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9
제89화. 연금술사
‘참나,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몰랐다니.’
이안은 반지를 들여다보며 어이없이 웃었다. 부인의 손가락은 물론이요, 장신구를 주의 깊게 볼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아까 부인이 신호를 주었던 손은 반대쪽이었으며, 이미 의문의 반지 외에 테이블에 놓은 장신구가 예닐곱 개를 넘어섰다.
“왜 그러시죠?”
“반지에 박힌 보석,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인은 의아한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느냐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답을 알고 있지는 못한 터라, 바로 메렐로프 백작에게 질문의 화살이 돌아갔다.
“아니요. 이게, 백작님이 선물로 준 거라서…….”
뜯어 보면 볼수록 확실했다. 지금도 이안이 웃옷 아래 목걸이를 차고 있지 않나. 실라스크 화분 아래 숨겨져 있던 것과 같은 종류다. 햇빛을 그대로 머금은 황색 원석이 정밀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백작님?”
“음,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중앙으로 가는 상단에게서 선물로 받았던 것 같군. 아내와 결혼한 첫해 봄이었으니, 아마…….”
백작은 상단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입 밖으로 내어지지는 않는지 답답한 신음만 흘릴 뿐이다.
“끄응. 아무튼 상단에서 받은 건 맞는다네. 거기에 연금술사가 있다는 게 기억나니까 말이야.”
“연금술사요?”
“그래. 금을 만들라 하니까 별 이상한…. 실패한 건지, 의도한 건지 영 알 수가 없단 말이지. 하지만 하완 왕국 너머의 타국에서는 또 이런 게 인기가 많다고 해서 받아두었던 걸세.”
뜻밖의 말에 이안의 말문이 막혀 들었다.
연금술사라, 이제껏 한 번도 짐작하지 못했던 수였다. 마법이 아닌 자연의 진리를 탐구함으로 쇠붙이를 금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 일각에서는 사기꾼이나 미치광이, 심하면 마법사를 흉내 내려는 이단자들로 인식되곤 했다.
“상단에서 연금술사를 데리고 있다니, 신기하군요.”
“외국에서는 별로 놀랄 일이 아닐세. 연금술사라 하면 살아 움직이는 귀금속 공장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통달한 연금술사는 나도 본 적이 없지만, 이런 식으로 되다 만 것도 보기에는 좋으니. 상단과 계약하여 움직이는 수가 비일비재하지. 자네는 모르는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긴, 그럴 법도 하겠군. 그런 자들이 브라츠의 사창가를 찾지는 않을 테니까.”
메렐로프 백작은 저도 모르게 모욕적인 언사를 뱉었다가, 놀라서 흠칫거렸다. 굴라 대금을 미뤄달라 부탁하며 담보까지 내거는 상황 아니었나?
혓바닥이 실수를 제대로 했다.
“크흠.”
백작은 헛기침하며 이안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계속해서 반지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래. 연금술사의 작품이었군. 그런데 그게 왜 이안의 화분에 숨겨져 있었을까?’
얼추 퍼즐이 맞춰지기는 했다.
필리아의 말대로라면 이안이 상단 심부름 후 화분을 얻어왔다 했으니까 말이다. 백작이 말하는 상단과 같은 곳일 게 분명했다.
“그렇군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지…….”
이안과 부인의 시선이 맞물렸다. 이안의 마음 같아서는 돈 주고 사고 싶었고, 부인은 선물로 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들을 지켜보는 메렐로프 백작만 아니라면.
“이 정도면 담보로 충분한가요?”
“물론입니다, 부인. 내일 해가 질 때까지 수표를 보내주신다면 귀중품들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부디 서로의 신뢰가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흥. 메렐로프를 대체 어떻게 보는 건지 모르겠군.”
“기분 상하셨다면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말하고 싶습니다.”
똑똑.
“백작님. 자루를 다 옮겼는데요.”
그때, 밖에서 메렐로프의 하인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알려왔다. 자그마치 100자루였다. 이제 마차로 대여섯 번 왔다 갔다 하며 옮길 일만 남았다.
“그래. 나가지. 부인, 먼저 저택으로 들어가 계시오. 나는 이안 경과 여기를 마무리하고 가겠소.”
“네. 알겠어요.”
