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2
제92화. 정리
사달은 이안이 메렐로프 저택을 떠난 직후에 일어났다. 피곤한 몸을 이끌며 침실로 돌아가려는 부인의 앞을 집사가 막아섰으니. 리엔 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쳐다봤다.
“왜?”
“백작님께서 올라오라 하십니다.”
“…왜?”
뭔가 불안하면서 촉이 안 좋았다. 하루 이틀이 아닌 부름인데 말이다. 집사의 딱딱한 표정 때문인가? 부인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등잔의 촛농이 흘러내리자, 집사가 재촉했다.
“마님.”
“기다려. 생각하고 있으니까. 왜 부른지, 집사도 모르나?”
집사는 잠깐의 침묵 끝에 한숨을 내뱉었다. 유달리 조용한 복도에 울리는 숨소리. 바깥의 한기 어린 바람보다 차가운 것 같다.
“집사. 말해줘.”
“주인님께서 이안 경과 마님의 사이를 아셨습니다.”
“…어떻게?”
부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대답이었기에. 집사는 부정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만 갔다.
차라리 아니라고, 평소처럼 당당한 목소리로 말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부인의 태도로 보아 하인들이 봤던 게 맞았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마님…….”
“아니, 대체, 말도 안 돼…….”
“주인님 성격 아시면서. 실수하셨어요.”
“아니까 그런 거 아니야? 아니까!”
하지만 리엔 부인은 완전히 다른 뜻으로 오인했다. 치정이 아닌, 암살 시도가 발각되었다고 말이다. 부인의 몸이 달달달 떨려오며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어떡하지? 백작이 안 죽으면? 나는?’
백작이 죽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숨이 끊어지지 않아도, 평생 이곳에 묶여있어야 했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자는 이안뿐. 부인은 재빨리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쿠웅! 쿵!
“마님!”
“젠장, 이안! 이안!”
“무, 무슨 일이십니까?”
“마차를, 아니, 말을 가져와! 이안 경을!”
“마님! 안 됩니다!”
부인은 계단을 구르다시피 내려가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일을 정리하던 하인들이 몰려들었다. 한 명이 부인을 일으켜주려 했지만, 그녀는 거세게 손을 쳐내며 소리쳤다.
“말을 대라고!”
“마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닥쳐! 죽게 생겼는데 안 이러고 배겨? 다 비켜!”
쩨앵! 쨍!
복도의 장식품들이 쓰러지며 산산조각 났고, 부인은 필사적으로 정문을 빠져나가려고 내달렸다. 피멍으로 엉망이 된 무릎이 나갈 듯 아파 왔다.
하지만, 알고 있다.
지금 멈추면 진짜 끝이라는 것을.
파앗!
“마님. 더 이상의 소란은 곤란합니다.”
그때, 부인의 팔을 잡아채는 기사. 저택에 있는 세 명의 기사 중 한 명인 자였다.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부인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누, 누가 나 좀, 나 좀…….”
“세상에 이게 대체…….”
“마님, 괜찮으셔요?”
“다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거라.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그 누구도 나와서는 아니 된다.”
“해산해라!”
하인들이 주춤주춤 다가오며 부인을 걱정했으나, 집사와 기사의 호통에 물러섰다. 다들 최대한 고개를 숙이며 복도를 빠져나갔다.
“이거 놔! 놓으라고!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죄송합니다. 마님. 하지만 이대로 가시면 정말 일이 더 커져요.”
“아아아아악! 싫어! 싫어!”
집사의 눈짓에 기사가 그녀를 들쳐 맸다. 치마 아래로 성치 못한 다리가 훤히 보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리엔 부인은 발버둥 치며 악다구니를 질러댔고, 그녀의 비명은 저택 곳곳으로 퍼져 클라크의 귀에도 닿았다.
“…마님?”
이안은 그를 돌려줄 요령으로 데리고 왔지만, 클라크는 그걸 전달받지 못했다. 그저 메렐로프 저택 내 낡은 하인용 창고에 앉아서 풀죽을 먹고 있었을 뿐이다. 이안은 이미 저택을 떠났지만, 부인의 소란으로 인해 그에게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끼익.
