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07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07화(907/935)
제907화. 서재
찰박찰박.
바닥에 작은 발자국이 나자 해나는 이를 닦아 내며 움직였다. 역시나 굳게 잠긴 문손잡이. 해나는 손끝이 기운을 집중하여 구멍에 철사를 밀어 넣었다.
찰그락.
“해나, 되겠어?”
“예, 이 정도는 뭐. 근데 제 손이 안 보여서 조금, 음.”
평소보다 서툴게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초조하게 난간 아래를 살폈다. 다행히 오가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철커덕. 철컥.
“어, 됐다. 들어가세요. 이안 님.”
순식간에 열린 문. 이안은 고맙다고 말하며 안으로 쏙 들어갔고, 해나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물기 하나 없게끔 복도를 닦으며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끼이익.
크로니의 서재로 들어온 이안은 우선 주위를 살폈다. 정갈한 느낌의 인테리어. 커튼이 쳐져 있어 어두웠지만, 형상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불을 켤까?
지이잉!
이안은 손끝에 작은 마력구를 만들어 냈다. 반딧불이처럼 자그마한 빛이었으나, 주위가 환해졌다. 이안은 우선 책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서랍을 뒤졌다.
사락.
혹여 종이가 흐트러지는 일 없게 순서를 지키며, 빠르게 글자를 읽어 내용을 파악했다. 대부분 저택 운영에 관한 보고서였다. 글씨체가 익숙한 걸 보니 집사가 쓴 것이다. 초대장의 필체와 비슷했다.
‘없어.’
책상 위에는 특별히 신경 쓸 만한 것들이 없었다. 서랍을 위에서부터 열어 가던 이안은, 맨 아래 칸까지 텅 비어 있음을 확인했다. 말도 안 돼.
‘뭔가 이상해.’
개인 서재인데 서랍이 이렇게 깨끗할 수 있다니? 단순 업무만 보더라도 이럴 수는 없다. 이안이 망연자실하게 서랍을 넣었다 빼는 순간이었다.
“어?”
서랍 깊이가 다른 게 느껴졌다. 마치 숨겨진 공간이 있는 것처럼. 이안은 세 번째 서랍 안쪽에 손을 넣어 더듬거리다가 작은 홈이 나 있는 걸 발견했다.
‘여기다.’
고개를 숙여 안쪽을 살피던 이안은 뭔가 섬찟함을 느꼈다. 어떠한 특별 장치 없이 홈으로만 이루어진 비밀 공간이라. 손을 넣어 잡아당기면 그대로 나올 것 같긴 한데, 크로니 성격상 이렇게 허술하게 장치를 마련해 두었을까?
스윽.
이안은 쪼그려 앉아 아코가 챙겨 준 물약 키트를 살폈다.
“번개탄… 이건 대체 왜 챙겨 준 거야.”
그리고 다음으로는 분신물약, 환각물약.
이안은 분신물약을 가만 들어 살피다가, 뚜껑을 따 한입에 털어 넣었다. 달콤한 딸기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사아아악.
몸에 열감이 느껴지더니,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어느새 눈앞에는 투명화되지 않은 자신이 한 명 더 나타나 멀뚱히 서 있었다.
“오.”
“오.”
“…안녕?”
“…안녕?”
똑같이 따라 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분신. 마치 낯선 육체에 적응하려는 듯 어색하기만 했다.
이안은 분신에게 홈을 잡아당겨 달라고 부탁했다.
“여기 안쪽 있지.”
“안쪽 있지.”
“홈을 잡아당겨 볼래?”
“잡아당겨 볼래?”
“…자꾸 따라 하지 말고.”
“따라 하지 말고.”
끄응. 상태가 영. 이안이 못마땅하게 눈을 가늘게 떴으나, 분신은 아무렇지 않게 눈을 깜빡이며 홈에 손을 넣었다.
그 순간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틈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더니-
파지지직! 파직!
갑작스러운 빛줄기가 터지며, 분신의 몸을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
“……!”
이안이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났고, 분신은 자신이 지워지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하, 함정.’
무턱대고 손을 넣었더라면 자신이 저렇게 타서 죽어 버렸을 것이다. 이안은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바깥에 도움을 청했다.
