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90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90화(890/935)
제890화. 소각의 정원
“…….”
이안은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 있었다. 혹여 괜히 움직였다가 친구들이랑 방향이 어긋나면 안 되니까 말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따스한 햇살, 녹음 진 이파리들이 아름답게 흐드러지는 정원이었지만, 이안의 마음은 조금씩 차가워졌다.
‘이것도 신고식일까?’
마법부에서도 했었잖아. 뭐든지 새로운 모임에 들어가면 이런 식으로 신고식이 있는 걸까?
이안은 입을 비죽였다. 적막한 주위 탓에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기 어렵다. 수업에 늦을 수도 있으니 친구를 기다리는 대신 돌아가려고, 정원 입구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사아악.
“……!”
정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마치 깊은 물속에 손을 집어넣은 것 같은 느낌. 공간 자체가 막혀 버린 것이다.
이안은 주춤거리다 뒤로 물러났다.
‘어쩌지?’
신고식이라면 나갈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 사고라면, 교수님을 불러올 것이고.
“…누구 없습니까?”
이안은 조심스럽게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목소리.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날이 이리도 화창한데도 모든 게 괴이하게만 느껴졌다.
‘혹시 크로니의 술수일까?’
자신을 처리하려는 크로니의 수작이라면 위험했다. 이안은 일단 마력을 개방한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지이잉! 지잉!
금빛 눈동자가 조금 촉촉해졌지만, 울지는 않았다. 두려움이 분노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안은 조심스레 정원 안쪽으로 걸음 했다.
“이안 님. 에너제스는 겉보기와 다르게 별별 희한한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크로니가 이안 님을 해치려 할 수도 있어요.”
이안은 로만드로의 당부를 떠올렸다. 워낙 사건 사고가 잦은 곳이다 보니 이를 이용하여 이안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안도 각오하긴 했지만, 설마 첫날부터 이리될 줄은 몰랐다.
“누군가 있다면 나오시게! 정정당당하게!”
삐죽. 이안이 모퉁이 너머로 발끝을 슬쩍 내밀었다. 위엄 넘치는 말투와 달리 상당히 조심스러운 몸짓이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역시나 아무도 없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짙어지는 그림자…….
“이리 와.”
“……!”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이안이 화들짝 놀라 뒤돌았다. 그곳에는 자신의 모습을 한 낯선 인물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백금발에 푸른 눈, 심지어는 교복까지 똑같은 외형. 이것도 정원의 환술인가? 이안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뭐야?”
“들어가면 못 나와.”
정원 깊은 곳으로 가면 길을 잃게 된다. 자신이 죽어 가는지도 모른 채, 영원히 울창한 수풀 속을 거닐게 되리라.
“너, 누구야?”
이안이 한껏 경계하며 묻자, 아이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안.”
“내가 이안이다.”
“맞아. 그리고 나도 이안이지. 이쪽으로 와.”
톡톡. 벤치 옆을 두드리는 손길이 다정했다.
이안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아이는 생글생글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안을 살폈다.
“어떠니?”
“…뭐가?”
“뭐든.”
이안은 다시금 입술을 비죽였다. 어떠냐고? 등교 첫날 사귄 친구들에게 뒤통수 맞은 기분을 묻는 것인가?
아이의 코끝이 조금 붉어졌다. 슬픔은 분노로 바뀐 지 오래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콱 막힌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즐거워 보이네. 다행이다.”
“하나도 즐겁지 않아.”
“그래?”
안락한 저택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원하는 공부를 즐기며, 바르사베와 검을 맞대고, 가끔은 바람 쐴 겸 중앙 골목을 누비는 모습이 보기 좋던데? 아이가 이안의 볼을 툭 두드렸다.
“너무 속상해하지는 마.”
너를 속이는 자가 있다는 건, 분명히 믿을 만한 자도 있다는 거니까. 지금 네 곁에 있는 그 사람들처럼.
이안은 눈매를 가늘게 뜨고서 아이를 쳐다봤다.
“…수상해.”
“하하. 네 얼굴인데 수상해?”
“내 얼굴이니까!”