클라크는 익숙하게 복도를 걸어와 계단 위를 올려다봤다. 몇 년을 살았던 곳이다. 저택의 구조는 눈 감고도 훤했으며 리엔 부인의 비명이 대부분 침실에서 나온다는 사실 역시 훤히 알고 있었다.
끼이익.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나무 바닥이 소름 끼치게 울었다. 그는 결국 백작 부부의 침실이 있는 층까지 올랐으며,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집사와 기사를 마주했다.
“클라크?”
“원래의 거처로 돌아가라.”
“마님이…….”
“돌아가래도.”
쿠웅! 쿵!
그와 동시에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클라크는 저도 모르게 뛰어들었으나, 기사의 가벼운 손짓에 가로막혔다.
“리엔!”
쾅!
그 소리를 들은 것일까? 계속 소란스럽던 침실이 일순 조용해졌다. 이내 문이 열리며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 백작이 모습을 보였다.
“…클라크?”
“아아…….”
땀으로 흠뻑 젖은 악마의 모습이 따로 없다. 백작은 리엔 부인이 내지르는 클라크의 이름에 피가 완전히 말라버리는 기분이었다.
“망할 년 같으니라고, 몇 명하고 놀아난 거야? 이안이나 클라크나, 둘 다 대체…….”
“아니라고…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근데 클라크 이름을 왜 불러!”
꽈악!
백작은 무자비하게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그리고 그녀와 클라크를 번갈아 보며 잔혹한 미소를 지어댔다. 그러곤 어서 들어오라는 듯 문을 연 채로 몸을 돌렸다. 질질 끌려가는 리엔 부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클라크를 쳐다봤다.
‘도망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끼이익.
클라크는 이끌리듯 그녀를 따라 침실로 들어섰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집사와 덤덤한 기사. 백작은 궐련을 물며 명령했다.
“내 허락 없이 문 나서는 놈은 그대로 베어버려라.”
“…알겠습니다.”
“아무도 방해하지 마.”
콰앙!
침실 문이 굳건하게 잠겼다. 오늘 밤, 여인과 노예는 살아서 나오지 못하리라. 해가 떠오르면 둘 중 하나의 피로 나무 바닥을 적시리라.
백작은 있는 힘껏 두 사람을 채찍질하며 땀을 쏟아냈다. 클라크가 부인을 보호하려 할수록 그의 팔에는 힘이 들어갔다.
짜악! 짜악!
“아!”
긴 채찍이 결국 부인의 목을 타고 올라가 뺨까지 후려쳤을 때, 클라크는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는 걸 경험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서신용 나이프로 백작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아아악!”
바깥에 서 있던 집사와 기사가 낯선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클라크인가? 의아했지만, 방해하지 말라는 백작의 명이 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흐윽…….”
간간이 들리는 부인의 울음.
그리고, 드디어 어둠이 가시고 해가 떠오르는 시간.
영원히 닫혀있을 것만 같던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리엔 부인이었다. 백작의 것인지, 혹은 그녀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부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손끝으로 벽을 훑었다.
그녀의 흔적이 흐릿하게나마 이어졌다.
* * *
끼익.
이안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저택을 둘러봤다. 백작의 피살로 인한 충격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이안 본인이 그렇게 느끼고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직 마을에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듯한데…….
“이안 님? 어서 오십시오.”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안절부절못하며 앞장서 걸었다. 이안은 참혹하게 깨져있는 복도의 장식품을 모른 척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문제의 침실 앞, 검을 차고 있는 세 명의 기사와 집사 그리고 몇몇 하인들이 모여서 난감하게 뭔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이안 님 도착하셨습니다.”
“아.”
집사는 정신이 빠진 것 같아 보였다. 그를 보고도 별다른 인사를 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이안 역시 인사치레는 필요 없었으므로, 그저 손만 까딱거리며 들어갔다.
“오셨어요?”
“세상에. 부인.”
광경이 미칠 노릇이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아이보리 색 러그는 피가 흥건히 묻어있고, 방 안에는 제대로 된 물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가관인 건, 바로 소파에 앉아있는 리엔 부인.
“앉으세요. 꼴이 이렇지만.”
