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89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89화(889/935)
제889화. 한스라는 짝꿍
“에, 그러니까, 당시 수상의 발언은 상당히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황실의 권위를…….”
<바리엘 역사-기초> 수업이 진행 중인 2동 강의실. 느릿하다 못해 늘어지는 교수의 설명에, 학생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정신을 바짝 차리며 집중하려는 아이들과-
드르렁드르렁…….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기절한 아이들.
곳곳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똑똑.
“예?”
교수가 안경을 바로 세우며 문 쪽을 돌아봤다. 힘차게 드르륵! 열리는 소리에 꾸벅꾸벅 졸던 학생들이 정신을 번뜩 차렸다.
“안녕하십니까.”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백금발의 어린아이가 당당한 자세로 서 있었다. 뒤에는 상급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어색하게 서 있었는데, 눈인사를 건네더니 이내 가 보겠노라 사라졌다.
교수가 안경테를 매만지며 물었다.
“이안 하델?”
“네. 교수님.”
“빈자리에 앉으시게.”
“감사합니다.”
이안이 빈자리를 확인했다. 가만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연신 중얼거리는 아이 옆이다. 앞에서 세 번째 줄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자리만 비어 있다.
“이안 하델? 그 마법사?”
“와, 에너제스 온다더니 진짜였나 봐.”
“내가 말했잖아. 왜 안 믿음?”
“쉿. 들리겠다.”
이안은 자리에 앉은 다음 옆자리를 돌아봤다.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리고는 칠판에 시선이 고정된 아이. 명찰에 적힌 이름은 ‘한스’였다. 이안이 조심스레 속삭였다.
“안녕?”
첫 등교, 첫 수업, 첫 친구다. 조금은 긴장되고 설레는 맘으로 인사를 건넸지만, 되돌아오는 인사는 무미건조했다.
“어, 안녕. 수업 중엔 말 걸지 말아 줄래?”
“아. 미안.”
한편 이안을 본 아이들은 수군수군 떠들어 댔다. 저 애가 바로 그 최초의 마법사 학생이냐면서.
그러든 말든 한스는 아이들을 말없이 노려볼 뿐이다. 공부도 못 하는 것들이 아까처럼 잠이나 자지, 왜 저리 시끄러워? 중도 입학생 처음 보나?
“헉. 한스 눈깔 뜬 거 봐.”
“쉿. 쉬이잇.”
같은 수업 듣는 아이들 모두 한스가 학업에 얼마나 진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떠드는 소리를 용납하지 않는 건 물론, 제 옆에 앉은 아이는 졸아서도 안 된다. 괜히 신경 쓰여 수업에 방해된다는 이유다. 그 때문에 꽉 들어찬 강의실에 한스의 옆자리만 유일하게 비어 있었다.
“…에, 어디까지 했더라?”
“수상의 발언 부분입니다.”
“아, 그래. 그렇지.”
이안은 칠판에 적힌 내용과 한스의 교재를 힐끗 살피곤 책을 펼쳤다.
“당시 진 베로시온 선황은 대마물의 전쟁을 승전으로 이끌었지만, 이에 관하여 공신들과 깊게 갈등하여, 황궁 내에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정세가 이어졌는데…….”
아. 익숙한 이름이다. 이안은 ‘진 베로시온’이라는 이름에 눈을 반짝였다. 철혈의 황제이자, 자신을 크로니로부터 구해 주고 마법부로 인도한 분.
“…특히 금빛의 마법사라고 이르는 ‘미상의 마법사’가 기록 말살형에 처해져 역사에 공백을 남겼는데, 이는 버고스와 클리포포드 그리고 루스웨나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에-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 베로시온은 금빛 마법사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권력을 견고히 하게 되었으며-’”
“교수님.”
한스가 손을 들고서 질문했다.
“미상의 마법사에 대해서 말인데요, 대마물의 전쟁 일등 공신이라 불릴 정도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만, 황궁에서 이를 어찌 제압했습니까?”
“흠. 당시 그는 황궁과의 갈등으로 마법부에서 입지를 완전히 잃었다. 궁지에 몰려 쫓기듯 반역을 일으킨 게지. 그 과정에서 모의한 자들의 실수로 정보가 새어 나갔고, 마법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것이 학자들의 중론이다.”
“어리석었네요.”
한스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자, 가만 듣고 있던 이안이 손을 들었다. 교수가 질문을 허락한다는 듯 턱짓했다.
