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99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99화(899/935)
제899화. 우리는 이어져 있어
“자, 다들 물 마셔.”
쪼르륵 앉은 세 아이는 나움이 건네준 물을 들이켰다. 갈증이 깊었던 걸까. 어찌나 시원하게 마시는지 나움은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고 싶었으나 주머니 사정 탓에 쓴 웃음만 지었다.
아이들은 물을 단숨에 비우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 냈다.
“다들 좀 괜찮니? 진정했어?”
“응. 형은? 물 안 마셔?”
“난 목 안 말라.”
나움이 쪼그려 앉아 한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다정한 형의 눈길에 한스가 다시금 콧잔등을 시큰거리며 나움의 볼을 쭉쭉 늘려 버렸다.
“바보! 바보! 바보! 인쇄소 그만둔 거였으면 말을 했어야지!”
“아하하. 미안미안. 너 걱정할까 봐 그랬지.”
“여기는 밥 챙겨 줘?”
“아직. 수습 끝나면 준대.”
“그럼 형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은 거네?”
나움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못 먹은 만큼 동생 역시 고달픈 하루였을 터이니. 한스는 형의 그런 생각을 알아채곤 대꾸했다.
“이안이가 밥 사 줘서 먹었어.”
“그래? 고맙다.”
배시시 웃으며 아니라고 턱을 작게 젓는 이안에게, 나움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때, 한스가 품속에서 동전 주머니를 꺼내 나움에게 건넸다. 아까 바르사베가 사채업자들에게서 털어 준 돈이었다. 다해서 은화 50닢 정도. 나움이 놀라서 되물었다.
“어디서 났어?”
“사채업자들 있지?”
“그놈들이 집까지 찾아왔어?”
나움이 당장이라도 가서 항의할 것처럼 일어나자, 한스가 붙잡았다.
“집까지 와서 밥 잘 먹고 다니는지 묻더라?”
“응?”
“돈 갚으려면 일 열심히 해야 하니까, 밥 잘 챙겨 먹고 무리하지 말라고. 나보고 공부 열심히 하라면서 용돈 주고 갔어.”
“거짓말.”
“진짠데.”
믿지 못하겠다는 나움의 눈빛에 이안과 바르사베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보장한다는 듯이 말이다. 나움은 나중에 제대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주머니를 챙겼다.
“저기.”
그때, 이안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궁금하고 의아한 것들이 산더미다.
“한스 말로는 마법부 별채 건설과 관련 있는 집안이라고 하던데, 진짜인가요?”
혹 마법부랑 연관 있어서 나움에게 이끌리는 것일까? 여섯 번째 감각 같은 거 말이다.
이안의 물음에 나움이 한스를 돌아봤다. 어지간해서는 남에게 가정사를 얘기하지 않는 한스였다. 한데, 집안 얘기를 했어? 그에 한스가 대수롭지 않게 소개했다.
“이안 하델, 마법사야.”
“뭐? 아아! 그, 최초의 귀족 출신이라는?”
“그래서 마법부 관련한 얘기 하다가 자연스럽게 나왔어.”
“그랬구나. 영광입니다, 마법사님.”
이안이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어렵게 대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움은 정말 신기한 인연이라며 웃기만 했다. 에너제스에 딱 한 명 있다는 마법사와 내 동생이 친구라니! 그는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집안을 소개했다.
“별채 건설과 관련이 있느냐고 물으셨죠? 네, 맞습니다. 선조님들 중에 버고스인이 있어요. 아주 예전에, 버고스에서 관직을 맡으셨다고 하는데 자세히는 모르겠고요, 당시 정세가 혼란해서 어쩔 수 없이 바리엘로 넘어오셨다고 들었어요.”
“아, 그럼 그분이?”
“네. 어찌 별채 건설을 맡게 되셨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마석 자원이 풍부한 버고스에서 오셨고 또 마침 그쪽에서 일하셨던 분이니, 황궁 마법부에서 도움을 청하셨나 봐요.”
한스도 나움 옆에 앉았다. 계단 턱에 네 명이 앉아 있는 모습은 퍽 평화로워 보였다. 주변에 폐기물 덩어리만 없었다면.
“그럼 꽤 살 만했을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었어?”
바르사베의 질문이었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던데, 어째서 끼니 걱정할 지경까지 가난해졌는지를 묻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좀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나움과 한스는 별로 개의치 않은 기색이었다.
“할아버지가 버고스랑 바리엘을 오가면서 마석 중개상 일을 하셨습니다. 버고스에서 물건을 떼 왔는데, 글쎄 매매금지석이 들어가 있었대요.”