“무슨 일입니까? 대체 어떻게 된…….”
부인의 드레스는 어제저녁 식사 때와 그대로였다. 물수건으로 피를 대충 닦아내기만 한 것인지, 흰 피부 곳곳에 얼룩덜룩한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보시다시피, 난리 났죠.”
“백작님은요? 죽었습니까?”
“안쪽 침실에서 의사가 시체를 보고 있어요. 클라크가 매질을 당하다가 봉투용 나이프로 목을 찔렀거든요.”
후우, 그녀는 궐련 연기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고작 하룻밤, 달이 떠 있던 시간 세상이 바뀐 기분이었다. 이안은 이마를 짚으며 안쪽을 들여다봤다.
‘참나, 어이가 없군.’
하완에서 약을 밀매하여 계획을 세웠던 이유가 무엇인가? 법적인 처벌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그것이 부인이든, 아니면 동조하고 가담한 자들이든.
“이안 님. 인사 올립니다. 메렐로프의 삼기사 중 한 명인 푸울루입니다.”
이안은 낯선 사내의 인사에 고개를 돌렸다. 갈색 곱슬인 사내였는데, 부인이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영 곱지 않았다.
“그대가 서신을 보낸 것인가?”
“그렇습니다. 확인할 게 있는 터라.”
“확인? 나한테?”
이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부인은 그저 궐련만 테이블에 비벼 끄며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메렐로프 백작님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입니다. 주군의 죽음을 명명백백 밝히는 것이 도리이고 임무이죠. 백작님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라면 모두 처단하는 것이, 우리 삼기사의 마지막 사명이 될 것입니다.”
이것들 봐라?
이안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데?”
“리엔 메렐로프 부인과 어떤 사이시죠?”
“…뭐?”
어지간하면 이해가 될 터인데, 이안은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클라크가 죽였다고 했으니까, 자신의 사주를 의심하는 것인가?
그런데 질문이 왜 저따위인가?
“이자들은 이안 경과 저의 부정을 의심하고 있어요.”
“풉!”
부인의 말에 베릭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삼기사라 청한 것들은 진심으로 지껄인 것인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지랄도…….’
“클라크는?”
“지하 감옥에 구금 중입니다.”
“데려오게나.”
“그럴 순 없습니다.”
기사는 이안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나른한 목소리로 재차 명령했다.
“클라크 데려와.”
“사건의 전말이 명확해질 때까지 부인의 명도 들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이안 경.”
백작이 죽었으니 응당 다음 차기 백작이 정해질 때까진 그녀가 저택의 책임자였으나, 기사들의 반발로 인해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안은 기사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사건의 전말이랄 게 있나? 그대의 주인 성정이 개지랄 맞은 탓에 얻은 업보지. 주인이 죽어 나가는 동안 아무것도 못 했던 무능한 자들이 입만 살았구나.”
저들이 왜 저렇게 나오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브라츠만 하더라도 데르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세력이 뛰어들었다. 몰린과 에리카 그리고 그 뒤의 게일, 이안, 천려, 견제하는 마리브와 로만드로…….
“게다가 걱정되어 달려온 이웃을 이리 대하다니,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마침 우리 쪽에 황궁 자문관이 계시니 이번 일에 대하여 공증을 써달라 요청하겠다.”
이안은 바로 부인에게 눈짓했다.
“부인께서는 저택을 정리하실 때, 저 머저리들을 꼭 해고하시길 바랍니다. 가성비가 영 떨어져요.”
“이안 경!”
채앵!
기사가 항의하듯 소리치자, 나선 것은 베릭이었다.
“시끄러워. 왜 자꾸 빽빽거려?”
말 대신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대답했지만 말이다.
이안은 죽은 백작의 시체와 부인 그리고 기사들을 둘러보며 고민했다. 여차했다가 저들이 부인과 백작 동생을 밀어내고 저택을 점거하면, 일이 상당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다.
“베릭.”
“응?”
마치 황궁에서 이안의 존재가 거슬리는 것처럼.
“아무래도 정리를 해야겠는데.”
“여기?”
베릭이 칼끝으로 기사들을 가리켰다.
정리할 게 저 세 놈의 머리통이냐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