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04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04화(904/935)
제904화. 서서히 불어오는
“왜 그러십니까, 아레나 장관.”
왜 그러냐고?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내 눈에 다 보이거든.
장관 죽이고, 부장관 의심받게 만들어서 윗대가리 둘을 한꺼번에 골로 보내? 거기다 크로니 새끼는 북쪽으로 출정 보내서 알리바이까지 만들고? 미친 자식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아레나는 꾹 참았다. 참 나. 부장관 제낄 거라고는 예상했어도, 살다 살다 장관을 죽여서 판을 휘어잡을 줄은 몰랐다.
“아레나 장관?”
아레나는 손끝을 부들부들 떨어 대며 입만 벙긋거렸다.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이 중에 누가 크로니와 뒤에서 손을 잡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발 새끼들.’
아레나는 차분하게 손끝을 구부리고서는 발언했다.
“크로니 대장이 중앙에 없었다 한들 용의 선상에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부장관이 범인이라 생각하시는 분들, 그자가 샤르토 장관 목에 칼을 직접 찔러 넣을 자로 보입니까? 이렇게 대놓고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암살자를 이용하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알리바이였다. 반드시 크로니가 직접 해야 한단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건 크로니도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어쨌거나 ‘부장관’이 범인으로 몰릴 수 있도록 어떤 조치를 취했다는 뜻인데…….
‘그게 뭐든 대가리 한번 잘 굴렸네.’
장관과 부장관을 단번에 제껴서 속전속결로 제국방위부를 먹어 버리겠다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아레나는 문득 이안이 크로나의 북쪽 출정을 미심쩍게 생각한 걸 떠올렸다. 이안의 직감은 놀라울 정도로 예리했다.
“그래도 정황상 부장관이 범인일 확률이 가장 높지 않습니까? 서로 다퉜다는 증언도 나왔고요. 그러니 임시 장관은 안전하게, 부장관 쪽 인물을 피함이 합리적이지요. 크로니 대장도 따지고 보면 대립하는 쪽이다, 이 말씀입니다.”
관료들이 끄덕이며 동의했으나, 아레나 생각은 확고했다.
‘지금 공석에 누가 올라가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크로니는 곧 터질 전쟁의 총지휘관이다. 현 시국, 가장 강한 병권과 영향력을 가진 군인이라는 뜻.
북쪽과의 분쟁을 끝내러 갔다지만, 소수민족 놈들이랑 뒤에서 붙어먹고 바리엘 쪽으로 검을 겨눌지 누가 안단 말인가?
‘전쟁을 일단락시키고 돌아오면?’
줄곧 북쪽 정벌을 반대했던 황제의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전쟁을 막은 크로니를 신임하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크로니가 장관을 죽인 사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터. 크로니가 제국방위부의 일인자가 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임시 장관을 선정하되, 수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장관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를 막으려면, 크로니가 주범이라는 증거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래야 놈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걸 막을 수 있다.
아레나의 제안에 다들 머뭇머뭇 서로를 쳐다봤다.
“장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습니다만, 제국방위부의 권한 제한에 대해서는 우리가 논의할 부분이 아닙니다.”
“상고하기 곤란하시면, 황제 폐하께는 제가 직접 건의하겠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하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아레나가 불쑥 내뱉었다.
“왜요, 제국방위부가 한마디 할까 무섭습니까?”
“예? 아니, 무, 무슨 그런 말씀을!”
관료들은 노발대발했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장관 피살로 제국방위부 내부가 소란스러운데, 바깥에서까지 견제하려 든다며 반감을 가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혹 그중 누군가가 훗날 제국방위부 장관직에 정식으로 임명된다면, 서로 얼굴 보기 껄끄러워지지 않겠나?
“이름 함께 써 낼 분은 마법부로 연락 주십시오.”
아레나는 기대도 안 한다는 듯 대충 이르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샤르토 장관 피살 사건은 제국의 기강을 뒤흔드는 큰 사건입니다. 투명하고 공정한 수사 과정을 위하여 마법부에서도 업무 지원을 할까 합니다.”
