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12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12화(912/935)
제912화. 운명의 굴레
국경선 너머 설치된 군막. 그 안에 놓인 거대한 원형 테이블엔 각 소수부족의 족장들이 미리 와 둘러앉아 있었다.
각자 이해관계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터라, 그들은 서로를 살갑게 대하지도, 적대하지도 않았다. 바리엘 앞에서는 동지지만, 서로를 대할 때는 오래된 숙원과 갈등의 대상이었으니까.
스륵.
그때, 크로니가 부하들을 이끌고 천막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족장들. 크로니는 다들 앉으라는 듯 고갯짓하며 착석했다.
“갑작스러운 회담 요청에 응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크흠. 별말씀을요.”
“정세가 급변하고 있으니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서로를 힐끗거리며 각자의 입장을 언제, 어떻게 꺼낼까 고민만 하는 와중이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북쪽 소수부족들 중 제일 덩치가 큰 엥자르갈족. 8척 장신의 부족장은 의자에 몸을 구겨 앉은 채 연신 불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자금은 언제 주려는 것이오?”
근육질의 육체파 부족답게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눈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무식한 화법이 소수부족의 환영을 받고 있었으니.
제국방위부에서는 분명히 자금줄을 대 줄 터이니 북쪽 지대로 병사들을 끌고 오라 하였건만, 주고받는 것 없이 서로 대치만 하고 있지 않나? 나들이라도 나왔나?
“자금이라 칭하기에는 조금 그렇고-”
크로니는 궐련을 꺼내 물며 정정했다.
“상생 지원금 정도가 어떨는지?”
“그거나 이거나, 쳇. 국경선에서 소란 좀 피워 주면 돈을 준다 하지 않았소? 한데 기약이 없으니 부족민들의 불만이 조금씩 커지고 있소. 이렇게 되면 우리는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자자, 진정하시고. 제국 쪽에서도 할 말이 있겠지요.”
중재한 것은 메게투족 족장이었다. 녹색 안감을 얼굴과 몸 전체에 퍼 발라 특이한 외형이었는데, 은근히 풍기는 풀 내음이 가득했다.
크로니는 역겨운 감정을 애써 숨기며 궐련을 툭툭 털어 댔다.
“예, 뭐. 다들 기다림이 크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송구하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고요. 하지만 뭐든지 큰일이 일어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 아니겠습니까? 제국의 사정을 생각하여 너그럽게 여겨 주십시오.”
제국의 사정은 지랄. 네놈의 사정이겠지. 엥자르갈족 족장이 콧방귀를 끼며 거대한 머리통을 홱 돌렸다. 앞과 뒤가 다른 제국 놈들과는 더는 대화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때, 크로니가 테이블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리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방금 제국에서 포탈을 타고 날아든 것인데, 자금줄이 트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안 하델의 공동 후견인 신청.
크로니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아버지는 죽었을 것이고, 이를 부검하기 위해 얕은 수작을 부린 것이다.
그 조그마한 머리통으로 낸 생각인지, 아니면 아레나 그 건방진 계집의 묘수일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활로가 트였단 사실이다.
“자금줄이 트였다고?”
“예. 약속드린 금액의 두 배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두, 두 배라니.”
어째서?
분명히 조건이 있을 것이다. 족장들은 침을 꼴딱 삼키면서도 크로니가 무엇을 내걸지 몰라 걱정하는 눈치였다.
“조만간 서둘러 중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곳을 빠르게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장난하나? 돈 받기 전에는 절대-”
“잠시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 주시겠습니까? 혹 말을 자르는 게 부족의 문화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크로니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경고했다. 야만인 티 내지 말고 예의를 차리라는 뜻이었다.
엥자르갈족 족장의 얼굴이 벌게졌지만, 그 누구도 그를 옹호하여 덧붙이지 않았다. 돈을 두 배로 준다는데 말은 들어 봐야지?
“지금 당장 철수하여 중앙으로 돌아간다 한들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인데, 그렇게 되면 여러분께 약속한 위로금을 드릴 수 없게 됩니다.”
