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1
제91화. 메렐로프의 결말
손님 초대해 놓고 이런 경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였다. 집사는 이안의 잔에 물을 따라주면서 제 주인의 눈치만 살폈다. 메렐로프 저택에 기거하는 모든 자가 백작의 심기만 살피고 있건만, 이안과 그가 데려온 베릭이라는 자는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우와. 냄새 진짜 오진다.”
베릭이라는 자는 코를 킁킁대며 고기 냄새를 마음껏 즐기기까지 했다. 메렐로프 백작이 짜증스러운 투로 물었다.
“이안 경. 저자는 대체 왜 데려왔는가?”
“백작님께서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베릭이라고, 제가 요즘 제일 의지하여 일을 맡기는 자입니다. 식사 초대를 해주셨기에, 소개해 드릴 겸 데려왔습니다.”
혼자 오라는 말 없어서 그리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눈치 없는 척 생글거리는 이안의 태도에 메렐로프 백작은 짜증이 확 올라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놈 먹는 수프에 침이라도 섞어두라 이를걸.
“식사를 들지.”
“네. 주인님.”
백작의 말에 집사가 본격적으로 접시를 나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부자는 망해도 삼대가 간다더니만, 영지 자체는 바짝 곯아서 죽기 일보 직전이라도 저택 사정만큼은 건재했다.
이안은 굴라 요리를 보며 방긋 웃었다.
“굴라에 입맛을 들이신 것 같아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래. 내 별미인 것은 인정하지. 이안 경이 영지민들한테 굴라 매매를 허락했다고 하던데. 이제 아래 천것들도 이 맛을 알아버리겠어?”
“좋은 것은 나누어야 하는 법이지요. 감사하단 인사는 하실 필요 없습니다. 백작님 덕분에 저도 헌납금 일부를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에 따른 감사 인사라고 받아주십시오.”
이안이 물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베릭은 신호라도 떨어진 것처럼 그의 표현대로 ‘음식을 조지기’ 시작했다. 마치 메렐로프의 창고를 죄다 털어버릴 기세다. 달그락달그락, 베릭의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계속해서 울려댔다.
“…천박해도 정도가 있지. 원.”
백작이 대놓고 면박을 주었으나, 베릭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짖어라, 나는 먹을 테니, 하는 태도가 여실했다. 이안은 자신의 그릇까지 베릭에게 넘겨주며 말문을 떼었다.
“이리 식사 초대를 해주시니, 저도 감사한 마음에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클라크라고 했죠. 저번에 주셨던 노예.”
이안의 말에 부인의 칼질이 멈칫거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 이안 밖에 알아채지 못했지만.
“돌려드릴까 합니다. 애초에 이리 큰 거래가 오갈 줄 알았으면 그자를 받지도 않았을 터인데 말이죠.”
“크흠. 뭐, 그리한다면 내 말리지는 않겠네만.”
“공증도 쓰지 않았으니까, 그냥 데려가시면 되겠지요. 음, 그리고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하는데요. 백작님께서 영지민들에게 우리 영지의 굴라 음식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라 권장해 주셨으면 합니다.”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된다면 메렐로프의 돈이 이웃 영지로 넘어가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이때다 싶어 식기를 내려놓고 한마디 쏘아붙였다.
“이안 경, 땅이 갈라지지 않는 이상 그대와 우리는 평생을 두고 볼 이웃일세. 그런데 어찌 굴라 매매 허가와 같은 중대한 일을 그리 혼자 결정해 버리는 건가? 게다가 우리와 매매를 하고 나서 직후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군요. 저희가 메렐로프에 들어가서 물건을 판 것도 아니고, 이쪽 영지민들이 직접 와서 사겠다 하는데 어찌 막겠습니까?”
그래서 경제적 자치권을 다시 한번 확인하지 않았나? 이안은 아예 팔짱을 낀 채로 대답했다. 저 역시도 불쾌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속으로는 별생각 없지만, 이 정도 액션은 취해줘야 협상이라 할 만하니까.
“그리고 백작님과의 매매가 있었기에 저도 거래를 허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 메렐로프와 얼어붙어 있던 관계가 풀어졌다는 걸 의미했으니까요. 백작님께서도 의미가 있다 여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봅니다.”
‘저놈의 아가리…….’
백작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겨우 누르며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나도 의미가 있는 건 아는데 타이밍이 좀 그렇지 않나. 오해할 뻔했네. 내가 굴라를 사자마자 영지민들에게도 거래를 허가했다고 하니.”
