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16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16화(916/935)
제916화. 파이팅 있고
“이안 숙부, 차 한 잔 다시 드릴까요?”
크로니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이안은 고개를 가볍게 저어 거절했다.
아코가 대신 벌컥벌컥 마신 탓에 이안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했다. 되레 잘 되었다. 이곳에서는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물 한 방울조차도.
“괜찮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리 되물으며, 크로니는 천막 바깥 인기척에 집중했다. 천막 밑으로 아른거리는 두 발이 보였다. 이안에게 독대를 요청하여 아코를 밖으로 내보내긴 했지만, 여전히 주위를 서성이고 있는 게다.
‘경계하고 있군.’
원한다면 수십 걸음 거리에서도 개미 기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마법사다. 허튼짓하면 단숨에 저지하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나.’
크로니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앉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덕분에 생겨난 잠깐의 틈. 이안은 힐끔, 크로니의 집무용 책상을 훔쳐보았다. 티 하나 없이 깔끔하다. 잉크나 인장의 흔적이 전혀 없다. 명령서와 보고서 따위의 서류 또한 전무.
의아했다. 이곳은 시도 때도 없이 국지전이 벌어지는 분쟁 지역이지 않나? 하루에도 수십 건의 보고서와 명령서가 오갈 것인데, 군 지휘관의 책상치고는 너무 깔끔했다. 이를 머릿속에 새긴 이안은 얼굴을 바꾸며 말했다.
“크로니 경. 서신에 적으신 부모님의 비밀이 궁금합니다”
“너무 서두르십니다, 숙부. 이제껏 모르고 사셨으면서요.”
당장 듣지 못하면 어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시는군요? 그리 말하는 듯 날카로운 말투였다. 이전보다 더욱 노골적인.
이안은 또렷한 눈매로 크로니를 마주 쳐다보며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하하! 맞습니다. 하나 계속 모른다고 하여도 이안 숙부의 인생에서 바뀌는 것은 없겠지요.”
이안은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아코가 옆에 있었다면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약 팔고 있네.”
어찌 저리 빙빙 돌려 뜸을 들이는 것일까? 그저 자신을 북부로 끌어들이기 위해 거짓으로 내뱉은 말일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분이 치밀었다. 어디서 감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입에 올린단 말인가. 누구 때문에 그리되셨는데.
꽈악.
옷자락을 붙잡은 이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크로니가 한마디 슬쩍 흘렸다.
“이안 숙부의 어머니, 그러니까 제리아 부인이 사실 양녀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이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자 크로니는 꽤 재밌는 광경이라는 듯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모르셨군요.”
“거짓입니다. 어머니께서는 분명히-”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아이가 들지 않을 때는 밖에서 데리고 와라’. 제리아 부인께서는 운이 꽤 좋으셨지요.”
출신 성분도 모르면서 운 좋게 간택되어 귀족의 삶을 살았던 여인.
크로니가 이런 말을 하는 저의는 딱 하나였다.
‘너는 반쪽짜리다.’
사람들이 칭송하고 받드는 귀족 마법사? 웃기지 말라 그래. 제 핏속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크로니는 웃음을 참으며 아이의 안색을 살폈다. 당황하려나? 유리구슬 같은 벽안이 흔들리면 꽤나 볼만하겠네.
하지만 시선을 든 이안의 눈빛은 아이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싸늘했다.
“증거 있습니까?”
뜻밖의 반응에 크로니가 멈칫거렸다.
“뭐라고요?”
“증거 말입니다. 어머니의 태생을 증명할 만한 증거. 저에게만 이를 것이 아닌 모두에게 떠들어 댈 수 있을 만한 근거가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있지요. 제리아 부인께서 양녀가 아니라면,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는 큰아버님과 어찌 혼인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야 입양아니까. 친정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게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만 당하다가 버림받은 가여운 제리아 부인!
크로니의 주장에 이안의 눈썹이 구겨졌다. 전부 다 헛소리였으므로.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병환 때문도 있고, 두 분의 성정이 원래 무덤덤한 탓이 컸다. 이안은 그리 알았다.
한데, 명명백백한 증거는커녕 고작 저런 같잖은 이유를 들먹여?
“없다는 말씀이군요.”
