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18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18화(918/935)
제918화. 온기
[…나는 너를 느끼고 너는 나를 보고 있으니, 우리가 바라고 바라던 그날이다.]…참으로 묘한 첫인사였다.
이안은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를 아십니까?”
녹색 불은 무언가의 형체를 띠고 있었지만 식별할 수는 없었다. 늙은이의 얼굴 같기도 하고, 주둥이가 긴 짐승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그저 일그러진 불빛 같기도 하고.
하나 확실한 것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
[그대를 모르는 자가 있었던가.]이안은 왕의 대답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있었던가’라니?
하지만 그런 사사로운 것을 묻기에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밤은 짧았고, 크로니가 그들의 천막을 주시하고 있을 터이니까. 장치를 해 두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하샤랑 토쿤다이. 오래전 생을 다하였으나 미련과 인연의 끈으로 지금까지 아스타나를 주관하고 있지. 이안…….]왕은 말을 잠시 멈칫거렸다.
[하델?]마치 하델이라는 성이 자못 어색하다는 투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이안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왕의 다음 말을 예상했다. 서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고 협력하고자 하겠지. 여기서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괜찮은가?]뜻밖의 질문에 이안이 놀라 쳐다봤다. 괜찮냐니? 아코와 헤일 역시도 상황이 의외로 흘러간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들의 반응 따위 중요치 않다는 듯, 하샤는 재차 물었다.
[몸이나 마음이나 가릴 것 없이 안온한가? 그리고 자주 웃는가? 매일 아침 햇살을 만끽하고 있는지, 밤의 고요한 정취는 온전히 즐기고 있는지… 궁금하네.]“전하?”
이안은 당황하여 아코와 하델을 힐끔거렸다. 대표 역시 왕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조금 난감한 기색으로 눈을 굴려 댔다.
하지만 하샤는 계속해서 이안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 달라는 듯이.
“…예, 전하. 좋은 사람이 곁에 많아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북쪽에 온 것이 바라던 바는 아니지만, 보시다시피 동료와 함께하여 몸과 마음이 안온합니다.”
하샤는 아코와 헤일을 돌아봤다. 이어서 흘리는 낮은 웃음. 왕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그래…. 그대들이로군.]1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다시 연결된 인연의 끈. 혼이 풍화되어 사라지기 전에 이를 보았으니, 축복도 이런 축복이 없다.
하샤의 혼잣말 같은 말에 아코와 헤일이 알 수 없는 시선을 나누었다.
[이안. 아스타나에는 예로부터 많은 예언가가 있었다. 이들은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것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엿보기도 하지.]하샤는 조금 힘들다는 듯 숨을 들이쉬었다. 모든 걸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이 그의 심장을 쥐어 버린 것이다. 이안 히엘로, 그대는 나의 친우고, 금빛 마법사이며, 100년 전 세상을 구했던 영웅이자 신의 축복이었노라고.
하지만-
“하샤. 먼 훗날 나를 다시 만나더라도 이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시게.”
“어째서?”
하샤는 아직도 선명한 히엘로의 당부를 떠올렸다. 달빛을 따라 황궁에서 도망치듯 사라져 가이아 곳곳을 유랑하던 자유로운 영혼. 그는 담요를 어깨에 걸친 채 웃었다. 모닥불에 유독 흰 얼굴이 붉어진 것이 인상 깊었었다.
“나는 이곳의 삶을 모두 지웠어. 훗날의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신의 뜻이겠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되 조금만 도와주게. 너무 넘치지 않도록, 그래서 아쉽게 흘려보내는 게 없도록.”
“하지만-”
“그리고, 말해도 안 믿을 것 같지 않나? 나라면.”
왕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다섯 살의 이안은 점잖고 단정한 자세로 하샤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이보게 이안. 자네의 어린 시절이 이리 귀여울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잖아. 하샤는 다시금 불길을 일으켜 이안의 곁에 가까이 붙었다.
[크로니를 조심하게.]“……!”
