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3
제93화. 차기 영주
이안은 어이없어 손날로 베릭의 칼등을 밀었다. 대사막에서 기사 한 명과 싸우다가 배에 구멍 난 놈이, 무슨 자신감으로 세 놈을 한 번에 상대한단 말인가?
기사들 역시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 눈을 부라렸으나, 이안이 딱 버티고 있어 일단 참아보는 눈치였다.
“허튼소리 말고 로만드로 님이나 모셔오거라.”
“아, 그 뜻임? 미안.”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으나, 말이라도 저리 하는 게 어딘가 싶다. 이안은 부인에게 눈짓하며 신호를 줬다.
“다들 나가. 저자가 자문관을 모셔오는 걸 도와주든가. 할 일들 해. 여기 서서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
기사들은 여기 있어봤자 진전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순순히 문을 나섰다. 가운데 낀 집사가 어쩔 줄을 모르며 좌우를 둘러보는 순간, 부인은 새로운 궐련을 꺼내며 지시했다.
“집사는 가서 차라도 내오고. 손님 오셨는데, 상황이 엉망이라도 예의는 지켜야지.”
“알겠습니다. 마님.”
기사 중 한 명이 복도에서 팔짱을 낀 채 떡하니 서 있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는 꼴이, 부인을 반강제로 구금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끼익.
문이 완전히 닫히자,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이내 이안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억지로라도 차리세요. 기사 놈들이 엄한 짓 하기 전에 영지의 권리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백작의 동생에게는 사실을 알렸습니까?”
“아직이요.”
“그렇다면 빨리 알리는 게 좋겠습니다. 저 기사들이 메렐로프의 군사통솔권을 갖고 있는 거 아닙니까?”
브라츠와 달리 메렐로프는 많은 병력이 필요 없었다. 저택에서 부릴 수 있는 소수의 경비와 세 명의 기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병 체계. 딱 그 정도만으로도 안정적인 영지 유지가 가능했다. 천려족처럼 위협적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럴걸요?”
“대답을 들으니, 저들이 왜 저리 나오는지도 알겠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부인께서도 백작처럼 될 가능성이 있겠어요.”
이안은 시체가 뉘어있는 침실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메렐로프의 씨를 싹 말려버린 다음, 새로운 역사를 쓰기에 지금이 적기 아닌가.
“제가 저리 되면, 이안 경도 곤란하지 않나요?”
“곤란하되, 귀찮을 뿐이죠. 부인처럼 치명적인 건 아니고.”
지긋지긋하지 않나. 이번에는 황궁에서 메렐로프를 주목한다는 게. 하지만 그때쯤 되면 이안은 중앙에 가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이번 사건은 정말로 이안이 개입한 게 없었다.
‘부인이 협박질을 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예컨대, 지금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안과의 부정적인 관계를 거짓으로 자백하겠다는, 그리하여 진흙탕 속으로 그를 끌어들이겠다는 따위의 협박질 말이다.
“그런가요? 하긴.”
하나, 부인은 별로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날 밤의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애초에 자유만을 원하는 처지였으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다.
‘혹은 영리하던가.’
지금 이안을 자극하면 본전도 못 찾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차라리 도와달라고 한다면 몰라. 그녀는 맥이 쭉 빠진 채로 궐련만 잘근잘근 씹을 뿐이다.
“부인, 로만드로 님이 오실 때까지 집사를 통해 집무실의 인장을 챙겨두십시오. 그걸 갖고 있는 자가 곧 저택의 대변인이라는 의미니까.”
“아, 그거요.”
“그리고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면 됩니다. 중간에 기사들이 배신을 한다면 그때는 저희 쪽에서 병력을 지원해 드리죠.”
베릭도 있고, 아직 천려로 돌아가지 않은 전사들이 남아있었다. 그들이라면 기사 셋과 병사들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뭘 원하세요?”
부인은 눈만 깜빡거리며 웃었다. 대가 없는 호의란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닫지 않았나. 그녀의 말에 이안은 어깨만 으쓱거렸다.
“별로, 당장 생각나는 건 없는데요. 헌납금?”