스윽. 이안은 분을 숨기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로니가 그러했듯 날카롭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불쾌합니다, 크로니 경. 알파트 가문의 소양은 제가 아는 귀족의 소양과 다른가 봅니다.”
어찌 귀족 된 자로서 저런 억측을 함부로 꺼내는가? 자신이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시정잡배와 다름없는 협잡질이다.
“이따위 허튼소릴 들으러 먼 길 온 것을 마법사들이 알게 되면 상심이 클 것이니, 입단속 잘 해 주시길 바랍니다.”
“허튼소리?”
크로니가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왔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이안과 시선을 맞추며 속닥거렸다.
“나는 이안 숙부를 위해 지금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족 태생 마법사라는 울타리에 너무 기대었다가는 언젠가 넘어지고 말 것이라고.”
“기댈 생각이 없으니 넘어질 일도 없지요. 크로니 경께서도 만만치 않게 걱정이 많으십니다. 임무가 막중하신데.”
“하!”
고작 얼마간 못 보았을 뿐인데 꼬맹이 말하는 것 좀 보아라. 얼추 하델가의 주인 흉내를 내는 꼴이지 않나.
크로니는 가소롭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안을 내려다봤고, 이안 역시 그런 크로니를 올려다봤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고 비틀 수 있는 작은 모가지.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모든 것엔 절차가 있다. 그리고 그 절차에는 그에 맞는 의도 또한 필요한 법. 크로니가 활짝 웃었다.
“대화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이안 숙부. 오해가 있다면 서로 푸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서로 ‘가족’이 될 사이 아닙니까?”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소중히 대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럼요. 맞습니다. 숙부는 저를, 저는 숙부를 서로 아끼고 위하면 될 일입니다. 자- 깊은 대화는 차차 합시다. 안 그래도 바쁘신데 마법사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으니.”
크로니의 말에, 아코의 발걸음이 뚝 하고 멈췄다. 이안은 눈인사를 남기고서 천막을 걷었고, 이내 어색하게 서 있는 아코와 마주했다.
“얘기는 끝났어?”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코는 그런 이안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천막 쪽으로 침 뱉는 시늉을 했다. 병사들이 깜짝 놀랐지만 말 그대로 시늉인지라 어정쩡하게 아코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들었지?”
“뭐, 듣고 말고 할 것도 없더만.”
“…무슨 수작일까.”
이안은 크로니의 말이 거짓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사실이래도 자신의 미래에는 어떠한 영향도…….
“!”
순간 번뜩이듯 떠오른 생각에 이안이 천막 쪽으로 몸을 확 틀었다. 크로니가 왜 어머니의 태생을 물고 늘어지는지, 그 저의를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 단서는 황제였다.
“혹시 내가 세상을 뜨게 되면, 아마도 내 자리는 네 것이 될 게다.”
“……!”
“이안 하델. 비록 방계이나 황실의 피가 흐르고, 귀족 최초의 마법사가 아니더냐. 나이가 너무 어린 것만 빼면 모두가 이견 없이 따를 것이다.”
침실로 자신을 은밀히 불러 내정했던 말. 이에 근거하면, 피의 절반은 황실 방계의 것이라 어쩔 수 없으니, 나머지 절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여 정통성을 흐리려는 수작이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곧 폐하께 변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이안은 천막을 향한 채 굳어 버렸다.
이에 아코도 천막 쪽을 바라봤다. 단정히 내려진 천막 입구가 바람에 흔들려 살짝살짝 벌어졌다. 그 틈으로 크로니와 부하들이 무언가 대화하는 것이 보였다.
“이안?”
“아코. 우리 얼른 일 보고 돌아가자.”
“갑자기? 왜?”
이안은 대답 대신 그저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정면을 돌아봤다. 황제와의 밀담은 아무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되었기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크로니라도 장관과 부장관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제국방위부 내부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는데, 황제 폐하를 어찌 건드리겠는가. 괜찮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닐 거야.
“그냥.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거 없잖아.”
“그래. 그래야지. 어차피 허허벌판이라 뭐가 있는 것 같지도 않네. 헤일!”
아코의 부름에 궐련을 문 헤일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대화가 길군.”
“최대한 짧게 한 건데? 뀨는?”
“산책.”
이드갈 매장지를 찾는 중이란 뜻이었다. 소문으로는 현재도 거대한 균열을 메우고 있다 하니 어지간하면 하늘에서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근처에 있기만 하다면.