“뭐? 어째서 말입니까?”
크로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안의 후견인이 되겠노라 허락하는 순간 부검은 이루어질 것이다. 동결 마법? 포탈? 모두 마법부에서 협조하지 않을 건 불 보듯 빤한 일. 부검하여 사인에 문제가 있다는 게 밝혀지면, 제국방위부를 차지하는 건 고사하고 모든 것이 수포가 될 터.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지. 황금 덩어리가 저절로 굴러들어 왔는데 말이야.’
어설프게 머리 굴린 걸 후회하게 해 주마. 굳게 닫혀 있던 크로니의 입매가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하지만 방법이 있지요.”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제국의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아무튼, 여러분께서 약속된 금액을 받으시려면 한 가지 더 협조를 해 주셔야 할 것인데…….”
크로니의 시선이 정면으로 이동하자, 족장들의 눈길 역시 따라 움직였다.
그곳에는 아스타나의 대표가 있었다. 푸른색 머리칼에 창백한 피부. 시체를 뒤집어쓰고 산다는 소문이 진짜인 것처럼 파리한 안색이다.
아스타나의 대표는 작게 한숨 쉬었다.
“이미 그에 관해서는 대화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다시 시작하면 되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드갈 매장지가 어디인지는 저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현존하는 마석 중 마법사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 마력봉인석과 이드갈뿐이다.
마력봉인석은 발견되는 족족 정해진 지분에 따라 황궁과 각 부처가 소유권을 가지므로 독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드갈은? 사장된 물질이므로 그저 ‘금지’라는 정책 아래 무분별하게 흩어져 있다.
“아스타나의 대표이시여, 우리가 국경선을 두고 마주하고는 있다지만 지금은 이리 한 테이블에 앉아 있습니다.”
서로 좋게 좋게 협상하여 끝낼 수 있는 일을 어찌하여 이리 어렵게 만드시나? 다른 부족들의 쌓여 있던 불만도 터질락 말락 조금씩 부풀었다.
“그러니까 지금 크로니 대장의 말은, 이드갈 매장지만 알려 주면 우리에게 자금, 아니지, 지원금을 전달해 주고 중앙으로 돌아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예, 맞습니다.”
“아스타나에서 협조 좀 하십시오. 이것은 소수부족동맹의 결속을 위한 의무입니다.”
아스타나 대표는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서 다른 부족장들에게 전했다.
“이드갈 매장지에 대해서는 저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혹 안다 한들, 그것을 어찌하시려고요? 균열을 막음으로 가이아를 지탱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전해 듣기로는 이드갈 양이 어마어마하여 산처럼 쌓여 있다 합니다. 거기서 조금 가져온다 한들 문제가 생길까요? 이미 그곳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들이 조금씩 캐내 유통하고 있습니다.”
균열이 다시 벌어지지 않을 정도만 채굴하면 된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충분히 마법사들을 견제하고도 남을 것이다.
혹 알량한 정의감으로 채굴하지 않는다 한들, 현 상황으로 봐서는 언젠가는 세상에 밝혀질 터. 미리 선점하여 돈이라도 얻어가는 게 낫지 않겠나?
“…전하께 논의가 필요합니다.”
아스타나의 대표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족장들은 작게 탄식했고, 크로니 역시 아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시간을 오래 드릴 수 없습니다.”
“예, 잠시면 됩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양해를 구하며 천막을 걷고 나갔다. 크로니와 족장들이 그의 뒷모습을 가만 지켜보다가, 사라지자마자 한마디씩 덧붙였다.
“아스타나의 왕이면, 지금 거의 송장이나 다름없는 것 아닙니까?”
“다름없는 게 아니라, 그냥 송장이지요. 영혼을 옮겨다닌다고 하니…. 참 꺼림칙한 것들입니다.”
“100여 년 전에 죽은 자라 곧 있으면 영혼이 소멸된다고 하던데요? 듣기로는 저자가 차기 왕으로 유력하다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출정을 대신한 것이로군요?”