이안이 놀라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자는 그대를 잡아먹고 바리엘을 삼켜, 끝내는 가이아를 위험에 처하게 할 인간일세. 그래서 나는 북부 동맹과 바리엘의 우호적인 관계를 굳건히 하고 크로니를 처단하고자 하네.]가만히 듣고 있던 대표가 입을 합 다물고 눈치 봤다. 아무리 그래도 크로니는 대제국 바리엘의 지휘관이었다. 아무리 그가 마법부와 적대적인 관계라고 하여도 이런 식으로 대놓고 적의를 보여도 되는 것인가? 혹여 마법부 측에서 이것을 빌미로 아스타나에 위협을 가하면? 왕께서는 지혜로우시지만, 지금 이 상황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를 보자고 한 거군.”
하지만 다행히도 마법사들의 반응은 덤덤했다. 아코는 턱을 괸 채 ‘흐음’ 콧소리를 내었고, 헤일과 이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조용했다.
‘놀라워.’
이해 일치가 놀랍도록 완벽했다. 아스타나는 아스타나대로 이유가 있었고, 마법부와 이안은 말할 것도 없이 크로니를 처치하고 싶어 했으니까. 마치 잘 짜인 마지막 퍼즐 조각 하나가 자연스럽게 들어맞는 기분이다.
“방도가 있으십니까?”
이안이 되물었다. 저것은 긍정이자 호응이다. 자신들 역시 크로니를 처단하고 싶다는 동의의 의사. 그제야 대표는 긴장 탓에 꽉 쥐었던 손아귀를 풀어 허벅지에 슥슥 문댔다. 땀이 흠뻑 묻어나왔다.
[아스타나가 대제국의 지휘관을 암살하기란 힘든 일이지. 그래서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하지만 저희는 공식적으로 마법부 소속입니다. 크로니를 해한다면 반역자로 낙인찍힐 위험도 있고, 무엇보다 마법부 전체에 해를 끼치게 됩니다.”
“아, 여기 용병 한 명 있소만.”
헤일이 손을 들며 덧붙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헤일이 크로니를 죽이고 붙잡히면 십중팔구 처형될 것이다. 아레나가 힘을 써 목숨만은 건진다 한들, 감옥에서 일평생 썩는 것까지 피할 순 없으리라.
그렇다고 여기저기 떠돌며 도망치는 인생? 마법부를 위해 헤일이 그렇게까지 희생할 이유는 없었다.
“사고사로 위장해서 죽이는 게 제일 좋겠어.”
아코가 손가락을 튕기며 제안했다.
“아스타나와 바리엘의 병력 손실은 최대한 없이 가는 게 좋잖아? 그들은 죄가 없어. 크로니만 쓱싹할 거면 사고사가 제일이야.”
하지만 허허벌판인 이곳에서 부하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크로니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코는 한 가지 더 걸린다는 듯 덧붙였다.
“근데 그 전에, 그러니까 죽이기 전에 크로니를 통해 알아낼 게 있어요. 이드갈이라고 금기의 마석인데, 크로니가 그걸 찾고 있다는 증거를 찾았거든요.”
“아! 이드갈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듣고 있던 대표가 화색을 보였다.
“이드갈 매장지에 대한 단서는 아스타나가 갖고 있습니다. 크로니 측에서 자꾸만 이에 대한 요구를 하고 있던 터라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지요. 북부 동맹과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터라.”
“이드갈 매장지 위치를 그쪽들이 알고 있다고?”
“아! 물론 염려치 마십시오. 그저 전설처럼 전해 오는 것이고, 균열을 봉인하는 것이 북부의 평화를 이룩하는 길인지라. 아스타나에서는 훼손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대표는 혹여나 마법사들이 오해할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 아코의 눈이 화사하게 반짝이는 걸 보면 별 소용없는 듯하다만.
“아무튼, 그 말인즉 크로니도 아직 이드갈 매장지가 어딘지는 모른다는 것 아닙니까?”
“그, 그렇습니다. 이에 대한 회담을 진행하기 전 세 분께서 뚝 떨어진 바람에.”
다행이다. 아직 기회가 있다.
아코는 팔짱을 끼고서 되물었다.
“다른 부족들한테 공유할 생각은?”
