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06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06화(906/935)
제906화. 크로니의 저택
이안과 로만드로, 해나는 거대한 저택을 올려다봤다. 아이는 꽃다발을, 두 사람은 과일바구니 따위를 손에 든 채였다.
미리 연락을 받고 마중 나와 있던 집사가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이안 님.”
“반갑소, 이안 하델이오.”
“예, 저는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집사의 눈짓에 시종들이 과일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다만 꽃다발만은 그대로 두었는데, 집사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부탁했다.
“꽃은 이안 님이 큰 주인님께 직접 전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하지.”
“들어오시지요. 마침 약 드실 시간이라 일어나 계신답니다. 다만 손님맞이를 위해 옷을 갈아입으셔야 해서요. 응접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세 사람은 응접실 소파에 앉았고, 끝없이 나오는 다과를 쳐다만 봤다.
집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 로만드로가 작게 속삭였다.
“저기, 이안-”
“쉿.”
하지만 이안은 잠시 기다리라는 듯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서 마력을 개방했다.
지이잉! 지잉!
사아아악!
가벼운 금빛 아우라가 주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정식으로 마법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마력을 제어하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로만드로와 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력을 눈으로 쫓았다.
“특수한 장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녹음 장치나, 뭐 그런 것 말이다.
이안이 한 차례 확인했음에도 로만드로는 누가 들을라 여전히 작게 속닥거렸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크로니가 암살을 사주했단 증거를 찾는다고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무리인 것 같은데요. 저택 구조도 잘 모르고…….”
무엇보다 어린 이안과 자신들이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무리 천재 마법사라도 말이다.
그러자 해나가 옆에서 로만드로의 팔을 꾹 찌르며 덧붙였다.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십니까? 저택 구조를 알 필요는 없습니다. 뭐든 증거는 서재에 있겠지요.”
“그러니까! 손님 된 입장으로 거길 어찌 들어가냔 말이야.”
“해 보지도 않고 왜 이래요, 정말?”
“난 심장 떨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어.”
“이안 님, 저만 믿으세요. 제가 단단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안이 아코렐라의 ‘물약 키트’를 가져온 것처럼, 해나 역시 ‘만능 문 따개’ 도구를 챙겨 온 참이다. 실력 발휘 제대로 해 보겠다는 듯 히히 웃는 해나 옆에서, 로만드로는 긴장해 이만 딱딱거렸다.
“해나. 조심해야 해. 크로니가 두 번이나 나를 저택으로 불렀어. 정말로 병환 깊은 아버지를 위해서였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을 저택으로 끌어들인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
이안은 긴장한 낯빛으로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로만드로와 해나 역시 정자세로 앉아 눈만 데굴데굴 굴려 댔다. 혹여 뭔가 단서가 있을까 싶어서.
“잠시.”
이안은 테이블 위 메모지나 책 따위를 빠르게 살펴봤다. 두 사람도 도울까 싶어서 엉덩이를 떼려던 순간-
끼이익.
“실례합니다.”
집사가 노인 한 명을 부축하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서 있는 이안을 보고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로만드로는 괜히 헛헛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안 님, 앉으셔야지요. 워낙 기운이 넘치셔서 한시도 가만있질 못하시네요.”
“아, 으응.”
이안은 철부지 아이인 척 볼을 긁적거리고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이어 노인을 올려다봤다.
마지막을 정리 중인 노인답게, 안색이 상당히 안 좋아 보였다. 그는 최대한 천천히 소파에 몸을 기대고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그래, 이안 하델 군?”
“안녕하십니까.”
“라토 알파트일세. 이리 보는 것은 처음인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피를 잇고 있다고는 하나 남과 다를 것 없는 사이다. 노인은 차를 권한다는 듯 손짓했고, 이안은 마시는 척 입만 댔다.
“그래, 마법사라고. 바쁠 터인데 노인네를 위해 시간 내주어 고맙군.”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자크 백작저에 의탁하고 있다 하던데, 불편하지는 않나?”
이안은 노인의 의중을 파악하며 조심스레 답했다.
