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83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83화(883/935)
제883화. 고단한 하루
자크 백작은 두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작고 귀여운 아이들의 미래가 곧 바리엘의 미래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바르사베.”
“예, 할아버지.”
“이안 하델은 최연소이자 귀족 최초의 마법사이다. 황실의 방계를 잇는 자이기도 하지. 예의를 갖추고 성심성의껏 대하도록 하거라.”
“마법사요? 얘가요?”
바르사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이안과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디서 흘려듣듯 새로운 마법사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게 설마 이런 꼬맹이였다니.
게다가 최연소? 최초? 황실 방계? 뭐 이런 게 다 있어? 바르사베가 경악하며 입을 살짝 벌리자, 이안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안 하델.”
“예, 백작님.”
“우리 바르사베는 일찍이 마검사의 재능을 개화하여 수련 중이다. 황궁친위대와 마법부의 업무 협조가 긴밀하다는 건 알고 있겠지?”
“헤르치 대장님에게 들었습니다.”
“아아, 그래. 헤르치를 만났구나.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황궁에서 함께할 터이니 사이좋게, 서로 모범이 되는 관계가 되길 바란다.”
“물론입니다. 누나, 앞으로 많이 알려 주세요.”
“누, 누님이라고 불러!”
“예, 누님.”
굉장한 수식어와 달리 이안은 꽤 고분고분한 성격인 것 같다. 바르사베가 조금 경계가 풀린 눈빛으로 아이를 살피자, 이안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혹시 바르사베 누님도 중앙 에너제스 아카데미에 다니고 계신가요?”
“맞아.”
“저도 곧 입학합니다.”
“뭐? 네가?”
아카데미에 마법생도는 없는 걸로 아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마력운용자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바로 마법부행이지 않나. 이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례없는 입학생이 될 것이다.
“…시끄러워지겠네.”
“예?”
“언제 와?”
“글쎄요. 당장 처리할 일이 많아서요.”
상속과 세금 문제 말이다. 자크 백작은 이안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권했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있느냐? 없다면 우리 쪽에서 사람을 붙여 줄 수 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마법부에서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마법부에서?”
“예, 정확히는 로만드로가요.”
“아아. 로만드로.”
자크 백작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자라면 믿을 만하지. 신의가 있는 자니까. 그는 잠시 이안의 안색을 살피더니 슬쩍 떠봤다.
“크로니 경은?”
크로니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이안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였는데 말이다.
백작은 아이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챘고, 바르사베는 의아하다는 듯 이안과 제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크로니 경은 어찌하여 물으십니까?”
“당시 일이 일어났을 때 저택에 있었다고 들었다. 멀지만 그래도 피 섞인 관계이니 상속에 관해서는 도움을 줄 만한 자지. 설마 아무런 말도 없었던 게냐?”
“도움을 주신다고 하였으나, 제가 거절했습니다.”
“어째서?”
이안은 고민했다. 어째서냐고? 그자가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더 나아가 하델 전체를 집어삼키려 했으니까.
하지만 아까와 같이 이걸 온전히 밝힐 수는 없었다. 이안은 아직 자크 백작이 누군지 알지 못했기에.
“마법부에서 먼저 도움을 준다 하셔서요. 사실 크로니 경은 교류가 거의 없었던 분인지라 저에게는 마법부나 그쪽이나 남인 것은 다름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제가 몸담을 곳이자 보다 공신력 있는 마법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 판단했습니다.”
이안은 수십 번씩 머릿속으로 되뇌었던 변명을 차분히 늘어놓았다.
“그리하면 언젠가 제가 마법부에 은혜를 갚기도 쉬울 테니까요.”
적당한 변명, 적당한 이유. 자크 백작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더 캐물었다가는 반감을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말했듯 앞으로 무엇이든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하려무나. 내게는 은혜 갚지 않아도 된단다.”
자크 백작이 희미하게 웃자, 바르사베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엄한 할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리 흐물흐물 부드러운 할아버지도 아니었다. 오늘 처음 본 아이에게 너무 친절한 것 아닌가?
“감사합니다.”
“그래. 오늘은 일단 쉬도록 하거라. 많은 일이 있어서 피곤할 것이다. 같이 온 일행들은 먼저 침실로 올려 보냈으니 염려 말고. 바르사베.”
“예, 할아버지.”