[없다.]“아이고, 전하께 물은 게 아닌데. 황송하게 대답해 주시니 반말 지껄인 제가 면구스럽습니다.”
여전하구나, 저 여인은. 하샤는 그리 생각하며 단호하게 덧붙였다.
[아스타나에서는 이드갈에 대한 모든 자료를 봉할 것이다. 하지만 이안, 그대가 원한다면 내어줄 수 있지.]“……!”
세 마법사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하샤는 이안이 ‘어째서?’라고 물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지혜로운 친우는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법.
“…무엇을 원하십니까?”
자신에게만 이드갈 매장지를 알려 준다는 건,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는 말과 같았으니.
하샤는 다시금 낮게 웃으며 이안을 들여다봤다. 아아, 좋구나. 녹색 불빛 때문에 아이의 눈동자가 녹안으로 보여. 흐릿해지다 못해 사그라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아.
[원하는 것은 없다.]“송구하지만 그리 말씀하시면 도리어 생각이 많아집니다.”
무슨 속셈일까. 무슨 꿍꿍이일까. 혹시 함정? 이안이 경계하듯 눈을 치켜들자 하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많은 생각 끝에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이니 기쁘구나, 이안.]왕은 계속해서 친근하게 아이의 성을 떼고 불렀다. 그저 이안, 아주 오랫동안 그리 불러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정답게.
“…믿기 어렵습니다. 진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진실?]이안이 손을 뻗어 녹색 불길을 휘어 감았다.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따스하고 부드러워 그대로 껴안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진실은… 모두가 그대를 그리워했다는 것이겠지.]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수께끼 같은 왕의 대답이 답답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조금씩 흐려지는 불길. 이안이 자신도 모르게 아쉬워하며 붙잡으려 하자, 불길이 먼저 이안의 손을 감쌌다.
[이안.]“예, 전하.”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하샤는 알고 있다. 이미 100여 년 전에 죽어 사라졌어야 할 몸. 하지만 아스타나를 위해, 그리고 이날을 보기 위해 수십 번 몸을 바꾸며 영혼을 갉아먹었다.
이안이 기억을 되찾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이안은 자신을 ‘하샤’라고 불러 줄까? 그리고 지금처럼 껴안아 줄까?
“…원하신다면.”
[원하고, 또 원한다. 이안.]마지막 인사였다. 하샤는 부드럽게 이안을 껴안은 채 서서히 사라져 갔다.
[두려움 없이 나아가라, 이안. 네 곁에는 너무나 많은 가호가 함께하고 있으니.]사아아악.
친애하는 나의 친우여. 이번 생에는 부디 안온하고 행복한 삶을 이루길.
이안은 천천히 희미해지는 불길을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이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잠깐의 정적. 대표가 목을 가다듬으며 큼큼거렸다.
“죄송합니다. 주술인지라 연결 시간이 길지도 않고, 전하의 건강도 온전치 않으셔서.”
아코와 헤일이 다시 시선을 나누었다. 왕의 의미 모를 말들도 다 그 때문일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대화가 매끄러웠는데.
“아무튼, 전하께서 허락하셨으니 원하신다면 이드갈 매장지의 위치 단서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크로니 문제는 어찌할지에 대해 다시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만.”
“아, 좋지. 이거 아주 영양가 있는 회담이 되겠어?”
아코는 팔을 걷어붙이며 펜과 종이를 내달라 요청했다. 헤일 역시 앞으로의 작전을 짜기 위해 궐련을 내어달라 전했다. 입에 뭘 물지 않으면 머리가 안 돈다는 궁색한 말을 중얼거리며.
“이안.”
아코가 아이를 불렀다.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우두커니 선 채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길의 온기가 아직도 선명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까지…….
“이안?”
재차 부르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홱 고개 돌린 이안. 그를 본 아코와 헤일이 멈칫 놀랐다. 아이의 눈동자가 젖어 있었으니.
“…이상합니다.”
모두 할 말을 잃은 채 아이만 바라보는 와중, 이안이 말했다.
“오랜 친우를 만난 것 같았어요. 너무도 그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