“그러면 할 만하네요. 근데, 돈 말고 다른 걸 원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건 기사들도 얼마든지 제안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돈으로 얽힌 인연은 돈으로 쉽게 풀 수 있었다. 부인은 오직 그녀만 해줄 수 있는 계약을 원했다.
“지금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저택에 맨몸으로 들어와서.”
부인은 화장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벼운 손짓에 서랍이 열렸고, 그녀가 꺼낸 것은 의문의 연금술사가 만들어낸 반지였다. 이안의 목걸이와 같은 그것.
“궁금한 게 많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알아요? 이안 경의 것과 이 반지가 한날한시 함께 만들어진 것일지.”
시기적으로 보나 두 영지 간의 거리로 보나, 같은 상단의 같은 연금술사라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이안은 턱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반지라면 기쁘게 받을 것 같습니다만, 그 옆의 것은 글쎄요.”
하완 왕국에서 밀매했다는 신종 수면마취제다. 둥글고 검은 분첩은 이전과 같이 깔끔하게 닦여있었다. 부인은 어깨만 으쓱거리며 알아서 하라는 뜻을 보였다.
“싫으면 말고요. 제가 가진 것 중 제일 값어치 있는 걸 내놓았을 뿐이에요. 선택은 이안 경이 하시는 거지요.”
이안이 망설이는 기미를 보이자, 뒤에 서 있던 베릭이 고민할 것 없다는 듯 두 개를 채 왔다.
“준다는데 안 받겠다는 건 또 뭐야?”
“베릭. 아직 출발 안 했나?”
“갈 건데? 어라, 이거 왜 안 빠지지.”
“아주 엄청나구나. 정말.”
별생각 없이 검지를 반지에 넣었는데, 그게 제대로 끼었나 보다. 이안이 한심한 표정을 짓자 그는 쩔쩔매며 웃기만 했다.
“……기름칠해도 되나?”
“손가락을 자르는 게 더 빠르겠군. 부인, 나이프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로만드로 님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주인님. 기다리셔요.”
이안의 농담에, 베릭이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분첩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통은 갈아서 쓰세요. 요즘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지만, 아직 어색한 경우가 많아서.”
“쓰긴 어딜 쓴답니까.”
“곧 중앙으로 올라가시잖아요. 주워들은 거긴 하지만, 그곳이라면 쓸 만한 일은 많을 건데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다만, 퍽 정확했다. 바리엘의 중심이니만큼 화려하고, 어지러웠으며, 살벌한 긴장감이 맴도는 곳.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자들 중 대부분은 밤을 눈뜨고 지낼 게 분명했다.
그것이 집무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든.
“치사량은 하루에 2그램 이상, 한 달 연속 복용이에요. 그것만 잘 지키면 문제없어요.”
“한 달이 아니라 몇 년 뒤에 부작용이 일어나겠죠. 그나저나 그거 확실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베릭이 냄새만 맡고 쓰러진 게 이해가 안 돼서.”
“그건 모르겠다니까요? 저는 문제 없었어요. 그쪽 부하가 체질이 이상한가 보죠.”
부인은 단언컨대 진심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배에 구멍이 뚫려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놈이니 정상적인 체질이 아니긴 했다. 이안은 고개를 돌리며 뒤쪽을 쳐다봤다. 의사가 진찰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자잘한 것보다는 헌납금이 제일이긴 한데요.”
“보석을 팔아 마련하라면 할 수는 있어요. 근데, 근방에 물건을 받아줄 만한 보석상이 있나 모르겠네요. 셰이론 정도는 나가 봐야 현금화가 가능할 것 같은데.”
메렐로프에서 출납에 관한 권한은 오로지 가주만 갖고 있었나 보다. 적어도 브라츠에서는 저택 살림을 메리 부인이 담당했건만, 아무래도 의처증 있던 백작이 부인에게 힘을 나눠줬을 리 없다.
“아무튼, 일을 서두르십시오. 기사들이 행동하기 전, 먼저 움직이는 게 최선입니다.”
“…클라크는.”
