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30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30화(930/935)
제930화. 다시 10년
한밤중에도 환하게 켜진 마법부. 이안은 휴게실에 잠들어 있었고, 아레나와 마법사들은 아직도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와 씨름하느라 끙끙대는 중이었다. 하도 왔다 갔다 하느라 장관실 문이 한 시도 가만있질 못했다.
사락.
“토올룬 쪽은 반응이 없대?”
“예. 오늘 확인한 바로는 아직 이상 징후가 없습니다.”
“이상하네. 원래 지하신이 거점으로 삼았던 나라가 그곳이잖아.”
아레나는 수북이 쌓인 잔들을 옆으로 치웠고, 곧장 보좌관이 한 주전자 가득 끓인 커피를 졸졸 따라 줬다.
“이번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이라. 상당히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 아레나는 지난 100년간의 기록을 샅샅이 뒤져 지하신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지하신에 대한 힘은 ‘믿음’에서 나온다. 그래서 100년 전에는 토올룬을 중심으로 그 나라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해 세력을 확장했다고 적혀 있어. 근데 이번에는 아니다?”
“믿음은 한번 깨진 이상 다시 원복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토올룬에게 있어 그날의 역사는 치욕이자 절망이며 두려움 그 자체였다. 지하신으로 인해 수도가 초토화되었고, 바리엘의 지배하에 쇠퇴하여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나라가 되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다시 지하신의 믿음을 심어 내기란 어려운 일일 터다.
“지하신 이 새끼가 다시 밖으로 나오려면, 반드시 어떤 매개가 필요할 거야.”
“저도 동의합니다.”
믿음을 끌어모을 수 있고, 신의 인도 아래 살아가는 가이아인들 틈으로 숨어들 수 있는 보호막 말이다. 아레나는 지도 속 각기의 나라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게 어딜까…. 버고스와 클리포포드, 특히 클리포포드는 바리엘과 우호적인 관계이니 섣불리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고.”
“남은 것은 루스웨나입니다.”
“가능성 있지.”
루스웨나 역시 타국과 같이 바리엘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뿌리부터 물든 감정은 결이 좀 남달랐다. 바리엘이 직접 수도까지 치고 들어가 왕을 처단했던 역사가 있는지라 이들과는 애증에 가까운 사이라 볼 수 있다.
“루스웨나 쪽 동태를 살펴보자고 할까?”
“그것도 현명한 판단입니다만…….”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100년 전, 이미 지하신은 한 차례 힘을 잃고 지금 와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전처럼 국가 단위의 세력을 장악하여 믿음을 확보하는 쪽보다는 소수의 세력을 이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봅니다.”
흐음. 아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이전과 같은 큰 전쟁은 없을 것 같고, 내부에서부터 흔들면서 잡음을 만들어 낼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하신이 씨앗을 심은 ‘누군가’로 인해 황궁의 평화가 깨질 수도 있다. 딱 한 명. 그 한 명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면, 마법사가 될 수도 있고.’
아레나는 서류에 서명하며 지시했다.
“일단 지켜보자고. 루스웨나 쪽은 자세히 살펴보고, 이안에게는 당분간 부탁 좀 한다고 해.”
“예. 다행히 무리 없이 업무를 잘 소화하고 있습니다.”
“걔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몰라. 이드갈은?”
포탈 여는 것 외, 이안에게 주어진 임무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균열지에서 했던 것처럼 이드갈을 생성하고 조종하는 걸 다시금 시도하는 것.
보좌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도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답니다. 아직은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 진짜. 내가 그걸 직접 봤어야 하는데.”
아코 저 미친것은 그때만 떠올리면 잔뜩 흥분해서는 알아들을 수 없게 설명을 해 대고, 헤일은 보질 못했으니 물을 게 없었다. 제국방위부 인간들? 사심과 감정을 담아 음해하려 들 게 분명하니 그놈들 말은 애초에 들을 가치가 없다.
“이안에게는 계속 시도해 보라고 해 봐. 이드갈을 자유자재로 생성할 수 있다면… 여러모로 판도를 뒤집을 수 있으니까.”
