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17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17화(917/935)
제917화. 친애하는 이안이여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차가워지자 제국군 진영 곳곳에서 횃불과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여기저기 경계근무를 서는 병사들도 많아졌다.
“경계가 삼엄하네. 꼭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아. 우리 보라고.”
아코의 중얼거림에 헤일과 이안도 동의했다. 막 임시 거처를 배정받아 천막 안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이리 가만 모여 앉아 있으니 꽤 많은 것들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졌다.
이어서 찾아온 밤도 너무 조용했다. 사나운 적들을 가까이 두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천막 틈으로 바깥을 빼꼼 살피던 아코가 속닥였다.
“저쪽도 불을 피웠어.”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원래라면 불빛을 최소화하여 은폐하는 것이 철칙이나 북쪽은 원체 추운 지방. 특히나 겨울이 다가오는 지금, 북부에서 나고 자란 부족민이라고 밤중의 칼바람을 맨몸으로 버텨 낼 리 없으니.
스윽.
아코는 가방을 뒤적여 물약이 담긴 유리병 몇 개를 꺼내 내밀었다. 헤일은 그걸 빤히 보더니 이내 손을 내저었다.
“…됐다.”
“아, 왜! 내가 만든 거 진짜 유용하거든?”
“유용한 게 아니라 유명한 거 아닌가?”
여러모로 말이지. 헤일이 중얼거리자 아코가 성을 냈다.
“줄 때 받아. 이게 얼마짜린데, 콱 씨!”
헤일은 멱살이 붙들려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연신 시선을 피했다. 그에 미지근한 스튜를 접시에 담던 이안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헤일 교수님. 주머니가 남는다면 챙기시는 걸 권장합니다. 저도 도움받은 적이 있어서요.”
이안까지 거들자 헤일은 마지못해 물약 몇 개를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뭐가 뭔지 확인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아코가 이를 까드득 갈았다. 그냥 다시 뺏어 버릴까?
“식사는요?”
“다녀와서 먹으마. 몸이 가벼워야 움직이기 편해서.”
“흥, 누가 남겨 놓는대?”
아코는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뀌어 댔고, 이안은 살며시 헤일의 팔을 붙잡았다. 잘 다녀오라고, 어디 다치지 말고 무사히 귀환하라는 의미로.
헤일은 그저 픽 웃어 보이고는 천막 밖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사삭!
정면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가는 적들에게도, 제국군에게도 발각되고 말 거다. 사실상 소란을 피우기 위해 가는 것이지만, 은밀함을 틈타야만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있을 터. 헤일은 수풀 속으로 몸을 숨기며 마법을 시전했다.
「투명(透明)」.
지이잉! 반짝!
수풀 속에서 금빛의 무언가가 반짝거리는 걸 발견한 병사가 눈을 비벼 댔다. 뭐였지? 잘못 봤나?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어 금세 흥미를 잃었다. 다행이었다. 헤일은 목책의 가장자리를 따라 최대한 전력 질주했다.
‘반투명인 데다 유효시간이 길지 않아.’
헤일이 구사할 수 있는 투명 마법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아코가 챙겨 준 물약 중에 이를 도와주는 것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손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듣기로는 함부로 먹었다간 중독되어 아코 저 미친 자의 하수인이 된다고 하던데. 그럼 이안은 괜찮은 건가?
‘…….’
헤일은 잡념을 떨치고 다시 임무에 집중했다.
촤아악!
달빛이 내려앉은 들판. 풀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헤일의 궤적을 그려 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말뚝에 묶여 풀을 뜯던 짐승들만이 기척을 느끼고 귀를 쫑긋거릴 뿐.
그렇게 헤일은 단숨에 아스타나 진영으로 넘어왔고, 바리엘 측과 사뭇 다른 분위기에 멈칫하고 말았다.
‘사령술을 주로 사용하는 부족이라더니.’
사방에서 시체 냄새가 진동했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이 섞여 있는 게 분명했다.
‘골치 아프겠군.’
용병 일을 하며 사령술사를 딱 한 번 마주한 적 있는데, 여간 까다로운 자들이 아니다. 전투가 진행되어 시체가 쌓일수록, 상대의 전력은 계속해서 강화되니까.
“어, 팔 떨어졌다.”
“잘 좀 붙이지. 이쪽으로 와 봐. 꿰어 줄게.”
“하아아암. 배고프다.”
“어이고, 팔자 좋은 소리.”
시체화되어 움직이는 자들과 아닌 자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진영을 정비하고 있었다.
헤일은 자신의 몸에 걸린 투명 마법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끼고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시간이 많지 않다. 어떤 게 왕의 천막이지?
-꾸어어억.
그때, 위쪽에서 들리는 기이한 소리. 헤일이 올려다보는 것과 달리, 병사들은 때가 되었다며 슬금슬금 물건을 들고서 옆으로 지나쳤다.