“그만큼 강한 마법사였다면 누군가와 모의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마법부 출신이니 황궁 경호 체계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 어찌하여 일을 벌여 그리되었단 말인가?
뜻밖의 질문에 한스가 이안을 흘겨봤다. 뭐래? 아무리 강해도 그 많은 마법사들을 혼자서 어떻게 이겨?
“좋은 질문이다, 이안 하델.”
에? 한스는 믿을 수 없다며 교수를 휙 돌아봤다.
“반역 과정에서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여럿 지적되었어. 해서, 진 베로시온 황제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
“…미상의 마법사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당사자만이 알겠지. 황권 강화 목적이 맞으면 그만큼 충신이었을 거라 짐작할 수 있고.”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요?”
마치 이 질문이 나오기만 기다렸다는 듯, 교수가 두 눈을 반짝였다.
“충심이 깊은 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반역조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도 바로 여기 있다.”
“그게 뭔가요?”
“기록말살형 이후, 가이아 각지에서 미상의 마법사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발견되었거든.”
이 말인즉, 죽지 않고 가이아 전역을 떠돌았다는 뜻. 실제 반역을 마음에 품었다면 즉시 처형당했을 터인데 말이다.
한스는 저게 뭔 말인가 싶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에너제스에 들어오기 전, 이미 한 차례 선행 학습을 하고 들어온 차다. 하지만 저런 내용은 어디서도 배운 적 없다. 교수가 말하는 내용은, 필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소수의 주장에 불과하리라.
“물론 진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논란 중이다. 기록말살형이 이래서 문제인 거지. 후손들에게 너무도 많은 혼란을 남겨.”
쯧. 교수는 안경을 고쳐 쓰며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방금 소개한 내용은 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것이 아닌 소수 학파의 주장이다. 가볍게 흘려듣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
교수는 말끝을 흐리며 책장을 넘겼고, 이안은 펜대를 붙잡았다. 사각사각, 필기하는 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째깍.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 다섯 시간째 연강이었다. 교수가 교탁을 정리하고 나가자, 이안과 한스를 제외한 대부분이 책상에 철퍼덕 쓰러지며 신음을 흘렸다.
재밌는 과목이 얼마나 많은데, 신입생이라고 이런 고문 같은 것만 듣고 있다니.
“저기, 이안 하델?”
“응.”
필기를 정리하던 이안이 고개 들어 친구들을 쳐다봤다. 다들 쭈뼛거리는 것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빤히 쳐다보자 그중 하나가 말을 꺼냈다.
“저, 우리랑 같이 점심 안 먹을래?”
“아.”
마침 배고프던 참이다. 이안은 옆자리의 한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 한스, 너도 같이-”
하지만 한스는 그럴 틈도 주지 않고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중얼중얼, 무언가를 끊임없이 외며 홀로 강의실을 떠났다.
“쟤는 신경 쓰지 마. 원래 이상한 애니까.”
“학구열이 대단한가 보다.”
“장학금 때문에 그래. 사정이 좀 안 좋나 봐.”
“아무리 그래도 너무 예민해. 저번에 갑자기 내 뒤통수를 필통으로 내려쳤다니까?”
“그건 네가 코를 너무 골아서 그런 거고.”
“아니, 그래도!”
이안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한스가 사라진 쪽을 연신 힐끔거렸다. 수업 시간 내내 미친 듯이 집중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그런가? 자꾸만 눈길이 갔다.
이안이 도시락을 꺼내자,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귀족이 먹는 건 뭐가 다른가 싶어서.
“오오오!”
“고기밖에 없잖아?”
“해나가 나눠 먹으라고 많이 싸 줬어.”
“오오옷!”
자신의 도시락에 대고 무자비하게 포크질을 해 대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이안은 창문 밖을 힐끔거렸다. 한스가 그사이 밖으로 나가 교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쪽은 정문인데?
끼이익.
한스는 정문 밖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조용한 주위. 경비원 역시 한스의 등장이 익숙한지 아무렇지 않게 근무 일지를 작성 중이다.
띠링!
“한스!”
저 멀리서 자전거를 밟으며 비탈길을 내려오는 한 사람. 갈색의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부드러운 미소의 소년이었다. 뚱했던 한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형!”
끼이익!
한스가 형이라 부른 소년은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는 아이에게 작은 도시락을 전달했다. 도시락이라고 해 봤자 마른 빵과 잼, 삶은 달걀이 전부였지만.
