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02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02화(902/935)
제902화. 검은 싹
“이안.”
뒤따라 나온 한스의 부름에 크로니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크로니는 의아하다는 듯 한스와 나움을 쳐다봤고, 두 사람은 가볍게 눈인사한 뒤 다가왔다. 이안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였다.
“무슨 일 있어?”
“누구?”
크로니는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격식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에서 묻어나는 경멸은 숨겨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숨길 생각이 없었던 것일지도. 한스와 나움의 옷차림새로 보아 귀족이 아닌 건 물론이고, 황궁 직원조차 아님을 유추할 수 있었기에.
“설마 숙부의 친우분들은 아니겠지요?”
귀족의 명예와 품격은 어딜 가고, 저런 볼품없는 아이들과 어울린단 말입니까? 크로니는 그리 묻는 것 같았다.
이안이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대답했다.
“친우들입니다.”
“오호, 이런! 자크 백작께서 숙부를 제 자식처럼 보살피겠노라 약조하셨는데, 어찌 이리 소홀할 수가 있나요.”
이안이 천민과 어울리는 게 사실이라면 정식으로 이의 제기할 수도 있을 터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을지언정 사회적으로, 도의적으로 말이다.
자크 백작이 거론되자 이안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자크 백작님께서는 제 편의를 위해 많은 부분 신경 써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들은 제 친우이자 에너제스 학생이고, 신입 마법사이기도 합니다.”
“아하. 신입 마법사요?”
크로니는 처음 듣는 소식이라며 은근히 되물었다. 마법사의 수가 또 늘어났다는 말인가?
정보를 캐내려는 의도가 명백히 느껴지자, 이안이 말을 돌렸다.
“자세한 건 마법부에 정식으로 문의하십시오. 그리고 크로니 경-”
이안은 크로니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저는 북쪽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안은 중앙이 좋았다. 자크 백작저는 풍요로웠고, 에너제스와 마법부에서는 배울 것이 많았다. 그뿐인가? 친절하고 재밌는 인연 또한 끝이 없었으니, 크로니가 아닌 다른 자가 제안했었더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한데 같이 갈 인간이 크로니라니? 받아들일 이유가 하등 없지 않나.
“…그렇습니까.”
크로니는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이안은 자신과 크로니 사이의 무언가가 바사삭,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숙부. 그럼 언제나 몸조심하십시오.”
마지막 기회였노라, 크로니는 무자비하게 등을 돌려 마법부를 빠져나갔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들의 시선이 크로니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이안, 무슨 일 있어?”
한스와 나움 역시 크로니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이안의 곁에 다가왔다. 호칭으로 봐서는 가족 관계인 것 같은데, 냉랭하다 못해 서로를 벨 것처럼 날카롭지 않나.
이안은 아무 일도 아니라며 빙긋 웃었다.
“아니, 별일 아니야. 괜한 말 듣게 해서 미안.”
“됐어. 근데 저 아저씨 진짜 재수 없다. 군인인 거지?”
“응. 별채 구경은 다 했어?”
“아…….”
한스와 나움이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구경이라고 해 봤자 건물 둘러보는 건 금방이었고, 대부분은 무슨 책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때, 한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안, 아까 신기한 책을 봤어.”
“무슨?”
한스의 말에 대꾸하면서도 이안의 시선이 마법부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레나를 찾는 것이었다. 방금 크로니가 건넨 말이 무언가 의미심장하여 장관과 꼭 상의를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게- <히엘로 일대기>라는 제목인데, 이안의 이야기라고 하더라.”
“이안? 나?”
설마. 그럴 리가. 한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마도 다른 이안이겠지? 제목으로 유추하자면, 이안 히엘로의 일대기.”
“이안 히엘로…….”
이안은 멍하니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 봤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도 한스처럼 한번 본 것을 절대 잊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면 바로 떠올렸을 것인데.
“알아?”
“아니, 모르겠어. 어디서 배웠나?”
“아무튼, 나중에 흥미 있으면-”
“장관님!”
이안이 아레나를 발견하고서 손을 흔들었다. 보고서를 옆구리에 끼고 지나가던 아레나가 이안의 부름에 슬쩍 고개 돌려 멈췄다.
“한스, 나움 형! 잠시만요!”
“이안? 이안!”
“바쁜 일 있으면 먼저 가도 돼요!”
타앗!
이안은 그렇게 말하고서 아레나 쪽으로 내달렸다. 지금 바쁜 일 있는 건 이안, 너 같은데? 한스와 나움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중을 살폈다.
“한스, 어떻게 할래?”
“조금 기다려 보고 가지, 뭐.”
“그래. 내일 또 만날 거니까.”
한스는 에너제스에서, 나움은 마법부에서-
그때 다시 물어보면 될 일이다.
그들은 별관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 아레나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이안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아레나는 한참이나 듣고 있더니, 자신의 보고서를 보좌관에게 넘겨주고는 아이를 장관실로 데려갔다.
* * *
“북쪽으로 가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냐니?”
아레나는 책상에 걸터앉아 아이의 질문을 되새겼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이안은 조금 굳은 낯빛으로 재차 물었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제가 북쪽에 가지 않을 시 불이익이 있나요? 개인적으로든 마법부 자체적으로든.”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어? 아까 보니까 크로니 대장이 잠시 보러 왔다며.”
“네. 제게 북쪽으로 갈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아하-?”
이런 개 미친 정신 나간 새끼. 기어코 아이 앞에 대고 그 사안을 입 밖으로 꺼냈구나? 아레나는 싱긋싱긋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크로니의 머리, 가슴, 배를 삼단 분리하는 상상을 하며 분을 삭였다.