‘저게…….’
-꾸에에에엑!
촤아아악!
마물 시체를 이어 붙여 만든 괴물. ‘아스타나의 역작’이라 불리는 피조물이었다. 사실상 살상용이 아닌 위협용이었지만 눈앞에서 보니 위압감이 상당하다.
순식간에 끈적하고 뜨거운 액체를 뒤집어쓴 헤일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멈췄다. 쏟아진 오물을 대충 치우려던 병사들이 사람의 형상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가 뭘, 뭘 뱉은 거야?”
“거기, 뭐요? 누구요?”
“하아…….”
손으로 얼굴을 대충 훑어 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헤일. 이거 아무래도 급여 두 배는 더 받아야겠다. 헤일은 금빛 눈을 번쩍이며 병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거, 먼저 건든 거 맞지?”
“뭐? 뭐라고? 아니, 잠깐만! 마법사 아닌가?”
“마법사다! 마법사가 쳐들어왔다!”
헤일의 금안을 본 아스타나인들이 혼비백산하여 소리쳤다. …몸으로 때운다는 게 이런 뜻은 아니었는데, 젠장. 깔깔대는 아코의 웃음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뭐라고? 마법사?”
“북을, 북을 울려-!”
“안 돼!! 모두 가만있어!”
허둥지둥거리는 병사들 틈바구니에서 고급 의복을 입은 자가 불쑥 나타났다. 그의 표정은 묘했다. 뭔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헤일의 모습을 보고서 황당해하는 것 같기도 했으니.
“아, 저, 저기 마법사님?”
“…아스타나 왕인가?”
“아니, 저는 아스타나 대표 파르쿠쿠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왜 여기 계십니까? 대체 어쩌다가…….”
대표는 마물과 오물을 뒤집어쓴 헤일을 번갈아 보며 상황 파악을 하고자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그러니까 지금-
“너희 진영을 터트리려고 왔다.”
“예?! 아니, 잠깐만요!”
“공격으로 간주해도 되겠지? 역해서 뒈질 것 같은데.”
작은 소란만 피울 작정이었건만, 이렇게 된 이상 진짜 다 날려 버리고 불태워야지. 헤일은 궐련을 물려다 그것마저 오물에 흠뻑 젖어 버렸다는 걸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흔적도 없이 갈아 주마.
“잠깐만요!”
대표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연신 헤일을 진정시켰다. 따지고 보면 무슨 수작을 부려 몰래 잠입한 주제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지금 누가 누구보고 선제공격했다는 거야? 대표의 목구멍으로 따져 묻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다행히 그보다 먼저 이성이 작동했다.
“바리엘 측 마법사님이십니까?”
“마법부 소속은 아니다.”
마법부 소속‘은’ 아니라는 대답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대표는 창을 겨누며 경계 중인 병사들에게 물러서라 손짓했다.
“하면, 아까 낮에 마법부와 함께 넘어오신 분이십니까?”
“그건 맞지.”
“세상에! 아이고, 신이시여!”
대표는 그대로 두 손을 붙잡아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헤일은 연신 뚝뚝 떨어지는 오물을 털어 내며 인상을 찡그릴 뿐이다. 병사들 역시 대표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감격에 겨운 대표가 헤일을 껴안으려 했지만, 그 역시도 오물 탓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대신 예의 바른 미소만 지었다.
“뵙고 싶었습니다. 진짜로요!”
“우리 알던 사이인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요. 얘기가 깁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막사로, 아니 먼저 씻으시고 옷부터 갈아입으시겠습니까?”
헤일은 이것들이 무슨 수작인가 싶어 가만히 서 있었다. 홀딱 벗으면 뭐가 달라지나? 그는 계속 올라오는 악취에 짜증 난다는 듯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내 동의했다. 그래. 까짓거, 이왕 몸으로 때우러 온 거 제대로 들이받아 주지.
“어디로 가면 되지?”
“이쪽입니다. 이쪽! 어허, 다들 뭐 하냐? 무기 내리고 마법사님을 모셔라. 그리고 횃불 좀 줄여! 다른 부족들에게 알려져서는 절대 안 된다!”
“예, 예! 알겠습니다.”
“여기 정리하고, 서둘러서. 응.”
자연을 벗 삼고, 자연에 대적하여 살아가는 부족들이다 보니 작은 변화도 기민하게 알아채는 능력이 있다. 마법사의 등장으로 작은 소란까지 일었으니 이미 몇몇은 알아챘을 수도 있겠다. 물론 마법사의 존재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것도 시간문제.
“마법사님. 옷은 이것으로-”
“헤일이다.”
“예예, 아이고, 좋으신 이름이군요. 방금 보신 놈은 여기서 나온 각종 쓰레기를 먹어 치워 처리하는 놈입니다. 이게 처음에는 좀 역해도 하루 이틀이면 다 땅속으로 흡수되거든요.”
