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08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08화(908/935)
제908화. 판을 뒤집다
“주인님!”
집사가 달려와 이불을 들추었다. 라토는 아무 반응이 없다. 적막한 공기의 흐름이 그가 더는 호흡하지 않는다는 걸 느끼게 했다.
이안이 놀란 것은 물론, 해나와 로만드로도 당황하여 뒷걸음질 쳤다.
“밖에 누구 없는가!”
“무슨 일이십니까?”
“어서, 어서 베르진 선생을!”
“헉! 예, 알겠습니다!”
복도에서 사라진 벌레를 잡던 시종들이 달려와 사태를 파악하고는 흩어졌다.
이안은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로만드로를 쳐다봤다. 연신 라토를 살피는 집사에게 말 붙일 틈이 안 보였다.
“주인님, 아, 주인님…….”
“저, 저기-”
로만드로의 부름에 집사가 코를 훌쩍이며 몸을 돌렸다. 이안과 해나 그리고 로만드로는 알아챘다. 울먹이긴 했지만, 집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걸.
로만드로는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했다.
“라토 경의 일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하네만, 경황이 없을 것 같으니 우리는 먼저 저택을 떠나겠네.”
장례식이 열리면 그때 다시 오면 될 일.
하지만 집사가 붙잡았다.
“아니요. 송구하지만, 모두 저택에 계셨으면 합니다.”
“어째서?”
집사는 주인의 몸을 끌어안으며 슬픔에 잠긴 투로 중얼거렸다.
“큰 주인님께서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불과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하셨습니다. 사망 선고가 이루어질 때까지만 자리를 지켜 주십시오.”
사망 선고엔 사인(死因)이 필요한 법. 이 말인즉, 죽음의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저택에 머무르란 뜻이었다.
“이보게, 지금 우리를 의심하는 것인가?”
망자를 앞에 두고 큰소리 내긴 싫지만, 로만드로는 황당해서 언성을 높였다. 집사는 그런 것이 아니라며 재차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만, 현재 작은 주인님이 출타 중이신지라 결정권을 가진 가족이 없고, 이안 하델 님은 멀지만 유일한 혈육이시니 상황을 주관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망 선고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장례식 절차는 제가 담당하면 되니까요.”
구구절절 명분이 있는 말인지라 로만드로는 대꾸하지 못하고 이안만 힐끗거렸다.
이안은 제 주머니 속의 이드갈과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두 사람을 돌아봤다.
“어쩔 수 없지. 의사가 와서 사망 선고만 하면 될 일이니 조금만 기다려 보아.”
길어 봤자 한두 시간일 터. 로만드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를 끌어다 이안에게 권했다.
“…….”
째깍째깍, 벽시계 초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집사는 울음을 그쳤고, 방 안에는 기이한 적막만 감돌았다.
스윽.
집사는 이불을 정리하며 크로니가 남기고 간 전언을 떠올렸다.
“이안 하델이 방문하면 아버지가 호흡을 멈출 것이다. 이것은 모두 가문을 위한 일이니 두려워 말고, 동요치도 말라”
집사는 탁자 위에 놓인 꽃다발을 힐끗거리며 크로니의 다음 전언을 되새겼다.
“베르진 선생이 알아서 사망진단서를 써 줄 것이다. 그러니 선생이 도착하기 전에 이안 하델이 가져온 선물을 꼭 테이블 근처에 두어라.”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작은 주인님께서 어찌 저 아이를 잡아 두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뜻이 있으시겠지. 집사는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하며 의사를 기다렸다.
타닥!
문을 열어 둔 터라 복도의 발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드디어 왔구나! 집사는 화색을 띠며 의사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났다.
잠시 후, 퉁퉁한 체형의 의사가 들어오더니, 침실을 둘러봤다.
“어허, 이런.”
“오셨습니까, 선생.”
“그래. 갑자기 이 무슨 비보인가.”
갑자기는 무슨. 죽을 때 다 되어서 주변 정리하던 노인인데. 해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리 생각하던 차였다.