“아니요. 친자식처럼 잘 대해 주셔서 불편함 하나 없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그렇군. 그렇다면 다행이네만, 그래도 가족과 남은 분명히 다를 터인데.”
로만드로와 해나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무슨 말을 할지 대충 눈치챘다는 듯.
“가족을 두고 엄한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은 하델 가문의 품격에도 어울리지 않지. 이안 하델, 이곳 저택에도 남는 방이 많고, 에너제스와 황궁까지 거리도 가깝네. 이제 그만 이곳으로 들어오는 게 어떤가?”
이안이 무어라 답하기 전에, 그가 덧붙였다.
“내 아주 예전에 부탁받은 적이 있지. 이안 하델, 자네가 혼자 남게 되면 내 자식처럼 거두어 남부럽지 않게 보살펴 달라고 말이다.”
“누구에게 말씀입니까?”
“누구긴.”
이미 세상에 없는 이안 하델, 너의 부모님이지.
이안은 저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부모님이 그리 말씀했다면 자신에게 진작 언질을 주었을 터다.
하지만 이안은 대놓고 반박할 수 없었다. 예의에 어긋난 행동임은 물론, 저자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네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리는구나.”
“걱정 감사합니다만-”
무어라 대답하려던 이안이 말을 멈췄다. 로만드로와 해나가 콕콕 찌르듯 아이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에 이안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그럼, 저택을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저택을?”
“예. 저택으로 들어오길 원하시니 미리 살펴보고 싶습니다.”
이에 라토는 잠시 고민했다.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듯. 하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마음껏 살펴보고 함께 살았으면 좋겠구나.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 적적하지 않게 곁에 있어 주려무나.”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래. 이안 님은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해나가 입을 비죽이자,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집사께서 안내해 주시렵니까?”
“예, 물론입니다. 밖에 누구 없는가?”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이 들어와 라토를 부축했다. 다시 침실로 돌아가 약을 먹으려는 게다.
“저택 구경이 끝나면 다시 침실로 와 다오. 그때는 혼자서만. 내 긴히 할 얘기가 있어.”
“…알겠습니다.”
마른 낙엽이 스쳐 지나가듯, 노인은 힘없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집사는 이안에게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따라오라 앞장섰다.
“이쪽입니다. 저기 보이는 문이 식당이고, 붙어 있는 복도를 따라 나가면 안뜰과 이어집니다. 큰 창이 인상적이지요? 아침만 되면 햇살이 바로 들어와 한겨울에도 따뜻하답니다.”
집사가 저택 곳곳을 소개했다. 저 작품은 유명한 화가인 누가 그린 것이고, 가격이 얼마쯤 하며, 저택의 아치형 지붕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가 어쩌고저쩌고…. 하나하나마다 애정과 자부심이 묻어났다.
‘참 나. 그렇게 대단한 집이면 이거 갖다가 팔면 되겠네. 가진 것들이 더 욕심부린다더니, 왜 이안 님한테 지랄들이야?’
가만 들을수록 짜증 난 해나는 미간을 팍 찌푸렸지만 말이다.
반면 이안은 무슨 생각인지 담담히 집사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 저쪽은 서재입니다.”
드디어 왔다. 본관 4층, 맨 안쪽 복도에 있는 방. 이안과 해나, 로만드로가 동시에 멈칫거렸다.
“크로니 경의 개인 서재입니까?”
“그렇습니다.”
“구경해 볼 수 있소?”
“오, 아쉽지만 그건 불가합니다. 작은 주인님이 안 계실 때는 아무도 출입하지 않거든요.”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다? 즉, 잠겨 있다는 말이다. 세 사람은 서로 시선을 나누고는 조용히 집사를 뒤따랐다.
저택 구경이 한 차례 끝나자, 집사가 이안에게 물었다.
“그럼 큰 주인님 침실로 가시겠습니까?”
“아, 그 전에 잠시 손을 씻어도 되겠소?”
“물론이지요. 저쪽입니다.”
이안의 신호에 로만드로가 함께 세안실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잘 관리된 공간. 수전이 금빛으로 반짝일 정도다.
이안은 받침대에 올라 수도꼭지를 틀더니, 로만드로를 힐끔거렸다.