“매매금지석이요?”
“네. 저도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력을 파훼하는 힘을 가진 보석이었다고 들었어요. 아무튼, 할아버지는 억울해하셨지만 방도가 없었대요. 벌금 왕창 맞고, 그 이후로는 중개상 일을 못 했다고 하시네요.”
“헐. 그럼 누가 몰래 넣은 거네.”
“아마도요. 하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알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가세가 기울자 이런저런 사업에 뛰어드셨고, 보시다시피.”
쫄딱 말아먹었죠. 심지어 형제 둘만 남겨 두고 부모 역시 먼저 세상을 등졌다.
실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이었지만 눈물을 훌쩍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움과 한스에겐 이미 마모된 일이었고, 이안과 바르사베는…….
“나 같았으면 금지석 집어넣은 놈 끝까지 잡아다 죽였다.”
“누님. 말씀이 거치십니다.”
“넌 안 그래?”
이안은 잠깐의 침묵 동안 크로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문과 부모님의 복수가 가슴 어딘가에 그을려 남아 있었다.
“…저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한스의 선조께서도 그리하셨겠지요. 한데 찾지 못한 걸 보면 생각보다 더 큰 음모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마법부에 남은 기록이 없을까?”
“있을 것 같습니다. 저번에 보니까, 정말 오래전 기록도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더라고요.”
한스와 나움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 듣더니 의아한 투로 끼어들었다.
“잠깐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미 오래전 일이야. 형이 어릴 때 아버지께 전해 들은 내용이라고.”
“궁금하지 않아?”
현재, 네가 걷고 있는 운명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이안의 말간 눈동자를 들여다본 한스는 할 말을 잊었다. 보다 못한 나움이 덧붙여 분위기를 환기했다.
“궁금하긴 하지만, 나는 안 되겠다. 하하. 새로 막 취직한 터라 일을 뺄 수 없어서 말이지. 한스는 마법부 견학 다녀와. 분명히 좋은 기회야.”
“아니요, 형님. 나움 형님이 가셔야 합니다.”
“응? 나?”
나는 왜? 나움이 어리둥절한 미소를 짓자, 이안이 다시금 그의 손을 확 붙잡았다. 그러더니 별안간 금안을 개방했다.
화들짝 놀란 한스가 이안을 붙들었다.
“너! 너, 지금 뭐 하려고?!”
지이잉! 지잉!
솨아아아!
주위로 몰아치는 부드러운 바람.
바르사베는 휘날리는 앞머리를 대충 고정하고는 흥미롭다는 듯 구경했고, 한스는 흔들림 없는 이안의 시선을 따라 제 형을 쳐다봤다. 나움은 심장이 멎은 사람처럼 굳은 채 이안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느껴지시지요?”
토옥.
이안이 반대쪽 손길로 허공에 빛을 만들어 내자, 나움의 의식 저편에서 불이 켜졌다.
이안의 손짓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기운. 나움은 난생처음 느끼는 감각에 혼란스러워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 보였다.
“분명히, 보이실 것입니다.”
여섯 번째 감각으로, 신의 금빛이.
촤아아악!
이안이 마력을 가볍게 불어넣자, 나움의 주위로 따스한 것들이 쏟아졌다. 봄날의 들꽃, 포근한 이불, 난로의 안락함, 단단한 포옹…. 그 어떠한 수식어로도 쉬이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어…….”
나움의 갈색 눈동자가 이안과 같이 순식간에 금안으로 변했다.
지켜보고 있던 한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고, 바르사베는 대단하다는 듯 이안의 마력을 손끝으로 툭툭 튕겼다.
‘농도 죽이네.’
어째서 마법부에서 그 난리를 쳤는지, 할아버지를 비롯해 아버지까지 이안 하델의 힘을 언급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마검사와는 차원이 다른,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규격 외가 분명했다.
스스스슷!
마력이 사그라들자, 주위는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쿠웅.
저 멀리서 광경을 지켜본 잡부들이 물건을 놓친 걸 제외하면, 그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한 공간.
나움이 더듬더듬 제 손을 내려다보자, 이안이 그의 손을 붙들고 와락 안겼다.
“역시! 맞았어! 마법사가 맞았다고!”
“마력운용자인거지? 이안, 비켜 봐. 나도 손 좀 잡아 보게.”
“저번에 자전거로 한스 데리러 왔을 때요, 그때 보고 계속 느낌이 이상했거든요. 우리, 여섯 번째 감각으로 이어져 있었던 거예요!”