이안이 방을 나서려고 하자, 부인이 붙잡으며 물었다. 담담하면서도 무딘 표정과 달리 목소리에는 의외로 물기가 묻어났다. 보면 볼수록 묘하고 이상한 여인이다.
“클라크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다니요? 예외 없이 사형이죠.”
데르가처럼 법에 기반한 황궁의 처단 외, 귀족이 살해당하는 건 전쟁터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귀족을 살해하는 건 중죄였으며, 가해자가 노예인 경우에는 재판 열 거리도 없었다.
“클라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놀란 참이었습니다. 기사들이 즉결심판하지 않았다는 건, 결국에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방증하기도 하죠.”
“…정말 예외가 없나요?”
“노예가 귀족을 죽이고 살아남은 경우요? 있을 수도 있지만,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아, 타국에 노예 출신 국왕이 있다고는 하던데…….”
이안은 잠시 멈칫거렸다. 그가 기억하는 역사가 지금 일어난 일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연도를 더듬어 보니, 얼추 시기가 비슷하게 맞물리는 것 같다.
“그자가 처음 죽인 게 제 주인인 귀족이라 하더군요. 클라크도 왕이 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인은 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손톱 끝만 가볍게 튕겨댔다. 아무래도 클라크의 목숨만이라도 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도와주실 수 있나요?”
“부인, 죄송하지만 저는 곧 중앙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더 이상의 소란에 휘말릴 수는 없습니다.”
“이안 경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귀족을 죽인 노예를 무슨 수로 구한단 말입니까?”
“아니요. 이미 하셨잖아요. 천민 출신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살아남아 가주까지 되었으니.”
이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화가 조금씩 어긋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인은 부인대로 중얼거리고, 이안은 이안대로 대답하는 기분이다.
“부인.”
“제가 영주가 될게요.”
“네?”
“안 되나요?”
당당한 물음에 이안이 멈칫거렸다.
“…영주라고 해서 남자만 되라는 법은 없지요. 하지만 부인. 부인은 메렐로프 가의 혈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영식이라도 있다면 상관없겠다만, 백작까지 죽은 마당에 메렐로프 가문의 입장에서 부인은 외부인입니다.”
그뿐인가?
유일하게 지지와 반대의 키를 쥐고 있는 백작 동생이 찬동할 리 없었다. 그러니 영주가 되려면…….
“여길 다스리는 가문을 바꾸는 법밖에 없습니다.”
브라츠와 마찬가지로 메렐로프의 이름을 지워 버리는 것. 기사들이 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인은 고민에 빠진 것처럼 다시 의자에 앉아 창밖만 바라봤다.
“영주가, 가주가 된다면 저는 여길 벗어나지 못하겠죠?”
자리를 비울 수는 있으나 본질은 결국 한곳에 묶이는 신분이 되는 것이다. 리엔 부인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하던 처지에서 나아질 게 없다.
‘아니지. 백작이 없으니까 낫긴 낫겠군.’
자유와 사랑.
이안은 부인의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얽혀있는 두 고민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솔직히 이안에게는 일면식도 없는 동생보다 부인이 영주가 되는 게 이득이긴 했다. 어느 정도 관계도 있고, 치부를 알고 있으며, 영지 확장에 욕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기사들이나 백작의 동생이 영주가 되면, 이안이 중앙으로 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벌일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도 백작 동생이 있으니 섣불리 나섰다가는 입장만 곤란해질 수 있다.’
일종의 눈치 싸움이었다.
여기서 이안이 메렐로프까지 흡수한다면, 변경의 비대한 세력 확장을 빌미로 게일이 다시 개입할 여지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마리브에게 확실히 자신의 가치를 각인시킬 수도 있겠지.
‘일단, 백작 동생부터 만나보는 게 좋겠다.’
이안은 겉옷을 가다듬으며 부인을 돌아봤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의 고민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는 백작의 동생에게 사안을 알리고 오겠습니다. 마을 외곽의 저택에 산다고 하던데, 그분 이름이?”
“다이브 메렐로프.”
“금방 다녀오죠.”
이안은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서두른다면 베릭이 로만드로를 데려오기 전까지,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