“마법부에서요?”
“예. 용의자 심문 시 실담물약을 사용하죠.”
그렇게 되면 범인이 누구인지, 배후가 있는지까지 빠르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관료들은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는지라 작게 침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참, 추수감사제 앞두고 이 무슨 불경한 사달인지, 원.
“그럼, 이만.”
아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관료들도 하나둘 회의장을 떠났다. 다들 머릿속이 바빴다. 크로니가 제국방위부 장관이 된다면 황궁 정세는 어찌 변할 것인가?
예상하건대, 분명히 두 세력으로 나뉠 것이다. 크로니와 손을 잡은 쪽과 반대에 선 쪽.
“아레나 장관님. 회의는 마치셨습니까?”
“그래. 별 얘기는 없었어. 바깥에서 소식 들어오는 대로 나한테 올리고, 실담물약 물량 확보 좀 해야겠다. 쓸 일이 많을 거라서.”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때 이안 말을 좀 더 들을걸 그랬네.”
“예?”
“됐어. 출발하지.”
크로니가 북쪽에 가는 게 이상하다는 아이의 말 말이다. 자신도 나름 신경 써서 이것저것 확인해 보긴 했다만, 여기까지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저기, 장관님.”
“응?”
보좌관이 마차에 올라타며 난감한 얼굴로 보고했다.
“이안 하델 말입니다. 황궁에 출입했다 합니다.”
“뭐?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예, 전달은 했는데, 그, 폐하께서…….”
“폐하께서 불렀다고?”
“지금 본궁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어찌할까요?”
황제 폐하가 어째서 이안 하델을 부른 거지?
평소라면 나중에 확인해도 될 일이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레나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잡아 뜯을 것처럼 당기더니, 침착하게 한숨 쉬었다.
“보고서.”
마차에서 업무 보겠다는 뜻이었다. 이안 하델이 나올 때까지.
“여기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며, 보좌관이 미리 준비한 서류철과 펜을 건넸다. 아레나는 분노의 서명을 박박 갈겨 대면서도 본궁 출입구 쪽을 연신 살폈다.
‘제국방위부가 타 부서를 모조리 장악한다 한들, 두 군데는 절대 범할 수 없다. 황궁친위대와 마법부.’
제국방위부의 힘만으로 이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황궁친위대 아님 마법부 둘 중 하나를 먼저 족칠 수도 있다는 건데.’
개새끼. 내가 눈 뜨고 당하나 봐라. 차라리 내가 먼저 찾아가 죽이고 혀 깨물고 말지.
아레나는 복잡해진 머리를 흔들며, 서류 종이를 찢어질 듯 넘겨 댔다.
* * *
이안은 창밖의 복숭아나무를 쳐다봤다.
바깥의 나무들을 붉은색으로 물들어 계절의 흐름을 보이었지만, 이곳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듯싶다.
아마 마법의 힘이겠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그리고 언제 져 버릴지도 모를.
끼이익.
안쪽 문이 열리자, 휠체어를 탄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담요로 무릎을 덮은 채, 시선은 살짝 아래로 가 있었다.
인기척에 이안이 일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안녕하십니까, 폐하.”
“으응…. 그래, 이안 하델이군.”
황제는 시종들의 부축을 받아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주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몸짓.
이안은 차분하게 황제가 누울 때까지 기다렸다. 도톰한 이불 위로 그의 앙상한 손가락이 덮였다.
“에너제스에 다닌다고.”
“예, 폐하.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친우는? 사귀었는가?”
황제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하자, 시종이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황제의 곁에 섰다. 병든 노인에게선 참으로 좋은 냄새가 났다.
“네. 좋은 친구들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로고.”
“한데, 송구하오나 무슨 연유로 부르신 것인지…….”
이안은 시종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해도 되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종은 시선을 내리깐 채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황제 또한 가쁜 숨을 붙드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안 하델.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이든 하문하십시오.”