왜 하필이면 내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이안의 물음에 아이는 청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게 다시 알려 주고 싶어서.”
“무엇을?”
“마법부 별채에는 답이 있다는 걸. 그리고 이안 하델아-”
이안의 눈이 다시금 커졌다. 내 이름을 어찌 알고 있는 거지? 아이는 이안에게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며 속삭였다.
“보기 좋다. 그렇게 귀하게 자라다오.”
솨아아!
순간, 훌쩍 불어오는 바람.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찡그리고 말았다. 눈을 다시 떴을 때,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안은 다시금 찾아온 적막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희한한 일이었지만, 아까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상당히 다정했어.’
그래서 그런 것이겠지? 이안은 아이가 앉아 있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살짝 만져봤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튼-’
아이의 말을 따르자면, 이곳은 위험한 장소가 맞다. 그러니 여기로 자신을 데려온 친구들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즉, 크로니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상당했다.
이안은 흡! 하고 기합을 넣더니 금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지이잉! 지이잉!
이안의 주위로 칼날 같은 바람이 터졌다. 에너제스와는 완전히 분리된 시공간 같으니, 이런저런 시도를 통하여 경계를 허물어 보려는 속셈이었다.
“얍.”
이안이 가볍게 기합을 내지르자, 손끝에서 세 줄기의 백색 번개가 몰아쳤다. 콰지지직! 허공에 돔 모양으로 스파크가 일었다. 마법부 때와 상당히 비슷했다.
‘저기다.’
보호막이 존재하는 곳. 이안은 집중하여 입술을 꽉 깨물었고, 이내 한 지점을 표적으로 삼아 힘을 쏟아 냈다.
촤아아악!
온몸에 흐르는 마력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막힘없이, 끝도 없이, 폭발적으로 터지는 무언가.
“……!”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 * *
“저래도 되는 거겠지?”
“계속 쳐다보지 마.”
“아니, 첫날부터 저러려니까, 좀.”
“쉿. 이쪽으로 오라니까?”
이안을 정원으로 밀어 넣은 학생들은 바삐 자리를 떠나면서 연신 뒤쪽을 힐끔거렸다.
다섯 살 난 귀족치고는 생각보다 고집이 없어서 다루기 편했다. 첫날부터 이런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다.
‘쟤들…….’
한편, 어딘가로 바삐 향하는 아이들을 발견한 한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이안 하델이랑 같이 밥 먹던 애들 아닌가? 학업 태도는 물론이고, 머저리처럼 모여 다니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애들. 한스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근데 이안 하델이 안 보이네.’
뭐,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한스는 복도를 거닐며 학생들이 야외 휴게실로 우르르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 누군가를 만나려는 것 같은데, 상대의 모습이 커튼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조금 기운 상체와 쩔쩔매는 듯한 표정들로 봐선 상급자를 만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 신경 쓰이네, 저거.’
한스는 고개를 살짝 올려 지붕 쪽을 힐끗거렸다. 붉은색 드래곤이 연신 꼬리를 탁탁 쳐 대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바리엘 중앙에서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드래곤이라 하면, 딱 한 마리다.
‘마법부는 대체 뭐 하는 거람?’
아마도 이름이 ‘페리 포먼스 레이 드래곤’였던가? 들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처음 이름 지은 사람 진짜 센스 없는 것 같다. 미적 감각이 영 별로야.
드르륵.
강의실로 돌아오니, 대부분 자리가 비어 있었다. 한스는 자신의 옆자리에 놓인 이안의 가방을 힐끔거리다가, 수업 복습을 위해 노트를 펼쳤다. 구석에 모여 디저트를 나눠 먹는 학생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근데 이안 하델, 집이 진짜 부자래.”
“황족 방계니까 부자 맞겠지.”
“그래도 지방 영주 출신이니까 중앙 귀족에 비하면 그럭저럭 아닐까?”
“아닐걸? 우리 삼촌이 하이만 은행에서 일하잖아. 들리는 소문으로는 금화 1천 개를 현금으로 갖고 있었다 하더라.”