베르진을 따라 들어오는 한 사람. 집사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고, 해나와 로만드로, 이안은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필리아입니다.”
필리아였다. 금발을 하나로 묶은 것이 변함없이 단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베르진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쯧, 차더니 필리아를 소개했다.
“어, 최근에 일을 도와주고 있는 의사일세.”
“라토 경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도움이나 될까 싶어 함께하자 청했습니다. 약초학 전공입니다.”
“아, 예예…….”
집사는 필리아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어찌 된 일이냐는 듯 베르진을 쳐다봤다. 다른 의사가 함께 있으면 주인님이 원하는 대로 사망진단서를 못 쓰는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필리아는 바로 테이블 옆에 놓인 꽃다발을 챙겨 살폈다.
“라토 경이 앓던 알러지는 따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집사님. 맞는가요?”
“예, 하지만 요즘 들어 몸 상태가 영 안 좋아지신 터라…….”
“이건 제가 가져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제 전공이니 문제없겠지요, 베르진 선생님.”
“…그러시오.”
필리아가 꽃다발을 수거하자, 이안은 그제야 자신이 함정에 빠질 뻔했다는 걸 알아챘다.
크로니라면 분명히 라토의 죽음에 자신을 엮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의도 했든 아니든, 어떻게든 죽음의 지분에 조금이라도 이안을 욱여넣어 명분을 만들 인간.
그 생각에까지 닿자, 이안은 라토의 죽음 역시 크로니의 손아귀에서 펼쳐진 연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아.”
“아시는 분입니까?”
이안의 호명에 집사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러자 필리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예전에 이안 하델 경의 아버님 진료를 본 적 있습니다. 오랜만이군요, 이안 님.”
겉으로는 서로 데면데면한 척하는 게 맞다. 그렇지 않으면 크로니 측에서 필리아의 개입을 의심할 터이니.
이안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응, 오랜만일세.”
“어찌 이곳에 계시는지요? 혹 사망 선고를 기다리시는 걸까요?”
“그렇다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필리아는 짐짓 사무적인 투로 그리 이른 다음, 함께 온 베르진에게 눈짓했다. 여럿 발 묶지 말고, 얼른 사망 선고를 내리라는 듯이. 그러고는 옆에 단단히 서서 베르진이 하는 걸 면밀히 지켜봤다.
“사망, 확인되었습니다.”
“사인은……?”
베르진이 꽃다발이 있던 테이블을 힐끔거렸다. 알러지성 호흡곤란 혹은 미상의 독극물 반응 정도로 쓰려 했는데, 필리아가 있는 이상 불가했다. 그녀는 약초학 전공이었으니까.
“…자세한 건 부검을 해야겠지만, 크로니 경께서 동의하실지 모르겠군요. 겉으로 봐서는… 평소 앓고 있던 질환 탓으로 보입니다만.”
“그럼 그리 적겠습니다.”
스윽.
필리아가 차트를 기록하며 일렀고, 베르진은 말이 없어졌다. 로만드로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듯 이안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크흠, 그럼 됐지요? 일에 방해될 것 같으니 우리는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사망 선고가 끝나면 마차를 준비해 주십시오.”
“아.”
집사가 무어라 말하며 붙잡으려 했지만, 해나와 로만드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안을 데리고 침실을 나가 버렸다.
단숨에 계단을 내려가 응접실을 지나고 현관문 앞 벤치에 앉은 그들은, 마차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아, 저기 있군!
“이안 님, 서재에서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응. 아레나 님께 갖다 드려야 할 것 같아.”
“그럼 바로 황궁으로 가시죠.”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으나 마법부랑은 상관없는 문제였다.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지만 장관은 퇴근이라는 개념 없이 장관실에서 살다시피 하니까.
마차를 향해 걸으면서 이안은 고개를 돌려 저택 창문을 올려다봤다. 시종들이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필리아…….”
필리아는 대체 언제 중앙으로 온 걸까? 그리고 어찌 이리 시기적절하게 다시 나타난 거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당장 물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하여 이안은 다시금 마차를 향해 잰걸음 했다. 주머니 속 물건들을 꼭 붙든 채.