“네가 이안을 안내해 주렴.”
귀찮지만 별수 있나. 아마 이안이랑 친하게 지내라는 할아버지의 의도 같았다. 바르사베가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하자, 이안은 자크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남기고서 응접실을 떠났다.
끼이익.
문이 닫히고, 자크 백작은 반쯤 식어 버린 찻물을 홀짝이며 자신의 제자, 제리아를 떠올렸다. 이안이 태어나기 전에 보았으니 적어도 5년 이상 못 만난 터라 얼굴이 가물가물했었는데-
“제리아. 아들을 참 잘 두었구나.”
이안을 보니 기억이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크로니’에 반응했던 이안을 상기했다. 아무래도 아이 역시 눈치챈 듯싶다.
‘부모의 죽음에 크로니가 관계되어 있다는 걸.’
마법사의 재능을 보이긴 했지만, 이제 막 중앙으로 올라온 다섯 살 난 아이가 과연 크로니와 대적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 불가할 터였다.
자크 백작은 백작저를 가로지르는 이안과 바르사베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제리아. 네 복수는 내가 해 주마. 네 아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겠어. 그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
아이는 아이답게. 너무 어린 시절부터 복수심에 매몰되어 찬란한 시절을 얼룩지게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복수는 선택하는 것이지, 운명처럼 얽혀 들어서는 아니 되는 것.’
이것이 자크의 지론이었다. 삶과 복수를 한데 엮어 얻은 원수의 머리통은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걸, 언젠가는 깨닫게 될 테니까.
똑똑.
“백작님.”
“돌아왔군, 알렉서.”
끼이익.
집사 알렉서였다. 하델가의 비극을 뒷수습하기 위해 온리홀로 파견했었던. 그는 고개를 숙이며 들어와 이내 그의 앞에 보고서를 내밀었다.
“예상대로였습니다. 도적 떼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습니다. 다만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는 못한 터라-”
“크로니의 반응은?”
“이안 도련님이 중앙으로 올라가신 후, 곧바로 하델로 돌아갔습니다.”
“노골적이군. 꼭 보란 듯이 말이지. 사람을 붙여서 빈틈없이 감시해라.”
“예, 백작님.”
투욱.
크로니는 현재 제국방위부 소속 장교. 대대로 마검사를 배출하면서 황궁친위대와 인연이 깊어진 자크 백작가와 제국방위부의 관계가 미묘한 것은 설명할 필요 없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황궁친위대와 제국방위부-
황제의 안위를 책임지는 이 두 무력 집단은, 겉으로는 우호적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해 왔다.
‘매섭단 말이지…….’
장관도 부장관도 아닌 일개 장교라 할 수 있지만, 자크는 크로니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다는 걸 인지했다. 분명히 조만간 황궁 내에서 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황제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황궁친위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치겠지.
‘그 전에 정리하는 게 좋겠다.’
더 커지기 전에.
달그락.
‘크로니도 같은 생각을 하려나.’
이안 하델. 너무도 어린 나이에 굉장한 힘을 쥐었다. 크로니가 하델 영주 내외에게 마수를 뻗친 게 사실이라면, 그는 이안이 더 성장하기 전 어떤 방식으로든 처치하려는 수작임이 틀림없다.
자크 백작은 찻잔을 들어 보이며 집사에게 지시했다.
“당분간 이안 하델에게 그림자를 붙여 두어라.”
“예, 백작님.”
가문 내 최고의 기사라 평가받는 그림자가 이안을 지킨다면, 한시름 덜 수 있겠지. 자크 백작은 일단락하자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 * *
“여기가 중앙 복도. 오른쪽으로 가면 연회장과 시종들이 사용하는 별관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네가 머물 손님방이 나와. 2층 계단을 통하면 훈련장으로 바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있지.”
바르사베는 자신을 쫄래쫄래 따라오는 이안에게 친절히 저택 구조를 알려 줬다. 워낙에 거대하고 복잡한지라 한 번 설명해서는 못 알아먹을 게 분명했지만, 일단은 손님이지 않나? 친하게 지내라는 할아버지의 당부도 있었고.
바르사베가 고개를 휙 돌리며 물었다.
“저기가 어디라고?”