“요청드리는 연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백작님이 영지민들에게 소비를 권장하되, 생굴라를 매매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도 단속은 하겠지만 사실 인력이 부족해서요. 공급과 수요는 긴밀한 관계에 있으니, 한쪽만 조심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이안이 식사 초대에 응한 이유였다.
생굴라를 ‘판다’는 행위보다 ‘산다’는 것에 초점에 맞춰 밑밥을 던져놓는 것. 한 달 뒤, 백작이 죽어있다면 모르겠으나 살아있을 때도 가정하여 대비를 해두는 게 안전하지 않겠나.
물론, 베릭 배도 채울 겸 겸사겸사였지만 말이다. 워낙 활동량이 많아서 식비가 감당이 안 되었는데, 가끔 이리하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백작이 혈압으로 넘어가지만 않으면.
“여기 한 그릇 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가득 채워 줘. 째깐하게 자르지 말고.”
베릭이 빈 접시를 들어 보이며 집사에게 요청했다. 백작은 이를 부라리면서도 차마 말리지 못하고 포도주만 들이마셨다.
“…술이 과하세요.”
“좋네. 내 그럼 영지에 일러두지. 생굴라는 금수품목이라고. 그리하면 되겠나? 무슨 뜻인지 자네도 잘 알 터인데?”
백작은 부인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이안에게 경고했다. 협조를 최대한 할 터이니, 저택에서 굴라를 재배하기 전에 생굴라 팔아버리면 가만 안 두겠다는 의미였다. 이안은 부인을 힐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백작님.”
“그럼, 마저 들고 일어나지. 미안하지만, 내 업무가 많이 밀려서. 부인께서 이안 경을 접대하시오.”
제 분에 못 이겨서 식사를 이어갈 수 없나 보다.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백작이 없는 게 훨씬 편한 식사 자리가 될 터이니. 부인은 맡겨 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콰앙!
“후우.”
문이 닫히자, 부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외부 손님이 있을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약 때문인지 요즘 들어 더욱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부인?”
“그럼요. 뭐, 맛있게 먹고 있잖아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입맛이 뚝 떨어진 것처럼 커트러리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눈빛으로 집사를 비롯한 하인 모두를 식당 밖으로 내보냈다.
끼익.
문이 닫히자, 더욱 신명 나게 먹을 것을 해치우는 베릭. 이안은 넌지시 상황에 대해 물었다.
“어떻습니까? 저번에 챙겨가신 화장품은 잘 쓰고 계십니까?”
혹시 모른다. 데르가가 마력석 브로치를 갖고 있었듯 메렐로프 백작도 마찬가지일지. 뜻을 알아챈 부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네. 오늘도 썼답니다.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나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사실 제가 잘 몰라서요.”
“클라크를 데리고 오셨다 하던데.”
“밖에 있을 겁니다. 금화보다 중요한 값어치가 있으니까요.”
부인, 당신을 위해 보내는 거라는 의미가 완연했다. 분명히 메렐로프 백작이 죽으면 가주가 비는 것이니, 이웃 영지인 이안의 입장으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지만, 이는 분명한 호의다.
부인은 고개를 살짝 들며 인사했다.
“그렇군요. 고맙네요.”
“별말씀을.”
“그래도 공짜로 받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저번에 제 반지에 관심이 많으시던 것 같은데.”
의문의 연금술사가 만들었다던 호박색 보석. 그녀는 위층으로 시선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괜찮으시다면 그거라도 드리고 싶네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물어보면 알려주실 건가요? 연금술사의 실패한 보석에 왜 그리 신경을 쓰시는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이안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꺼내 보여줬다.
“사실 저도 비슷한 게 있거든요.”
“어머. 목걸이.”
“같은 연금술사에게서 나온 것 같은데, 제가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것인지라. 여러모로 궁금한 게 많습니다.”
부인은 신기한지 상체를 가까이 붙이며 목걸이를 확인했다. 확실히 자신의 반지와 같은 것이다.
그때였다.
끼익.
하인 한 명이 들어오다 멈칫거리며 문 앞에 우뚝 섰다. 이안과 부인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이다. 식당 안의 그 누구도 수상쩍은 짓을 하지 않았지만, 하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바닥으로 깔았다.
“저, 식기를 바꿔드리려고요.”
“그래. 안 그래도 부를까 했다. 저자 그릇 좀 바꿔주어라.”
부인은 잘 됐다며 손짓했다. 베릭이 소스를 이곳저곳에 묻히고 먹은 탓이다. 하인은 쭈뼛거리며 식탁 위를 정돈했고, 다시금 허리를 숙인 다음 밖으로 나갔다.
“손님들 식사는 아직 하고 계시니?”
