리며 금방이라도 면박 줄 자세를 잡았다.
“수표 용지가 다 떨어진 터라 하루만 대금 처리 일자를 미뤄줬으면 하네만.”
“아니, 백작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계약서 잉크도 안 말랐는데 말이죠.”
“그러면 뭐, 우리 영지로 와서 나머지 금화를 마차로 옮길 터인가?”
나머지 금화 2,500개. 1,000개도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2,500개를 다시 옮기라니. 로만드로가 움찔하자, 이안이 앞서 나섰다.
“하지만 백작님. 이건 명백히 계약 위반 사항입니다. 저희는 대금을 수표로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는 계약서에도 명시하지 않았습니까? 합의된 방식으로 나머지를 지불하겠노라고요.”
“크흠. 그러니까, 내가 양해를 구하고 있지 않은가.”
“밑지는 거래는 하고 싶지 않은데요.”
이안의 말에 메렐로프 백작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냥 스리슬쩍 넘어가려 했는데, 이안이 생각보다 강경하게 나온 탓이다. 그는 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인. 그러지 말고 그 몸에 건 것 좀 담보로 넣어두게나. 목걸이, 귀걸이, 반지. 대충 저 정도면 되겠지.”
느닷없는 백작의 명령에 부인은 헛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어쩌겠나? 까라면 까야지. 그녀는 몸에 걸치고 있던 장신구를 하나씩 빼서 테이블에 올려놨다.
‘어?’
그리고 그때, 이안의 시선을 잡아끄는 반지. 부인의 왼쪽 검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였는데… 보석이 굉장히 낯익었다.
‘저거, 호박인가? 아니면…….’
이안의 화분에서 발견했던 목걸이와 같은 보석?
그는 바로 가까이 다가가 반지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