황제가 빛바랜 눈동자로 이안을 내려다봤다. 오랜 세월 바리엘의 정점에 서 있던 자이지만, 지금은 침대 위에서 한 발 자국도 홀로 내려올 수 없는, 노쇠한 인간…. 이안은 그 괴리가 주는 눈빛이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후손이 없음은 저번에 일렀기에 알고 있겠지.”
“예, 폐하.”
“혹시 내가 세상을 뜨게 되면, 아마도 내 자리는 네 것이 될 게다.”
“……!”
너무도 갑작스러운 말에 이안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뒤꿈치가 의자에 부딪히며 끼익-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황제가 덧붙였다.
“이안 하델. 방계이나 황실의 피가 흐르고, 귀족 최초의 마법사가 아니더냐. 나이가 너무 어린 것만 빼면, 모두가 이견 없이 따를 것이다.”
나이가 너무 어린 것. 그래, 그것이 걸림돌이었다. 황제는 잔기침하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안, 네가 황제가 되면 필시 누군가 섭정을 자처할 것이다. 너는 신께서 내려 주신 축복이니 바리엘의 미래를 걱정하지는 않는다만, 네 곁에서 말을 덧댈 그 누군가는 심히 걱정되는구나.”
“폐하.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그때였다. 황제가 마른 손으로 이안의 손목을 꽉 쥐었다. 놀랍도록 뜨겁고 단단한 힘. 황제는 눈을 똑바로 뜨며 아이에게 부탁했다.
“그러니까, 네가 클 때까지, 적당한 시기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내 건강이 끝자락에 닿았을 때 나를 동결시켜 다오.”
“동결이오?”
“그래. 바리엘 초대 선황께서도 그리하셨고, 나의 고조할아버님께서도 선택하신 길이다. 혹여 나의 죽음이 너무도 이르다 싶으면 지체 없이 마법으로 내 숨결을 멈추어라. 네겐 그만한 힘이 있으니.”
“하, 하오나…….”
이안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자신은 동결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고, 설령 안다고 한들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아레나 장관과 논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너를 불러 이리 부탁하는 것은, 네가 선대부터 내려오던 황가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자들은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아레나 역시 유능하고 대단한 마법사지만, 유대감을 갖고 지난 세월을 보낸 건 아니었다.
“이안,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열심히 연마하여 서둘러 자라거라. 그리하여 자신의 죽음이 황실에 해가 된다 판단될 때는, 지체 없이 동결 마법을 사용하라.
“이는 내 곁을 지키는 아주 소수의 인원만이 아는 사실이다.”
침실을 정리하는 시종 두엇과 황궁친위대 대장. 황제는 서랍에서 동그란 배지를 꺼내 건넸다.
“내게 문제가 생겼을 때, 이것이 신호할 것이다.”
일종의 호출기다. 이안은 황제가 준 것을 두 손으로 받고서 결연하게 꽉 쥐었다.
“해당 내용에 관해서는 녹음을 남겨 두마. 자세한 건 헤르치 대장이 전해 줄 것이다. …이안 하델-”
황제는 바로 누우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깊은 눈가로 눈물이 고였다. 스스로 바리엘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는 후회와 그럼에도 이안 하델이라는 마지막 보루가 있다는 안도감 따위가 한데 섞이며 복잡한 감정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황제가 이안에게 해 줄 당부는 명료했다.
“아무도 믿지 마라. 황제는 홀로 서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좀 졸립구나.”
황제의 말에 시종이 다가와 이불을 정리했다.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난 이안은 인사를 남기곤 황제의 침실을 나왔다.
‘말도 안 돼.’
내가 황제라니. 이 황궁의 주인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지라 머릿속이 어지럽다 못해 펑 하고 터질 것 같았다.
과연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까? 바리엘을 넘어 가이아 전역의 미래가 달려 있는 이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을까?
“이안 하델 님?”
그때,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처음 보는 사내였다. 이안은 재빨리 배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그를 올려다봤다.
“누구시죠?”
그러자 사내는 장갑 낀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예,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국방위부 장교, 소렌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