* * *
“아레나 장관님!”
“또 왜?”
아레나가 질린다는 듯 서류를 덮었다. 하루도 멀쩡하게 넘어가는 날이 없다 보니, 보좌관이 급하게 부르기만 하면 짜증이 확 몰려왔다.
보좌관은 다급하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제국방위부 부장관, 발견됐답니다.”
“…발견이 되었다?”
이거, 표현이 좀 그렇네?
아레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보고서를 넘겼다.
“부장관 소유의 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자살인 것 같습니다. 옆에 유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유서라…….”
아레나는 필사한 내용을 읽었다. 제국방위부 장관을 죽인 것은 자신이며, 모든 것은 욕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이었고, 이를 너무 늦게 깨달았으며, 가족들을 위해 불명예를 모두 지고 죽는다, 어쩌고저쩌고.
아레나는 작게 한숨 쉬며 물었다.
“필적 감정은?”
“네. 진행 중이라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하듯, 필적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크로니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치밀하게 짜 놓은 판이니까.
“아, 이러면 곤란한데.”
이러다간 크로니가 원하는 대로 사건 종결 나게 생겼다. 범인이 죽었으니 공소권 소멸, 이의 제기조차 할 수 없으리라.
조금만 더 시간을 벌 수 있으면 좋겠는데. 크로니의 짓이라는 걸 밝힐 수 있게끔. 아레나가 이마를 짚은 채 중얼거렸다.
“제국방위부 쪽 움직임은? 크로니를 장관으로 추천한대?”
“지금 흐름으로는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대로 전쟁 마무리 치기에는 모양이 안 살 건데.”
북부에서의 완전한 종전. 전쟁은 제대로 열지도 않았다.
물론 황제가 원하는 것이고, 제국방위부도 권력 결집을 위한 수단으로 이를 이용한 것이라지만, 보는 눈이 하나 더 있지 않나. 바로, 제국민들.
“제국방위부 장관 임명과 맞물려서 전쟁이 흐지부지되면 말이 나올 건데.”
“아, 장관님.”
“응?”
보좌관이 난감하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한 가지 소식이 더 있습니다.”
“뭔데? 불안하게.”
“크로니 경의 부친인 라토 알파트 경이 방금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에 아레나의 손에서 펜이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작정을 했구나.’
이러면 말이 달라진다. 회군에 대한 명분이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쌓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크로니에게 다른 형제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라토 경의 장례를 치를 만한 사람 또한 크로니가 유일하지 않나.
“…바로 오겠네.”
“예, 아마도.”
이 모든 게 우연일까?
아레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크로니가 뒤에서 수작질한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증거를 하나도 잡아내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황제 폐하께서 전서구가 아닌 마법으로 부고를 전달하라 명하셨습니다.”
“하. 예예, 그래야지요.”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당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황제에게, 크로니의 귀환은 고대하던 일.
아레나가 대충 기지개를 켜며 지시했다.
“내일 중으로 포탈 열 거니까 애들한테 수식 계산해서 뒤뜰에 세워 놓으라고 해. 서신만 전하면 되는 거잖아. 작게 작게 가자고.”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부장관 시신, 부검할 거래?”
“형식적으로나마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명예롭지 못한 죽음인지라, 유족들이 서둘러 정리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지랄.”
쯧. 아레나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보고서를 완전히 덮었다.
이렇게 된 이상, 수사에 마법부가 개입할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다. 실담물약을 써서 부장관 취조를 담당하려 했는데 이리 죽어 버렸으니…….
똑똑.
“예, 들어오지 마세요.”
아레나가 반사적으로 농담했다. 한참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자, 아레나와 보좌관이 의아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
보통 마법사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벌컥벌컥 여는데? 이에 보좌관이 직접 문을 열었다.
끼이익.
“아.”
이안 하델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들어가면 안 될까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이안 하델? 들어와! 들어와!”
이런, 미친! 아레나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 직접 맞이했다. 그제야 이안은 조심스럽게 장관실로 한 발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