“미안해. 많이 늦었지?”
“아니. 방금 나왔어.”
“어서 들어가서 밥 먹어. 배고프겠다.”
한스의 집안 사정상, 그의 형이 일터에 나가 받은 점심을 도시락으로 전달해 주고 있었다. 그나마 이것이 집안에서 제일 먹을 만한 음식이었기에.
“형은? 바로 가?”
“새삼스럽게.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고.”
띠링!
형이 자전거 벨을 가볍게 튕기며 웃었다. 그 소리에 초소에 서 있던 경비가 고개 들어 두 형제를 쳐다봤다.
“수고 많으십니다.”
“어이, 늘 고생이 많아-”
경비는 한스의 손에 들린 도시락을 흘깃 보며 인사했다. 요즘 보기 드물게 우애가 깊은 형제다. 매일같이 동생 끼니를 챙겨 주러 오는 걸 보면.
“조심해서 가라, 나움.”
나움은 꾸벅 인사하더니, 다시금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한스는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빵을 우걱우걱 씹어 한입에 삼켰다. 이렇게 멍하니 있을 시간 없다.
‘나 때문에 형이 저렇게 고생하는데, 무조건 장학금 타야 해.’
한스는 빠르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강의실로 가기 위해 몸을 빙글 돌렸다.
“……?”
2동 건물 지붕 위로 보이는 낯선 날개와 꼬리.
한스는 눈을 찌푸리며 저게 뭔가 싶어 자세히 살폈다. 그에 경비 역시 시선을 따라 2동 건물 위쪽을 쳐다봤다.
“어라.”
저거…….
“드래곤 아닌가?”
“…드래곤이 왜?”
“그러게. 드래곤이 어째서?”
“…….”
당황스러웠지만 이곳은 에너제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다. 한스는 고개를 흔들고는 제 갈 길을 갔고, 경비 역시 심드렁한 얼굴로 해당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호출기를 집어 들었다.
* * *
“저기, 이안.”
“응.”
이안이 야무지게 고기를 두 볼 가득 넣고서 대답했다. 학생 중 누군가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밥 다 먹고 다음 수업까지 시간 좀 남는데, 내가 학교 소개해 줄까?”
“음, 잠시만.”
이안은 학교장에게 받은 시간표를 살피며 고민했다. 아이들 말대로 한 시간 반 정도 공강이었다.
“좋아. 그럼 고맙지.”
“혹시 지도 갖고 있어?”
“아니, 없어.”
그런 것도 있었나? 다른 건 다 줬으면서 어찌 제일 중요한 지도를 빼먹었나 몰라. 이안은 역시 인기 없는 교수인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도가 없다는 이안의 말에 학생들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우리도 없어. 보안상 이유로 지도는 따로 없대. 대신 우리가 오가면서 메모하면서 외우고 그래. 엄청 넓고 크거든.”
“아.”
착각이었구나. 이안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학교장 다슈아의 털 찐 얼굴을 떠올렸다. 조금 미안해지는 것 같다.
“크기도 큰데, 길도 복잡하고 숨겨진 데도 많아서 여차하면 길 잃기 십상이거든.”
“그렇구나.”
자크 백작저 안에서도 길 헤맨 적이 몇 번 있다. 그런 느낌이려나? 친구들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건물을 나섰고, 교정을 돌아다니며 친절히 설명했다.
“여기는 교수동. 교무처랑은 조금 달라. 그리고 저기는 도서관, 구내식당, 훈련장…….”
“동방의 주술을 주로 배우는 애들은 서관에 수업이 많아. 훈련장 주변 건물은 마검사를 비롯한 무인 계열.”
“그리고 이쪽이야, 이안.”
화사한 교정 구석에 정원 입구로 보이는 화단이 즐비했다. 다만 다른 곳과 달리 음기가 좀 강해 보였고, 인기척이 드물다는 게 좀 특이해 보였다.
“여긴?”
“여긴 학생들이 자주 가는 정원. 안쪽은 훨씬 크고 잘 꾸며져 있어. 들어가 볼래?”
“응.”
이안은 별 의심 없이 친구들을 따라 정원으로 들어섰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주위가 울창해졌다. 마치 한순간에 배경이 바뀐 느낌이다.
신기한 마음에 이안이 웃으며 뒤를 돌았다.
“여기 정말-”
멋지다! 하고 이안이 감탄하려는 순간-
“…응?”
아이는 정원에 혼자 남았음을 깨달았다.
친구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