솨아아아.
“로만드로, 준비되었지요?”
“예!”
그러자 이안이 마력을 개방해 수도꼭지를 가볍게 비틀었다. 물줄기가 사방으로 치솟자, 로만드로는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뜨아아악!”
모두 들으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자 집사와 해나가 놀라서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머! 이안 님!”
그 짧은 사이 흠뻑 젖은 두 사람. 수도꼭지에서는 물줄기가 사방으로 뿜어지고 있었다. 집사는 당황해서 수건을 챙겨 줬고, 해나는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갑자기 수도꼭지에서 물이 터졌소.”
“그럴 리가 없는데, 관리를 매일 하는 터라…….”
집사가 중얼거리자 해나가 눈을 번뜩이며 쏘아붙였다.
“그럼, 뭐, 지금 이안 님이 고장이라도 냈다는 거예요? 뭔 수도꼭지가 어떻게 하면 어린아이가 돌린 걸로 고장이 난답니까?”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에구, 어째요. 이안 님 옷도 없는데. 감기 걸리시겠네.”
“해나, 저기, 나도 젖었네.”
“아, 예. 로만드로 님도요.”
“끄응.”
너무 영혼 없는 거 아닌가…. 조금 속상한 얼굴이 된 로만드로를 뒤로하고, 해나가 집사에게 덧붙였다.
“갈아입을 옷은 없습니까?”
“아, 어린아이 옷이…….”
있을 리 만무했다. 크로니의 저택에는 아이가 없었으니까.
“아니, 큰 주인님 뵈러 가는데 홀딱 젖은 채로 갈 수도 없고, 이대로 있다가는 감기 걸리시겠습니다.”
“예. 저도, 저도 옷 좀 빌려 주십시오.”
로만드로까지 가세하자, 집사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님께 맞는 옷을 찾아보겠습니다. 아마 크로니 님이 어릴 적 입던 옷이 있을 것입니다. 잠시만 안쪽 방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따뜻한 차도 내오겠습니다.”
“차는 됐습니다. 벽난로를 피워 주십시오.”
“예, 잠시…….”
“나가실 때 문 꼭 닫아 주시고요. 감기 걸리실라.”
집사는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자 세 사람이 후다닥 주머니를 뒤적거려 ‘키트들’을 꺼냈다.
“어린아이 옷을 구해 오려면 시간 좀 걸릴 겁니다. 이안 님, 제가 문을 딸 터이니 안에 들어가서 증거를 찾아보세요. 제가 글이라도 알았더라면 같이 들어갈 건데…….”
“괜찮아. 할 수 있어.”
“물약은요?”
“여기.”
이안이 투명화물약을 꺼내자, 로만드로가 물었다.
“잠깐. 동시에 마시겠다고?”
“네. 왜요?”
“왜긴? 나눠서 마시면 지속 시간이 줄어들 것 아닌가. 일단 해나가 먹고 가서 문 따고, 그다음 이안 님이 먹고 가는 것이 낫지.”
“하지만 로만드로.”
이안이 슬쩍 발을 쳐다봤다. 이미 흥건하게 젖은 터라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정도다.
“몸은 투명해져도 발자국이 남습니다. 몸이 젖지 않은 해나랑 함께 가서 발자국을 지우며 돌아와야 합니다.”
“아.”
그렇구나! 서재 안쪽 흔적은 이안이 지우거나, 아무도 안 온다 하니 자연 건조되도록 두면 될 일. 복도의 흔적만 지우면 된다.
뽀옹.
이안이 먼저 투명화물약을 마시고, 남은 것을 해나에게 건넸다. 곧 사아아악, 두 사람의 발끝과 손끝이 천천히 지워지며 완전히 투명해졌다.
“잘 다녀오게, 응?”
로만드로가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다. 그는 허공에다 대고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갔어? 간 거야?”
조용한 사위. 이에 로만드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려는 찰나-
“안 갔어요.”
“흐익! 까, 깜짝……!”
끼이익.
곧 천천히 열리는 문과 두둥실 떠오르는 수건. 두 사람의 발자국이 바닥에 희미하게 찍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