“며칠 굶고 온 거 아니야? 뭘 저렇게 많이 먹어?”
“그러니까. 어후, 고기 거덜 나겠네, 원.”
식당에 붙어있는 준비실에서 하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그릇을 옮겨온 하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보다 못한 동료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러고 있어? 안 움직여?”
“어? 어어. 움직여야지.”
“안에서 괴물이라도 봤니?”
“…괴물은 아닌데, 저기, 마님이랑 이안 경이랑 원래 저렇게 친했나? 서로 몇 번 안 보신 줄 알고 있었는데.”
“왜? 무슨 일 있어?”
“들어갔더니… 마님이 이안 경 목덜미를 만지고 있더라고.”
쨍!
너무 놀란 나머지, 동료가 접시를 깨고 말았다. 동시에 주방의 모든 하인이 하던 것을 멈추고 돌아봤다. 다들 사색이 되어서는 입만 뻐끔뻐끔, 이내 문제의 발언을 한 하인을 둘러싸고 경고했다.
“입조심 해, 얘!”
“그러니까, 미쳤나 봐.”
“주인님 아시면 진짜 다 죽어.”
리엔 부인만 죽는 게 아니라, 재수 없으면 하인들 역시 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매질 당할 때 부인의 도움을 한 번이라도 안 받은 자가 있던가?
“허튼소리 하지 말고 눈 감고, 귀 막아.”
“아, 알겠어…….”
“기억에서 잊어. 너 저번에 백작님한테 맞을 때 부인이 대신 들어가서 꼬박 사흘 앓아누운 거 기억하지? 쟤도, 얘도, 부인 아니었으면 팔다리 하나 병신 돼서 쫓겨났어.”
다들 침묵의 결의를 다지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다스렸다. 솔직히, 남편이 저러면 눈이 안 돌아갈 수가 없다. 게다가 이안과는 또래인 데다 천민 출신으로 가주 자리까지 오른 능력도 있고, 무엇보다 미색이 엄청나지 않나.
‘돌겠다. 진짜.’
저택에 소리 없는 폭풍이 부는 기분이었다. 다들 총총거리며 흩어졌고, 이내 문밖에 서 있던 집사 역시 안으로 들어서려는 걸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끼익.
타닥타닥.
집사의 무거운 발걸음이 복도 속 어둠으로 기어들어 갔다. 백작의 집무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안이 부인을 꾀어서 메렐로프를 어찌하려는 것 같은데…….’
하지만 부인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게 전할 방법이 없나? 집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벽에 이마를 기댔다. 저 멀리, 식당 문틈으로 빛 한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집사님?”
그때, 누군가 하인이 그를 불렀다. ‘집사’라는 호칭이 찬물을 끼얹듯 정신을 일깨웠다. 쓸데없는 고민을 한 것이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아니다. 되었고, 식당 접객을 도와라.”
“네. 알겠습니다.”
집사는 하인을 지나치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부인에게 고마운 감정과 인간적인 정이 있는 건 분명했으나, 그 이전에 그는 메렐로프 가의 충성스런 집사였다.
똑똑.
“주인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열리자, 궐련을 태우고 있던 백작이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 갔냐는 걸 묻는 시선이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이안은 평소와 같이 아침을 맞이하고 침실을 나섰다. 하나 다를 것 없이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겨울답지 않게 날씨가 조금 포근해진 것 같기도 하다.
“베릭은?”
“배탈 나서 누워있습니다.”
“걔도 참 어지간하다. 쯧.”
식당에 나온 이안이 차를 홀짝이며 혀를 끌끌 찼다. 베릭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저택 자체가 조용하게 느껴졌다. 로만드로는 늦잠이요, 네르사른과 천려족 대부분은 툭하면 접경지의 관측대에서 날을 보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별자리 점을 치러 가는 것이었다.
타닥타닥!
쿵! 쿠웅!
“뭐지?”
“글쎄요.”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차를 따르던 해나도 멈칫거렸다. 하인이 호들갑을 떨며 넘어질 듯 뛰어왔다.
“이안 님! 이안 님!”
“아침부터 기세가 좋구나.”
“메, 메, 메렐로프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그쪽은 참나, 진짜…….”
“주, 죽었다는데요?”
앞뒤 잘라먹은 말에 이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인은 숨을 헉헉 고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메렐로프 백작이 죽었답니다.”
“그게 무슨, 어제만 해도 같이 저녁 식사를 했건만.”
설마 무호흡증이 예상보다 빨리 온 건가?
하지만 하인의 답은 아니었다.
“클라크가 백작을 찔러 죽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