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84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84화(884/935)
제884화. 숨겨진 목적
“…물려라.”
황제는 반도 못 먹은 음식을 밀었다.
식사를 제대로 한 게 언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다. 시종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으나, 황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고개 돌렸다.
“안건은?”
“올라온 것이 없습니다.”
“올라온 것이 없다?”
그게 말이나 되는가? 황제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시종을 돌아봤다.
대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국정을 이전처럼 잘 돌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나 침대 위에서 황제 인장을 찍었고, 지금껏 문제가 없었다.
“폐하의 건강을 염려하여 대회의에서 모두 처리한 듯싶습니다.”
“누가 내 몸을 걱정해 달라 하였는가? 이런, 괘씸한!”
황제가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침대에서 내려왔으나, 몇 발 딛지 못하고 크게 휘청거렸다.
시종 서넛이 후다닥 달려와 그의 팔과 허리를 붙잡았다. 그는 다시금 힘없이 침대에 누웠고, 개탄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가서 오늘 자 대회의록을 가져와라.”
“예, 폐하.”
손아귀에 쥔 것들이 조금씩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황실의 권위와 권력 모두, 어찌 붙잡을 틈도 없이.
‘하지만 이제 괜찮아. 때가 되었다.’
황제는 식은땀을 훔치며 아까 보았던 이안 하델을 떠올렸다. 어릴 적부터 전해 들었던 묘사와 놀라울 정도로 똑 닮아 있는 아이였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수없이 들었던 전언을 되새겼다.
“언젠가 백금발에 벽안을 지닌 소년이 황궁으로 올 것이다. 최초의 귀족 마법사라는 칭호를 달고서 말이지. 그 소년은 신께서 내려 주신 바리엘의 홍복이니, 진정 너희가 황실의 핏줄을 잇는 자라면 마음 깊이 존중하고 아끼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자 역시 황실을 도와 바리엘을 번영케 할 것이다.”
신탁 같은 당부의 시작은 진 베로시온, 할아버지 대부터다. 하여 이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대체 어디서 들은 것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소년을 잘 살펴라. 그의 곁에 불손한 자가 있다면 필히 경계하라. 그자는 소년만이 아니라 바리엘을 집어삼키는 자다.”
황제는 보고서 종이를 힘겹게 넘겼다. 삼대장 헤르치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이었다. 부모가 다 죽은 터라 주위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아이.
그나마 눈에 띄는 대목이라 한다면…….
‘크로니와는 삼촌 관계라고.’
자크 백작과 같이 황제 역시 크로니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장관의 등 뒤에 숨어 있는 터라 쳐 낼 명분이 없다는 게다.
그를 잡아내려면 장관을 먼저 잘라 내는 수밖에 없는데, 침소에 갇힌 신세인 황제가 제국방위부 장관과 힘겨루기 하기에는 숨 가쁜 것이 사실이다.
‘장관을 갈아 치운다 해도 그다음 인물 역시 제국방위부 출신이니까. 괜히 자극만 할 수 있다.’
똑똑.
“폐하, 회의록 들이겠습니다.”
“그래. 이쪽으로.”
시종이 회의록 한 뭉치를 가져와 그의 옆에 놓았다.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내용을 천천히 살폈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제국방위부에서 발의한 내용 때문이었다.
“이게-”
황제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헤르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말이지? 헤르치.”
사락.
주인의 부름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헤르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황제가 건넨 회의록을 살피다 멈칫거렸다.
-제국방위부에서 발의한다. 바리엘 북쪽 지역의 경계 강화를 위해 추가로 병사를 파견한다…….
단순히 겉으로만 보았을 때는 문제가 전혀 없어 보였지만, 아니다.
“단순 경계 강화를 위한 목적치고는 병력 수가 과하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 같은가?”
제국방위부는 피를 먹고 자라는 부서다. 지배력을 넓히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한데, 바리엘과 인접한 3국과는 관계가 굳건하여 평화를 유지 중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딱 하나, 바로 북쪽.
“수많은 부족 국가로 쪼개져 있는 탓에 교류가 쉽지 않음을 이용하려는 게다. 병사를 올려서 긴장 상태를 만들면,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전쟁의 불씨를 붙이기 쉬워지지.”
이걸 침대 위 황제가 알고 있는데, 각 부서의 관료들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군사통제권은 제국방위부 장관과 황제의 권한이니, 그 누구도 말을 얹을 수 없음이라.
“제국방위부 장관을 부르겠습니다.”
“아니, 잠깐. 잠깐만.”