“해나. 해나, 거기 있어?”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이 없다. 물약의 효과가 떨어졌든, 아니면 무슨 이유로 인해 먼저 돌아간 게 분명했다.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다 받침대 천을 빼 들어 손에 감았다.
‘분신이 조금 틈을 열어 줬으니 내가 잡아당기기만 하면 돼.’
괜찮을까? 혹시 몰라 보호막을 펼쳐 봤지만,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크로니가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확 인지했다. 자신을 겨냥한 함정은 아닐지언정, 선을 넘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는 성정을 엿본 것이다.
끼이익.
조심히, 더 조심히. 이안이 서랍을 열자, 안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와 작은 보석함이 드러났다. 이안이 그걸 집어 들려고 하는 순간-
“옷이 맞을까요?”
“아마도. 그나저나 저택 수도 관리는 누구야? 당장 잘라 버려. 이게 무슨 개망신인지.”
“알겠습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안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천천히 서류를 살폈다. 분명 해나와 로만드로가 시간을 더 끌어 줄 것이다.
사락.
‘은행 계좌 목록이잖아. 이걸 왜 여기 보관하고 있는 거지?’
이안은 작은 손으로 입금과 출금을 상세히 살폈다. 그러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나. 크로니는 생각보다 자금력이 없었다. 돈이 입금되자마자 각기 다른 곳으로 이체되었는데, 이 탓에 당장 사용 가능한 금액은 금화 100여 개 정도.
‘어? 여기, 이체가 아니라 출금한 기록이다.’
재산에 비해 상당한 돈을 현금화했는데, 그 항목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안은 일단 그 날짜와 금액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는 다음 서류를 살폈다.
“…이거다.”
그리고 발견한 명함 한 장. <흑정단>이라고 적힌 명함이었는데, 아무래도 상단인 것 같다. 상단주의 서명이 있어 초대장의 역할도 하는 듯 보였다.
‘혹시 이쪽에 암살을 사주한 것이 아닐까?’
이안은 고민하다가 명함을 챙겨 넣었다. 크로니가 돌아와 책상을 보게 된다면 누군가 침입하여 함정이 발동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다. 어차피 알게 될 거, 챙겨 가든 말든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았다.
사아악.
그때, 이안의 손끝이 색을 되찾았다. 투명화물약의 효과가 떨어진 것이다. 여기서 복도를 지나 방까지 돌아가려면 좀 걸어야 하는데…….
달깍.
이안은 걱정하면서도 연신 손을 멈추지 않았다. 구석에 들어 있던 보석함을 여는 순간이었다.
“아.”
몸이 굳어 버렸다.
호박색의 눈에 익은 마석, 이드갈이다. 어떤 경로인지 모르겠지만 아코가 겨우 하나 갖고 있던 것에 비해 알이 크고 단단해 보였다.
‘이건 마력을 파훼하는 마석이라 그랬는데.’
아코는 연구 목적이 분명해 보이지만, 크로니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걸 가진 걸까? 아니, 그 전에 어디서 이걸 구한 걸까? 이안은 불길한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다 챙겨.’
증거로 삼을 만한 것들은 모두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안은 다른 서류들도 살폈지만, 대부분 암살 사건과 별 상관 없어 보이는 것들뿐이다. 이쯤에서 슬슬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달깍.
문을 살짝 열어 바깥을 엿보니, 복도에 시종들이 서 있었다. 옷가지를 가져다주고 혹시 모를 추가 사항에 대비해 서 있는 것이었다. 투명화가 완전히 풀려 버린 터라 함부로 나갈 수 없다.
“아이참, 완전히 말린 재스민차 말이에요. 없어요?”
“음, 그건 저택에 준비되어 있지가…….”
“그럼 비슷한 꽃차라도 준비해 주세요. 이안 님 이러다 감기 걸리면 어떡해? 마법부에서 큰일 하시는 분인데! 안 그래요?”
“콜록! 콜록!”
해나는 시종들을 물리기 위해 까탈스러운 주문을, 로만드로는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자신을 흉내 낸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시종들은 난감한 기색을 보이다가, 해나가 문을 닫자 꿍얼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유난도 저런 유난이 없지.”
“그러니까. 대충 몸만 데우면 되는 거 아닌가?”
“꽃차라. 흐음. 주방에 남는 게 있었나?”