“근데 무슨 말을 어찌 들었기에 불이익을 걱정하는 거니?”
“특별한 건 없었는데, 분위기상…….”
“분위기?”
너무 주관적인 기준이었다. 아레나가 눈썹을 까딱거리자 이안이 덧붙였다.
“그것도 그렇고, 이해가 안 되어서요. 크로니 경은 지금 중앙을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따지고 보면 떠나서는 안 되지요.”
“근거는?”
“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벌인 일도 있고요.”
바로, 이안 하델, 자신을 죽이기 위해 펼쳐 놓은 마수 말이다. 도적 떼도 그렇고, 에너제스에 사람을 심어 둔 것도 그렇고,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열을 올리던 중이었다.
한데,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북쪽으로 간다? 이안이 생각하기에 상관의 명이 있었다 한들 재고해 달라 해야 할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석연치 않아 질문드립니다.”
“음, 그랬구나.”
아레나 역시 턱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잠시 고민했다.
“일단 불이익은 없어. 마법부 입장에선 오히려 네가 북쪽으로 가는 게 손해지. 아직 배울 것 많은 막내 라인 꼬맹이가 북쪽으로 가서 사고라도 치면? 감당할 게 많아지거든.”
실제로 그것을 빌미로 한 번 쳐 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이안 하델, 네가 잘 알겠지? 근데 제삼자의 입장으로 봐서는 딱히 걸리는 게 없어 보이는데.”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아레나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이안은 다행이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거절하기는 했는데, 혹여 자신이 모르는 어떠한 술수로 인해 마법부에 피해가 갈까 걱정되었던 게다. 아레나는 펜대를 손끝으로 까딱거리며 그런 이안을 주시했다.
“이안.”
“예, 장관님.”
“넌 너무 걱정이 많아.”
“예?”
아레나는 의아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렇지 않은가? 마법부에 피해가 가면 뭐?
“마법부를 책임지는 건 나나 저기 대장들이지, 막 들어와서 재고 관리나 하는 막내가 생각할 일이 아니거든.”
크로니가 제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뒤에서 수작질을 한다고 한들 마법부는 견고할 것이다.
“설령 타격이 있어도, 그 몫은 우리 거라고. 이안 하델, 네가 책임질 게 아니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황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네 책임 같은 건 없으니까 죄책감 느끼지 말라는 말이다. 이제 고작 다섯 살 난 아이가 무슨.
“넌 일 열심히 배우고, 지금처럼 잘 살면 된다. 가끔 나가서 마법사도 주워 오고. 어우, 그러면 바랄 게 없어요.”
아레나가 이안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이르자, 이안 역시 작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걱정은 그만하고! 어서 퇴근해! 나한테서 퇴근하라는 말 듣는 거, 흔치 않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오야. 조심히 가고~”
이안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남기고 문을 닫을 때까지, 아레나는 싱긋 웃는 모습을 유지했다.
끼이익.
쿠웅.
비록 문이 닫히자마자 정색하며 혀를 차 댔지만.
그녀는 인상을 팍 찡그린 채 미간을 꾹꾹 눌러 댔다. 크로니 이 자식이, 갈 거면 곱게 갈 것이지 마지막까지 별 지랄을 다 하네.
‘근데, 이안 하델의 의심이 영 근거 없는 건 아니야.’
아레나 역시 북쪽 출정에 크로니가 가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뭐랄까. 북쪽으로 가는 것이 제국방위부 소속에게는 좋은 기회인 게 맞지만, 크로니 그 작자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중앙에서 떠나 있는 걸 원치 않아 할 거라고 예상한 것이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중앙을 떠나?’
분명히 크로니가 가는 이유가 따로 있을 터.
아레나는 밖에서 대기 중인 보좌관을 불렀다.
“밖에 있나?”
“예, 장관님.”
“제국방위부 소식 좀 몰아 봐. 크로니 대장이 북쪽 출정군 지휘관으로 정해진 듯싶은데, 내부 분위기나 뭐 그런 거.”
“아, 그거라면 저도 흘려들은 것이 있습니다.”
“잘 됐네. 뭔데?”
아레나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원래는 부장관이 간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갑작스럽게 크로니 대장으로 정해졌다 합니다. 장교들은 별 반응이 없고, 부장관이 상당히 불쾌했다고 하더군요.”
“아아.”
알겠다. 장관과 짝짝꿍해서 부장관 제치고 크로니가 그 자리에 오르려는 것이다. 이번 북쪽 출정만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면 부장관 정도는 문제 될 것이 없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어, 정보란 정보는 싹 다 긁어 봐. 우리 막내님께서 걱정이 많으신 것 같다.”
“이안 하델 말씀이십니까?”
“그래. 귀족이라 그런가, 자꾸만 뭔가를 짊어지려고 하네.”
아레나의 마지막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보좌관은 알겠다며 장관실을 나갔고, 저 멀리 혼자 걸어가는 이안 하델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혼자 가나?’
마차를 따로 불러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기다리고 있던 한스와 나움이 이안에게 달려왔고, 다른 일 보며 기다리고 있던 로만드로와 바르사베 역시 이안을 찾았다. 보좌관은 입꼬리를 말며 아레나가 지시한 사항을 수첩에 적었다.
스윽.
지시 사항이 있었으니 알아보긴 할 건데,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전부일 가능성이 컸다. 크로니가 부장관 자리를 노리고 있다-가 모든 소문의 근원이자 중심축일 터.
‘제국방위부라, 여긴 또 은근히 투명해서 말이지.’
하지만 얼마 안 가, 아레나를 비롯하여 보좌관 그리고 황궁 모두가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게 밝혀졌다. 크로니가 품고 있던 검은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