황제가 힘겹게 손을 내저었다. 명분이 부족하지 않나. 혼란스러운 북쪽 지역 정비를 위한 병력 파견을, 대체 무슨 명목으로 막아 세운단 말인가? 사사로운 분쟁이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고?
“겁쟁이라고 하겠지. 침대 위에만 누워 있어서 세상을 돌보는 법도 잊어버린 황제라고. 오히려 저쪽에 검을 쥐여 주는 꼴이 될 것이다.”
“폐하. 지나친 우려이십니다.”
“북쪽 지역 소부족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병력 충원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대회의에서도 이를 인정하여 안건이 통과되었어.”
전쟁은 불씨와 같다. 일단 한번 타오르면 닿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몸집을 키워 갈 것이다. 시작은 북쪽의 작은 분쟁일지 몰라도, 그게 어찌 변질되어 바리엘 전체의 운명을 새로이 결정지을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헤르치가 무언가 의심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소부족의 소란 자체가 제국방위부의 간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최근 10년간 급격하게 분쟁 보고가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전쟁을 원하는 제국방위부에서 이를 오히려 부추긴 것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좋게 말해서 ‘부추겼다’라지만, 그 누가 안단 말인가? 돈 쥐여 주고 소란 좀 피우라 사주했을지. 의심이 꼬리를 물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이안 하델의 후견인을 크로니가 자처했다고 했었나?”
“예, 하지만 마법부의 개입으로 무산되었습니다.”
혹시 북쪽 지대에 소란을 사주한 것이 맞았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해야 할 터인데?
제국방위부 장관을 비롯한 요직 관료들은 비자금 운용이 자유롭지 못했다. 공직자의 자산은 황궁에서 정기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올 수 있다면?’
그러니까, 이안 하델을 통해서 말이다.
영지와 광산의 규모는 상당하지만, 하델가, 즉 이안 하델은 대외적으로 제국방위부와 전혀 관련이 없다. 그것을 처분하여 비자금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황궁에서는 전혀 알아챌 길이 없지 않나?
“헤르치, 자세히 조사해 알아보아라. 아무래도 단순한 걱정이 아닐 것 같구나.”
“예, 폐하.”
“제국방위부에서 비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하델 가문을 노렸던 거라면, 이안 하델도 계속해서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현재 이안 하델은 저희 자크 백작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 자부합니다. 외출 시에도 아버지께서 호위를 붙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역시 자크 백작이시군. 언제나 자신보다 한발 먼저 움직이는 자다. 그래서 더더욱 믿을 만하고.
황제는 밀려오는 두통을 이겨 내고자 천천히 베개에 몸을 기댔고, 헤르치는 다시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솨아아아.
창밖으로 부는 바람에 복숭아나무가 크게 흔들렸다.
* * *
“이안 하델 님?”
중앙의 하이만 은행.
이안은 눈앞의 직원을 돌아봤다. 제국에서 제일 큰 지점이라 그런지 이용객도 엄청나고, 이를 처리하는 직원 수도 놀라울 정도다. 이안은 옆으로 맨 가방을 꼭 붙잡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안 하델이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안이 안쪽 사무실로 들어섰다. 로만드로와 해나 역시 마찬가지. 은행 직원이 서류를 작성하자, 펜에 달린 깃털이 시원하게 흔들렸다.
“상속 처리와 세금 납부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혹시 서류는 준비하셨는지요?”
“아아, 여기 있소.”
“후견인이십니까?”
“아니, 정식 후견인은 마법부일세. 나는 권한을 위임받아 일 처리를 대신 해 주는 것이고. 아, 로만드로일세. 여기 신분증.”
“아아, 마법부-”
타닥타닥. 별생각 없이 계산기를 두드려 대던 직원이 눈을 번쩍였다.
“마법부에 들어갔다는 귀족 마법사, 맞으십니까?”
“그렇소만.”
“이런, 영광입니다. 아차, 지금 악수하면 늦었으려나요?”
악수를 청하려던 직원이 아쉽다며 혀를 끌끌 찼다. 이안은 의아하다는 듯 로만드로를 돌아봤고, 그는 별일 아니라며 웃었다.
“보자, 서류는 완벽하군요. 오늘 바로 신청해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직원이 뭔가 이상하다며 안경을 쓰윽 올렸다.
“세금 완납하기엔 돈이 좀 모자랍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안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분명 어머니가 세금에 쓰라고 남겨 준 돈이니, 딱 알맞을 것으로 여겼는데?
직원은 서류를 휙휙 넘기며 설명했다.