이때다. 이안은 마지막 남은 환상물약을 몇 번 흔들고는 바닥에 뿌렸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내달렸다.
일렁일렁, 배경이 이상하게 휘더니 천장에 거대한 바퀴벌레가 나타났다. 사람 주먹만 한 크기에 계단을 내려가던 시종들이 기절할 듯 비명을 질러 댔다.
“꺄아아아악!”
“꺄악!”
타앗!
환상물약이라면서 대체 저런 벌레는 왜 나오는 거야? 이안은 달음박질하면서도 아코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때마침 열린 문. 해나가 기다렸다는 듯 수건으로 이안을 감싸 맞이했다.
달칵.
“이안 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바깥이 소란스럽던데요.”
“몰라. 아코가 이상한 걸 줬어.”
대체 뭘…? 해나와 로만드로는 의아했지만 아코라면 어지간하겠다 싶어 말을 아꼈다.
이안은 서둘러 물기를 닦고서 집사가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크로니가 어릴 때 입었던 옷이라 좀 찝찝하지만, 방도가 없다. 지금부터는 들키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했으니.
* * *
한편, 소란에 질색하며 계단을 오른 집사는 빗자루와 먼지털이 따위를 들고서 우왕좌왕하는 시종들을 발견했다.
“무슨 소란이야!”
“처, 천장에 엄청 큰 벌레가-!”
“손님들 계시는데, 이게 무슨!”
집사가 버럭 화를 내다, 문득 바닥으로 시선이 갔다. 시종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거의 지워지긴 했지만, 희미하게 물기가 남아 있었다. 집사는 시종들에게 가만있어 보라는 듯 손짓했다.
‘뭐야.’
손에 젖은 물건을 든 시종은 없다. 근데 웬 물기가? 눈으로 따라가니, 맨 안쪽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저곳엔…….’
서재밖에 없는데?
집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 반대쪽으로 향했다. 이안 일행이 옷 갈아입고 있는 방과 이어져 있다.
“……!”
혹시?
서재 쪽으로 돌아와 문손잡이를 돌려봤지만 다행히 잠겨 있다. 집사는 서둘러서 이안이 있는 곳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벌컥!
“아.”
옷을 갈아입은 이안이 벽난로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로만드로 역시 옆에 함께 앉아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봤다. 이안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인기척을 내주었으면 좋겠소만.”
“시, 실례했습니다. 혹시 불편한 점이 없으신지-”
“집사께서 이리 벌컥벌컥 들어오는 게 불편하오.”
바닥에 흥건한 물기. 분명히 이안이 저쪽 방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데, 증거가 없었다. 갑작스레 몸수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서재 열쇠는 크로니가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송, 송구합니다.”
“집주인께서 제게 함께 살자고 제안 주셨는데, 생각할수록 저랑 맞지 않는 것 같소.”
이안은 벽난로를 쬐며 옷깃을 정리했다.
“인기척도 없이 문이 열리고, 수전은 고장 나서 분수처럼 터지고, 바깥 소란을 들어보니 벌레까지 나왔던 것 같군요.”
그것도 이-따만 한? 보란 듯이 들어 올린 해나의 당찬 주먹은 덤이었다.
이안의 지적에 집사는 할 말이 없어 입술만 꾹 깨물었다. 격 있는 고급 저택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이안은 대충 수건을 옆에 치워 두고서 물었다.
“큰 주인께서는 침실에 계시겠지요? 간단히 인사하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직 앞머리가 살짝 젖어 있었지만, 계속 저택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앞장서라는 듯 고갯짓하자, 집사가 몸을 틀어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해나와 로만드로, 이안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뭐가 되었든 대충 말 마무리하고 ‘튀자’고.
이안은 주머니에 있는 명함과 이드갈을 아레나 장관에게 전해야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력을 파훼할 마석을 크로니가 손에 넣었다면, 정말 위험한 일 아닌가? 이안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이, 라토 경의 침실에 도착했다.
똑똑.
“주인님. 이안 경입니다.”
집사가 문을 두드리며 기척을 내었으나, 안쪽에서 대답이 없다. 다시 한번 똑똑.
“주인님?”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내부.
집사가 화들짝 놀라 문을 열자, 침대에 곱게 누워 있는 라토가 보였다. 너무도 조용히, 숨결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깊게 잠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