한스의 펜촉이 삐끗거렸다. 금화 1천 개? 살면서 상상조차 못 해 본 액수였다. 보드게임에서조차 갖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돈이지 않나!
한스의 입매가 비틀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마법사이길 간절히 바라며 희망을 키운다. 마법사가 되면 급여만으로 부자 반열에 오를 수 있으니까!
근데 이안 하델은 애초에 모든 걸 다 가진 애구나.
‘생긴 것도 귀엽던데.’
아. 짜증 나네.
한스는 입안에 남은 빵 조각을 쩝쩝거리며 필기를 이어갔다. 그사이 소화되었는지 조금씩 배가 고파 오기 시작했다.
“근데 부모님이 다 죽고 없잖아. 그 나이에.”
“친인척이랑도 문제가 있어서 자크 백작저에 머물고 있다더만. 그게 진짜인가 보네?”
“응. 아까 아침에 바르사베랑 등교하는 거 봤어.”
부모가 없다라…….
한스의 펜이 다시금 멈칫거렸다. 그건 자신과 비슷했다. 그나마 자신은 형이라도 있지, 이안 하델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아까 걔들, 이안 하델 데리고 ‘거기’ 간 거 맞지?”
“얘기 들어 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
“어디? 나 못 들었어.”
“왜, 거기 있잖아. ‘소각장’.”
한스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물었다.
“이안 하델이 소각장엘 갔어?”
“어?”
일명 소각장.
아름다운 정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정원엔 매시간 독립된 시공간이 만들어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현 세계와 멀어져 다시 연결되기 힘들었다.
이 점을 이용해서 예전에는 쓰레기 매립과 위험도 높은 실험실 등으로 사용했지만, 워낙 실종 사건이 많이 터져 출입 자체를 금한 구역이었다.
“모르겠는데?”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
“모르겠다고. 그것보다 내가 왜 네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야 하는데?”
한스는 학생을 빤히 쳐다봤다. 그 담담한 눈빛에 학생이 어깨를 움츠렸다. 평소에는 조용한 한스지만, 뭔가 마음에 안 들면 경고 없이 다가와서 필통으로 머리를 후려치는 놈이다.
한스는 뭔가를 생각하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일이 대답할 의무는 없지. 근데, 별것도 아닌데 되게 까칠하게 군다.”
진짜 까칠한 게 뭔지 보여 줘? 배고파서 짜증 나 죽겠구먼, 확 씨!
한스가 잇새로 쌍욕을 중얼거리자, 학생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싸움 붙어 봤자 학교는 우등생 편이라 불리했다.
드르륵.
한스는 걸음을 조금 빠르게 해서 소각장 쪽으로 달려갔다. 이안 하델이 불쌍해서 구해 주려는 거냐고? 아니, 천만의 말씀-
“근데 이안 하델, 집이 진짜 부자래.”
콩고물 보고 달려가는 거다.
정원 인근에 도착한 한스는 출입 금지 줄이 걷혀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계획적이군.’
오직 드래곤만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정원 쪽을 주시했다.
이안 하델이 보는 앞에서 출입 금지 줄을 걷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귀족 자제인 아이가 첫날부터 학교에서 사고 치길 원했겠는가? 그냥, 평범한 정원이라고 꾀어서 데려간 것이겠지.
“보자…….”
한스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 시간을 계산했다. 정원으로 들어가서 이안 하델을 만나고, 다시 돌아오려면……
“……?”
파직.
맑고 푸른 하늘에 뭔가 실금이 가 있다. 한스는 눈을 비비고서 그게 뭔지 자세히 살폈다.
바로 조금씩, 조금씩 커지는 균열…….
“엥?”
퍼어어엉!
갑작스러운 폭음에 한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무슨 폭발인지 감조차 안 왔다. 공기가 터진 것 같다는 게 맞는 표현일까?
지나가던 학생들 역시 반사적으로 움츠렸고, 교정의 나무와 수풀이 날아갈 듯 파닥거렸다. 오직 드래곤만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정원 쪽을 주시했다.
-뀨?
이어서 먼지 속에서 나타난 작은 인영.
뀨의 꼬리가 기분 좋게 탁탁, 지붕을 쳐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