뭐, 친환경 쓰레기 분해기라는 거군. 헤일은 아코렐라의 물약을 넣은 옷 그대로 시종에게 건넸고, 그들이 가져다준 물로 오물을 닦아 냈다.
촤아아악!
“저기- 좀 급해서 그런데, 닦으면서 들으시겠습니까?”
“피차 좋지. 나도 시간 없는 건 마찬가지라.”
“혹시 황궁 마법사분들과의 회담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요? 제국방위부 크로니 경 모르게 말입니다.”
“어째서?”
“그…….”
대표는 우물쭈물했다. 마법부 측과 연결된 인사인 건 맞는 것 같은데,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헤일이 머리를 터는 동안, 대표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스타나의 왕이신 하샤 전하께서 바라시는 전쟁의 양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싶은데, 제국방위부의 뜻은 이미 잘 알고 있고, 이제 마법부의 뜻을 알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왕께서도 여기 계신가?”
“아니요. 하지만 연결할 수 있습니다.”
헤일은 잠시 생각했다. 크로니 몰래 접촉을 원하는 거라면 그쪽과 상반된 의견을 갖고 있을 수 있다. 크로니와 반대되는 것이라면, 마법부와는 같은 방향일 수도. 그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대답했다.
“좋다. 내가 애들을 데려오지.”
* * *
“풉.”
아스타나 진영, 대표의 천막 안에 둘러앉은 헤일과 아코, 이안.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아코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들 그녀를 힐끗거리자, 아코는 입가를 가리며 사과했다.
“아, 미안. 근데, 풉.”
“아코.”
“으하하하하!”
결국, 참지 못한 아코가 배를 붙잡고 폭소했다. 아니, 헤일 이 자식, 은근히 골 때리는 놈이라니까? 비장하게 용병의 일이 어쩌고 몸빵이 저쩌고 하면서 가더니만 꼬릿한 냄새 풍기면서 아스타나 의복을 입고 있었다.
“너 그 꼴, 크로니한테 보이면 바로 끝장이다. 크하하하!”
“…그만 웃지?”
“아하하하! 짜식. 너 인마, 아레나 장관한테 가서 돈 더 달라 그래. 위험수당 말고 위로수당으로. 아. 이런 데 재능 있기 쉽지 않은데.”
“크흠. 큼.”
아스타나 대표가 헛기침을 하며 자신 좀 봐달라 신호했다. 아코가 눈가를 닦으며 그를 돌아봤다.
“아, 그래요. 그래. 마법부를 만나고 싶으셨다고?”
“예,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만남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스타나의 대표, 파르쿠쿠입니다.”
“난 아코.”
“나는 이안 하델일세.”
각자 자기소개를 하자 다시 짤막한 침묵이 흘렀다. 아스타나 대표는 크로니의 처치에 대하여 어찌 말을 꺼내면 좋을까 고민하는 것이었고, 세 사람은 저놈이 대체 무슨 말을 할지를 가늠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헤일이었다.
“낮에 보니까 각 부족의 전령들이 이쪽으로 오던데.”
“아, 그때 부족의 족장들이 전부 이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어째서?”
“…북부 동맹에 대한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지요.”
크로니에게는 이드갈에 대한 얘기를 쉬이 꺼낼 수 없었다. 이드갈은 마법사들에게 예민한 문제였으니까.
“그, 괜찮으시면 전하를 뵙고서 말씀 먼저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실 모든 결정권은 전하께 있어서요.”
그라면 지금의 상황을 노련하게 간파하여 쉽게 대화의 물꼬를 터 줄 것이다. 선뜻 대답하는 이가 없자, 대표는 ‘에라, 모르겠다!’는 투로 눈을 질끈 감고는 화롯불 쪽으로 손을 뻗었다.
화르륵!
화로의 불이 순식간에 녹색으로 피어올랐고, 이안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사아아악.
녹색 빛이 짙어지며 이를 바라보고 있던 이안의 눈동자 또한 녹색으로 물들었다. 싱그러운 이파리의 반짝임처럼 화사하고 따뜻하게. 마치 원래부터 녹안이었다는 듯이.
[…금빛이 느껴지는구나.]“아.”
불길이 이안 쪽으로 몰아치며 휘감았다. 살의나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 터라 아코와 헤일은 가만두고 보았다.
[이안-]“하델입니다.”
나를 아나? 하긴, 귀족 마법사라고 제국 전체가 떠들썩하였으니 아스타나에서도 이름이 알려졌을 수 있지.
왕은 세월이 겹겹이 쌓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이안 하델이로구나.]어쩐지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왕은 한껏 다정하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친애하는 이안이여. 나는 너를 느끼고 너는 나를 보고 있으니, 우리가 바라고 바라던 그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