“너는? 궐련만 태우고 있었어?”
“뭐. 구경도 이리저리 하고.”
“볼만한 건 있었고?”
아코는 나도 한 대 달라 하려다가, 똘망똘망 두 사람 곁에 붙은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아아. 이거, 원. 공기 좋고 속 뒤집히는 게 딱 한 대만 피우면 좋겠는데…….
아코가 아쉬운 손을 거두자, 헤일이 소수부족 측 진영 쪽을 가리켰다.
“저쪽이 수상해. 전령들이 모두 저쪽으로 들어갔어.”
“아스타나? 유일한 왕국이잖아. 그래서 그런 듯?”
“느낌이 안 좋아.”
이안이 아코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아코. 북쪽에도 왕국이 있어? 나는 토올룬 말곤 들어 본 적 없는데.”
“으응. 왕국이라 해 봤자 부족연합 느낌이라 사실 큰 존재감은 없어. 왕실이 사령술 쪽으로 유명하다는 것 외에는 뭐.”
“사령술이라…….”
상당히 으스스한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이안이 긴장한 표정을 짓자, 아코가 피식 웃었다. 혼자서 황궁 보호막 때려 부수는 주제에 무서워하긴 뭘 그리 무서워해?
그때, 헤일이 두 사람에게 잠시 가까이 와 보라는 듯 손짓했다.
“왜?”
“일단 와 봐. 이안, 너도.”
“네.”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머리를 맞댔다.
그게 썩 우스꽝스러워 보였는지 지나가던 병사들이 흘낏거렸다. 마법사들의 기행이야 유명하다만, 아이까지 저러는 걸 보니 괴짜 기질은 타고나는가 보다. 뭐랄까, 신께서 하나를 주고 하나를 빼앗은 느낌이랄까.
“두 진영 사이에 긴장감이 하나도 없다. 말로만 대치지, 적의가 안 느껴져.”
헤일은 자신이 목격한 내용을 둘에게 공유했다. 이안도 크로니의 천막에서 보고 느낀 게 있는 터라 쉬이 수긍할 수 있었다.
오직 아코만 턱을 괸 채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그것도 잠시-
“그럼 우리가 확 먼저 쳐 버릴까?”
아코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영민함이 아닌, 광기의 반짝임.
“뭐?”
“응?”
헤일과 이안이 흠칫 놀라 동시에 되묻자, 아코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잖아. 와 보니까 너무 잠잠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좀 도와 주겠다, 하고 확 한바탕 뒤집어 버리면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뒤에서 저들끼리 호박씨를 깠든 어쨌든 말이야.”
소수부족 동맹 쪽에서는 왜 마법사를 막지 못했느냐고 크로니 측을 불신할 것이고, 크로니 또한 마법사들이 있는 한 무어라 해명할 기회조차 없을 테니 감정의 골이 깊어지겠지.
놈들이 이제껏 무슨 짝짜꿍을 맞췄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대 세게 얻어맞은 상황에서 하하호호 관계가 계속될 수는 없다. 그리고 꿀밤 쥐어박는 역할로는 마법부를 따라올 자가 없고.
“아코. 일단 진정해 봐. 전쟁의 지휘권은 크로니에게 있어. 보고 없이 섣불리 끼어들었다가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마법부 전체에 피해가 가. 아레나 님이 문책을 받을 수도 있다고.”
“와, 개꿀.”
아코가 그것참 끌린다며 엄지를 치켜들자, 이안이 조심스럽게 도로 접어 주었다. 헤일은 눈썹을 문지르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여기서 내 할 일이 정해지는 거네.”
마법부 소속이 아닌, 외부인의 신분. 이만한 적임자가 없지 않나. 헤일은 불붙지 않은 궐련을 입에 문 채 중얼거렸다.
“뭐, 가서 한 대 맞고 오면 되겠지.”
“오. 괜찮겠어?”
“원래 용병이 몸으로 때우는 직업이라.”
“직업 정신 좋고, 파이팅 있고-!”
반색하는 아코와 다르게, 이안은 내심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러자 헤일은 씨익 웃으며 이안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걱정 마. 마침 궁금했거든. 부족들이 왜 다 아스타나 쪽으로 몰려들었을까, 하고 말이야. 내가 또 궁금한 건 못 참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