“금액 자체는 모자람이 없습니다만, 최근 가압류가 걸려서요. 금화 500닢에 대해서 제한이 걸려 있고요, 신청자는-”
설마.
“크로니 알파트라고 되어 있군요.”
“말도 안 돼.”
“잠시만, 내가 봐도 되겠나?”
“아, 예예. 물론입니다.”
로만드로는 직원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은 다음 찬찬히 내용을 살폈다.
“고소장을 낸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델 영주 내외께서 크로니란 자에게 돈을 빌리셨는데, 그걸 갚지 못했으니 도련님이 대신 갚으라며 통장을 잠시 묶어 둔 것입니다.”
“부모님께서 크로니에게 돈을 빌렸을 리 없습니다!”
“예, 크로니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 저희 쪽에 소명만 해 주시면 바로 가압류를 풀 수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 소명…….”
사실이 아님을 밝히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어떻게? 이리 고소장까지 낸 것으로 보아 크로니 측은 뭔가 자신이 있다는 뜻 아닌가?
해나가 벌떡 일어나며 울분을 터트렸다.
“무슨, 참 나! 저택에 와서 몇 날 며칠 빈대처럼 들러붙어만 있던 주제에! 이안 님, 이럴 거 없고 바로 찾아가서 따져 묻겠습니다.”
“해나, 안 돼!”
해나가 밖으로 달려 나가려 하자, 이안이 그녀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눈빛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평정을 찾으려는 듯 숨결이 차분했다.
“…안 돼.”
“예? 왜요?”
“함정일 수도 있어. 나를 제 발로 찾아오게 하려는.”
크로니의 저택 혹은 함정을 준비해 둔 장소로 부르기 위해 던진 미끼. 그것도 아니라면…….
‘상속을 잠시 미루려는 수작이다.’
이안에게는 걱정하지 말라 하였지만, 로만드로는 이것이 꽤 날카로운 경고임을 알아챘다.
상속이 이루어지면 막대한 세금 납부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곧 재산상의 손해를 의미하지 않겠나. 이안 하델을 노리는 자가 재산을 온전히 보전하려 한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이안 하델을 거치지 않고 재산을 가로채겠다는 뜻.’
금화 500닢…. 이거 일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었다. 로만드로는 바로 황궁으로 들어가 장관에게 현 사안에 대해 논의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재산을 처분해서 현금을 만드는 과정은 복잡하다. 혈연인 크로니가 개입할 틈이 생길 수도.’
잘하면 마법부에서 융통해 줄 수도 있고, 아니면 자크 백작 쪽에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로만드로는 그만 가 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이 일 처리를 먼저 해야 하니-”
“아, 저기.”
서류를 꼼꼼히 읽던 직원이 잠시 기다려 달라며 손을 들었다.
“혹시 황가의 방계인 하델 가문 맞으시지요?”
“그렇소만.”
“이상하다. 왜 미수령 계좌가 있지요?”
“미수령 계좌?”
직원이 창고로 달려가 낡은 종이 뭉치를 들고 왔다. 그러고서 의아하다는 듯 연신 중얼거렸다.
“혹 오래전에 영지 매각한 건이 있습니까?”
“이보시게, 도련님이 그걸 어찌 알겠나?”
“아,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엔로우 가문에서 하델 가문으로 송금한 내역이 있습니다. 내용에는 ‘영지 매각 대금’이라고만 적혀 있어서 무슨 거래인지 자세히는 모르겠군요. 하델 가문에서는 왜 그간 안 찾아가셨지?”
엔로우?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안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는 와중, 로만드로는 고개를 쭉 빼고 물었다.
“그래서, 얼마인가?”
당장 쓸 수 있는 현금 맞지? 직원은 잠시 기다려 달라며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었다.
“일, 십, 백…….”
“100개? 세상에.”
“천 개입니다.”
“……!”
“금화 1,000개.”
놀라 자빠지는 로만드로와 달리, 직원은 어째서 금화 1,000개가 오랫동안 중앙은행에 잠들어 있었던 건지 확인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서류를 확인한 뒤에야 답을 알아냈다.
“아. 본인 수령 방식이었군요. 직접 중앙에 와 받아야 하는 방식인데, 하델 지점과 공유가 안 되었나 봅니다. 요새 왕왕 있는 일입니다…. 근데 엔로우에서 전언이 없었던가요? 세상에, 이렇게 큰돈을 얼마나 썩혀 둔 거람.”
직원의 물음에 이안은 난감한 시선으로 직원을 바라봤다. 나는 엔로우라는 가문을 방금 처음 들었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