부인은 코트를 챙기며 이안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밀을 공유한 사람끼리 나누는 모종의 눈짓이 오갔다. 아주 짧았고, 미세했다.
“이안 경, 오늘 고마웠습니다. 메렐로프와 이곳 영지의 무궁한 미래를 위해 훌륭한 선택 하셨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만족스러운 거래였지요.”
눈 씻고 뜯어봐도 이상할 것 없는 인사말이었으나, 백작은 괜히 촉이 서는 것을 느꼈다. 아까 반지를 두고서 생긴 잠깐의 침묵 때문일까? 백작은 나가는 부인의 뒤를 따라가며 괜히 이안을 노려봤다.
콰앙!
“눈깔 왜 저래?”
문이 닫히자마자 베릭이 짜증스럽게 꿍얼거렸다. 이안은 그저 황당한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다. 그는 작은 주머니를 가져와 부인의 장신구를 한데 담았다.
“그나저나, 그거 진짜 보석도 아니잖아.”
“보석이 별거인가? 반짝거리고 대중적인 가치가 있으면 보석이지.”
“백작이 수표 내일 준다 하고 안 주면?”
“별걸 다 걱정하는구나. 그래 준다면 우리에게는 고맙다.”
이안이 웃으며 주머니를 베릭에게 넘겼다. 알아서 잘 챙겨두라는 의미였다.
“계약서를 작성했으니, 이행하지 않으면 황궁에 정식으로 고발장을 넣으면 되거든. 대부분의 변경백이 그러하듯 황궁이랑 얽히는 걸 죽도록 싫어하니 그걸 면하기 위해서라도 값을 치를 것이다.”
혹여 안 치르면? 재판으로 넘겨져 원금과 보상금까지 받게 될 터였다. 금화 3,500닢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값으로 굴라를 매매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메렐로프 백작 일행이 영지를 떠나자마자, 영지로 내려가 굴라 거래를 허락한다는 정보를 퍼뜨려라. 우선은 볶은 굴라만.”
“볶은 것만?”
“그래.”
시기를 잘 맞추는 것 그리고 순서를 잘 정하는 것도 중요했다.
“지금부터 생굴라를 팔면 볶은 굴라를 사 먹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저들이 사서 해 먹으면 되니까. 게다가 한 달 후에는 자력이 생겨 생굴라도 사려 하지 않겠지.”
하지만 볶은 굴라를 먼저 팔겠노라 하면, 먹고자 하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계속 사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메렐로프 백작이 굴라 배급을 시행할 때 그보다 조금 낮은 가격으로 팔면 또 한 차례 이득을 챙길 수 있다.
“무엇보다 계약서를 작성했다 한들, 백작이 난리 칠 게 빤하니 면책용으로 세워둘 명분이 필요하지.”
경제활동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만, 거래하자마자 물량을 풀면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성격상 굉장히 피곤한 일임만 확실했다.
“볶은 굴라이니 당장은 백작의 이득과는 무관한 것이고, 뭐 나중 가서는…….”
“나중 가서는?”
베릭이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으나, 이안은 싱긋 웃으며 고개만 가로저었다. 알려줄 생각 없다는 뜻이다.
“됐다.”
“아, 왜! 알려줘!”
“가서 일이나 거들어라. 그래야 서둘러 떠나지. 참, 그리고 영지민들에게 볶은 굴라 판매 수익의 1할을 세금으로 부과할 것이라 전해라.”
“오케이. 1할. 열 개 중에 하나. 내가 그 정도는 이제 알지!”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겠다. 영지민들의 판매 수완에 따라 추가 수익이 결정될 터였다. 이안의 지시에 맞춰 베릭이 문을 나서려다 멈췄다.
“클라크라는 놈은 어떡해?”
“아, 계속 두어라. 부인과 접점이 있는 놈이니 어떤 식으로든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부리지도 마?”
베릭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종일 방에 박혀서 놀고먹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클라크는 감옥에 갇힌 기분이겠지만.
“뭐, 쓰고 싶은 데가 있다면 마음대로 쓰거라. 대신 몸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
“앗싸!”
우당탕탕!
대체 무얼 하려고 저러는 것인지…….