“다들 족장이 나왔는데, 혼자서 대표를 보내고…. 사실 세(勢)로 보면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면서.”
아주 작은 부족들이 모이고 모여 통합된 것이 아스타나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왕국으로 불리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민망할 수준 아닌가.
크로니는 잠시 쉬었다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스타나 대표가 돌아오면 다시 회담을 진행하는 걸로 하시죠.”
“예, 알겠습니다.”
크로니는 밖으로 나가 부하에게 손짓했다. 포탈은 아직 열려 있었다. 그의 답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펜과 종이를 가져와라.”
크로니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안을 위해 편지를 작성했다. 첫 문장은 ‘친애하는 이안에게’였다.
-이안, 드디어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기쁘구나. 나는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후견인의 역할을 온전히 해내겠노라고 신께 맹세할 수 있단다.
하지만 이 먼 곳에서 소식을 듣자니 조금 문제가 있어. 후견인이 된다면 너에게 비밀스럽게 전할 말이 있는데, 직접 전하고 싶구나. 괜찮다면 포탈을 타고 오겠니? 네 부모님과 관련된 내용이란다. 온다면 후견인 신청서에도 서명해 주마. 오래 걸리지는 않아. 마법부에 전하여 일주일 정도 시간을 내어 달라 요청해 보려무나.
자신이 중앙에 없는 동안 부검으로 수작질을 부릴 거라면, 그 주체를 이쪽으로 데려오는 수밖에.
이안 하델의 후견인이 되는 건 먹을 수밖에 없는 미끼다. 그리고 부모의 비밀을 빌미로 한 서명 조건 역시 이안 하델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일 터. 서로가 서로에게 진탕 물려 넘어가 보자고. 응?
쉬익.
크로니는 작성한 종이를 돌돌 말아 포탈 너머로 날려 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공에서 맴돌던 구멍이 사라졌다.
* * *
한편, 아스타나 진영으로 돌아온 대표는 난감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천막 안에 지핀 모닥불에 무언가를 뿌렸다. 그러자 녹색 빛을 내며 순식간에 커진 불길. 주위를 태우지 않고 그저 활활 빛나기만 했다. 곧이어, 불길 안쪽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왕이었다. 힘없고, 금방이라도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음성. 이미 100년 이상 영혼을 이리저리 옮기며 존재한지라, 영혼의 풍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시체가 아닌 물건에 영혼을 담는 지경이었다.
“왕이시여. 회담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표는 왕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전했다. 바리엘 측에서 이드갈 매장지를 원하고 있고, 그것에 대한 단서만 제공하면 어떠한 무력 충돌 없이 자금까지 확보할 수 있다고. 더하여, 타 부족과의 동맹을 견고히 하는 효과도.
가만히 듣던 왕이 나지막이 물었다.
[바리엘의 지휘관 이름이 무엇이라고?]“크로니입니다. 크로니 알파트.”
[크로니 알파트…. 크로니 알파트…….]왕은 한참이나 그의 이름을 되새겼다. 영혼이 풍화된다는 것은 인간이 늙어 가는 것과 비슷한 결이다. 세월을 잊고, 기억을 잊고, 나아가 자신까지 잊는.
대표는 왕의 중얼거림을 계속 들으며 고민했다.
‘멈추어야 하나?’
왕의 정신이 온전치 못함은 익히 알았다. 대표가 어쩔 수 없이 왕의 말을 끊으려고 할 때였다.
[그렇군. 세월이 벌써 그렇게 되었어.]“예?”
[…오래도 기다렸다. 운명의 굴레를.]“전하. 송구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솨아아악! 왕은 초록빛 불길 밖으로 형상을 보이며 경고했다.
[나, 아스타나의 왕 하샤가 명하노니, 바리엘을 적으로 돌리지는 말되 크로니 알파트, 그자를 죽여라.]“어, 어찌…….”
바리엘을 적으로 두지 않고 크로니를 죽이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대체 어째서 그래야 하지? 대표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샤 왕은 계속해서 같은 말만을 되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