그 물음에 이안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저쪽은 5층까지 있는 부속 별관인데 창고로 사용하고 있고, 오래되어 녹슨 병장기가 많으니 조심하라고 하셨지요. 안 들어가는 게 상책이라는 말도 하셨고요, 누님.”
“…잘 듣고 있었네.”
“그럼요.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딱 한 번 말했는데 꽤나 잘 외우잖아? 바르사베는 조금 놀란 눈치로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들은 유독 머리가 좋다는 ‘주장’이 있다. 바르사베는 절대 믿지 않았지만 말이다.
‘저번에 마법부 사람들 한 번 보니까 다들 이상하더만. 그리고 뭐? 마법사는 지능이 높고, 마검사는 그 반대에다가 성격도 이상하다고? 흥, 어디서 그런 낭설이 아직도 떠도는 거람? 그런 마검사는 내가 본 적이 없는데.’
바르사베가 본 아버지와 그의 동료들은 모두 철두철미하고 현명했으며, 아주 배울 게 많은 인자한 분들이었다. 이상하다면 마법사 쪽이 훨씬 이상했지. 하나씩 따지고 보면 말이다.
“누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이안이 슬쩍 다가와 묻자, 바르사베는 고개를 털며 말문을 돌렸다.
“아카데미 입학하기 전에 준비할 게 많아.”
“아마 로만드로가 도와줄 겁니다.”
“장난해? 준비물 말고.”
“그럼요?”
바르사베는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더니, 이내 아주 재빠른 손놀림으로 이안의 미간 사이를 노렸다.
쉬이익!
“……!”
굉장히 날랜 공격이다. 손날이 아슬아슬하게 이안의 미간에 닿자, 바르사베가 덧붙였다.
“아카데미는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라고.”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요?”
“뭐, 그것도 맞긴 한데…. 아무튼 너, 이대로 입학했다가는 바로 뚜드려 맞고 끝나겠다. 아카데미에 얼마나 별종이 많은지 알아?”
“어… 로만드로가 말하기를 그럴 리 없을 거라 하던데요.”
이안이 손바닥을 펼쳤다 오므렸다. 제 손에서 터졌던 번갯불의 촉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아저씨가 멀 알아?”
“아저씨? 저 말입니까, 아가씨?”
“꺄아아아아!”
로만드로가 슬쩍 고개를 내밀자 바르사베가 기겁하며 복도 끝으로 도망쳤다. 로만드로는 조금 상처받은 눈으로 바르사베를 쳐다봤다.
“제가 아직 아저씨 나이는 아닌데 말이지요.”
“돼, 됐고요! 이안 하델, 나랑 훈련장이나 가자! 옷 갈아입고 나와! 알겠어?”
바르사베는 그리 외치고는 모퉁이를 돌아 달아났다.
로만드로는 이안에게 어서 오라며 문을 열어 주었고, 아이는 터덜터덜 들어와 소파에 쓰러졌다. 자크 백작까지 다 만나고 나니 긴장이 확 풀린 것이다.
“훈련장 가십니까, 도련님?”
“웅…. 가 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미 해나는 뻗어서 쓰러졌다. 도적 떼를 만난 이후로 너무도 긴 하루였지 않나. 이안도 소파에 얼굴을 비비며 꾸벅꾸벅 졸았고, 로만드로는 그것도 모른 채 옷 가방을 뒤적거렸다.
“훈련복이라, 음. 아, 이게 좋겠군요. 이안 님-”
이거 입어 보실래요? 로만드로가 웃으며 뒤돌았으나, 아이는 곯아떨어진 뒤였다. 엎어진 자세 그대로.
“오잉?”
어떻게 저렇게 순식간에 잠들지? 로만드로는 이안을 안아 침대에 눕혔고, 이내 손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 주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로만드로의 인사에도 이안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코오- 소리만 내었다.
침실 불이 꺼졌다. 로만드로는 조심스레 침실을 나섰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합! 하아압! 이안 하데에엘-! 왜 안 와아-!”
저택 뒤편 훈련장에서 들려오는 기합 소리. 쩌렁쩌렁한 것이 아주 옹골찼다. 분명 바르사베겠지.
“바리엘의 미래가 밝다. 응, 밝아.”
로만드로는 몸을 돌리며 콧수염을 팅- 잡아당겼다. 아저씨라니… 다 요것 때문인 것 같다고, 확 밀어 버릴까 고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