“이안, 비켜 보라고. 나도 손! 손!”
“정말 반갑고 축하해요. 나움 그리고 한스!”
이안이 방방 뛰면서 즐거움을 숨기지 않았다. 바르사베도 아등바등 끼어들어 손을 맞잡았고, 그들은 크게 환호하며 온갖 함성을 내질렀다. 이안은 한스마저 껴안으며 외쳤다.
“이제 두 사람의 운명도 변할 거야!”
자신의 운명이 변했던 것처럼.
아슬아슬, 지옥의 끄트머리에서 넘어지기 직전, 마법이라는 힘으로 세상이 변해 버린 기적을 두 형제 역시 겪게 될 터였다.
나움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치였고, 한스는 소름이 돋아 털이 쭈뼛거렸다.
“혀, 형-!”
“아…….”
“이봐, 나움. 방금 그거 뭔가?”
“마, 마, 마법이지? 그렇지?”
“자네, 어떻게 된 거야? 응?”
나움은 믿을 수 없다는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내 한스를 꽉 껴안으며 북받치는 감정을 추슬렀다.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난다는 사실보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신분이 올라간다는 것보다, 순간 이안이 건네준 따스함에서 훨씬 큰 울림을 느낀 게다.
타닥타닥!
히이잉!
“이아아안-! 도련님! 바르사베에! 아갓쒸!”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한 음성. 폐기물처리장 문을 박차고 마차 한 대가 급하게 들어섰다. 황궁에서 마부의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온 로만드로였다.
그는 러거스펠 곳곳을 정신없이 수소문하고 뒤졌는지, 옷깃이 반쯤 뒤로 접혀 있었다.
“아, 로만드로!”
“이런이런, 말썽쟁이들 같으니라고요! 대체 여기는 왜 오신 것입니까? 이안 도련님은 러거스펠을 잘 모르니 그렇다 쳐도, 바르사베 아가씨는-!”
“로만드로, 이리 와 보아요. 여기는 나움. 내 친구 한스의 형인데 마력운용자입니다!”
“지금 친구 형이 마력운용자인 게 중요합니까아! 앞으로 또 이렇게 제멋대로 마차를 벗어났다가는-! 예?”
고래고래 소리치던 로만드로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둥그레졌다. 이안과 바르사베가 로만드로의 허리춤에 매달려 방방 뛰어 대고 있지 않나?
“분명해요! 금안으로 변하는 걸 보았으니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휴! 됐습니다. 근데 마력운용자라고요? 그건 어찌 아셨습니까? 신탁의 빛도 없는데요.”
“뭔가 느낌이 자꾸 와서, 내가 살짝 힘을 건드려 보았습니다.”
상황 파악을 하느라 로만드로의 머리가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그는 눈알만 도르륵 굴려 나움과 한스의 반응, 주위 분위기 등을 살폈다.
이거, 진짜인가 본데?
“로만드로, 마차 잘 가져왔어요. 우리 다 같이 마법부로 가요. 가서 정확하게 확인해요.”
어허, 잠깐만. 일이 이게 어떻게 되는 거지? 로만드로는 반사적으로 웃옷에 손을 슥슥 닦았다.
“에, 로만드로입니다.”
“나, 나움입니다.”
“거참,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싶은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
한 해에 마력운용자랑 두 번 악수하는 게 가능한 일이었구나. 오늘은 퇴근하는 길에 복권이나 사 봐야겠다.
로만드로는 정신이 반쯤 빠져서는 마차 문을 열고 안내했다.
“타…시겠습니까?”
“저, 옷이 더러워서.”
누추한 옷차림으로 타기에는 너무 귀한 고급 마차였다. 하지만 이안과 바르사베가 먼저 올라서는 한스와 나움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서 타요! 누구는 뭐 엉덩이 닦고 타는 줄 아나.”
“로만드로도 타십시오.”
“예, 에에, 그래요. 가, 갑시다.”
로만드로도 나움과 한스에게 착석을 권했고, 넋 놓은 채 마부석을 두드렸다. 황궁으로 돌아가자는 신호였다.
히이잉! 히잉!
한 해에 신입 마법사가 둘… 아니지, 그 마석에 미친 마법사까지 더하면 셋이지. 공교롭게도 이안이 들어오고 나서 마법부에 마법사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정말 잘 되었어요.”
로만드로는 해맑게 웃는 이안을 보며 마침내 결론 내렸다. 마법부에, 정말 큰 복덩이가 들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