이안의 허락이 떨어지자, 베릭은 냉큼 좋다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커튼을 치니, 굴라 분류 작업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 * *
“이안 님!”
“그래, 해나. 오늘도 소란이구나.”
“메렐로프에서 집사님이 직접 왔습니다. 굴라 대금을 가져왔다고 하는데요.”
“아, 그래.”
이안의 허락에 메렐로프의 집사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기품있는 몸짓과 시선 처리가 백작보다 나은 듯하다.
끼익.
“어서 오시오.”
“이안 자작님을 뵙습니다. 어제 값을 치르지 못했던 굴라 대금입니다. 선납하였던 금화 1,000개를 제외, 2,500개를 보증한다는 수표입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집사는 책상 끄트머리 은색 쟁반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이안은 하이만 뱅크의 증표가 찍혀있는 수표 용지를 확인하고, 이어서 백작의 인장 및 자필 서명까지 살폈다.
“문제없군.”
“다행입니다.”
“부인께서 맡긴 귀중품을 가져오라 이르겠네. 해나, 베릭에게 물건을 가져오라고 해.”
“네. 이안 님.”
“잠시 앉아서 기다리게나. 급한 일이 있는가?”
“아닙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집사는 당황해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상대가 차를 권하기도 전에 용건을 먼저 말했으니, 결례라 지적해도 마땅하다.
하지만 불편한 자리인 건 어쩔 수 없었으니.
일전에 집사는 자신의 이름으로 굴라 매매 요청서를 보낸 적 있었다. 당연히 이안에게서 답신은 오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것이 메렐로프의 사정을 외부에 알리는 꼴 아니던가. 거래에서 우위 선점을 넘기는 거나 마찬가지였단 말이다.
혹여 백작이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사먼이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기억하시는군요.”
집사는 잡념을 겨우 떨쳐내며 대답했다.
“그럼. 자네가 보낸 서신을 내 몇 번이나 정독했다네.”
젠장. 꼬투리 잡혔다. 집사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이름을 보아하니 가문에서 내려오는 집사가 아닌 것 같은데, 출신이 어디인가? 일한 지는 오래되었나?”
집사는 침묵으로 대답하며 이안의 의중을 살폈다. 대체 어찌하여 저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
“다른 게 아니고, 우리도 집사가 필요한데 말이지.”
“저는 메렐로프에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응. 그래. 묻으시게나. 나는 교육을 좀 원하는데.”
“예? 교육이요?”
혹시 스카우트인가 싶었다. 집사야말로 저택에서는 핵심 인물이니, 귀족들끼리 심심치 않게 꾀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물론 백작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겠지만, 일단 우리 쪽 의중을 알아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러두네.”
“…한번 상의해 보겠습니다.”
“그래. 성실하고 똘똘한 친구이니 가르치는 맛이 날 것이야. 당연히 보수는 섭섭지 않게 챙길 걸세. 원한다면 이전에 받았던 클라크라는 자도 돌려주지. 그쪽 저택에서 일한 경험이 많으니, 더 도움 되지 않겠나.”
물으나 마나, 답은 빤했다.
백작은 완강하게 거절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백작에게 허락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부인에게 따로 알리는 말이었다. 일을 저지르고 나서, 클라크를 얻고 싶다면 집사 좀 빌려달라는 뜻.
“네. 알겠습니다.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똑똑.
“이안 님. 베릭 님이 주머니를 가져오셨습니다.”
“아, 그래. 해나. 이쪽으로 와보렴.”
“네?”
해나는 주머니를 테이블에 올려놓았고, 이안은 웃으며 집사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해나일세.”
“아, 안녕하세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차기 이곳 영지의 집사는 해나가 될 것이라.
영문을 모르는 해나만 어색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인사했다. 집사는 주머니 속 귀중품을 확인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그래. 수고하게나.”
“아,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끼익!
이안은 창문을 통해 집사가 저택을 빠져나가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쟁반 위에 놓인 금화 2,500닢짜리 수표를 보며 피식 웃었다.
타닥타닥!
한편, 집사 사먼의 마차는 속도를 높이지 못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진 탓이었다. 그는 마차 창문으로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다.
“날도 추운데 다들 나와서 뭣들…….”
뭣들 하는지 궁금한 차.
집사는 자신이 본 게 확실한지,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