어떻게 될까. 균열을 억제할 순 있겠지만, 역설적이게도 마법부 스스로를 견제하는 꼴이 될 게다. 어쩔 수 없다. 이드갈이 시중에 풀리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에 대한 규제는 분명 필요할 테니.
다행히 이안은 영특한 아이이니 이드갈의 존재가 양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만, 일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나.
‘잘 하자. 아레나. 시발.’
짜악!
아레나가 스스로 볼을 내려치며 다그치자, 보조관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이안은 무조건, 무조건 선(善)을 기준 삼아 자라야 했다. 정확히는, 바리엘의 정의를 따라서.
“근데 그건 뭐지?”
“아. 제국방위부에서 온 것입니다만.”
“으, 냄새나. 짜증 나.”
보좌관이 웃으며 그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크로니 지휘관에 대한 국장(國葬) 건의입니다.”
“뭐?”
전쟁 중에 최고 지휘관이 전사했으니 이에 대한 대우를 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승리한 것도 아니고, 몰래 뒤에서 이드갈 빼돌리려고 했던 주제에 말이다.
“와, 진짜 어이가 없네. 북쪽 부족 놈들은 아직도 입 안 연대?”
제국방위부가 이드갈을 빼돌리려고 했다는 증거는 북측이 갖고 있다. 하지만 놈들은 죽으면 죽었지, 절대 인정하지 않고 발뺌하는 분위기였다. 인정하는 순간 제국방위부와의 관계가 바로 깨지기 때문이다.
“예. 아무래도, 마법부와 마찰이 있었다 보니 제국방위부와의 관계를 놓을 수 없다고 판단하나 봅니다.”
이미 마법사와는 치고받았으니 끝난 관계. 이들로부터 북부 동맹을 지키기 위해서는 제국방위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물론 지금은 크로니도 죽고 장관과 부장관 모두 공석이지만, 언제까지 비운 채로 가만두겠는가? 얼마 안 가 정상화될 터.
“하여간에, 대가리 굴리는 거 하나는 제일 열심이야.”
제국방위부가 정상화되면 북측을 도와 이드갈 사건을 무마하고 부정하려 들 것이다. 그리해야만 그들 역시 마법부에게 빌미를 주지 않을 수 있으니까. 생사를 함께하는 관계다 보니, 북측은 제국방위부의 이드갈 사건 개입을 연신 부정하고 있다.
“조금 더 강하게 밀어 보라고 할까요?”
“안 되지. 종전 선언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일단 그쪽 정세 파악해서 보고서 올리라고 해. 아스타나? 그쪽은 마법부에 호의적이라며?”
“정확히는 이안에게 호의적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쪽 왕도 참 희한한 노인네라니까. 우리가 증거 잡으려면 아스타나 쪽 파는 수밖에 없다. 공식적으로 회담 요청하고 마법부로 초청하자고.”
“예, 알겠습니다. 장관님, 하면 국장 건은……?”
“꺼지라 그래. 씻을 시간도 없이 일하는데 크로니 그 새끼 뒤치다꺼리를 누구한테 맡기는 거야? 양심 없나?”
인력 부족 명분으로 거절해야겠군.
어차피 마법부 없이도 국장은 치러질 것이다. 마법이 없어 조금 심심은 하겠지만 추모 행진 정도는 가능했고, 현재 위태로운 제국방위부의 결집과 사기를 위해서라도 이벤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전쟁에서 죽은 지휘관을 추모하는 건 관례기도 하고.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다 엎어졌네.”
아레나는 턱을 괴고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안이 자신을 북쪽으로 보내 달라며 결연하게 부탁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크로니가 자신의 부모를 죽였노라고, 하여, 지금 그를 상대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자신은 두려움에 떨며 살게 될 것이라고…….
‘찜찜하게 끝났어.’
크로니가 죽은 이상 더는 이안이 위협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안은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칠 수도 없고, 라토 알파트, 크로니 친부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하여간 개새끼.”
서류를 챙기던 보좌관이 움찔하며 그녀를 돌아봤다.
“크로니 말입니까?”
“역시 척하면 척이네. 그렇지 않아? 온갖 일은 다 저질러 놓고 이딴 식으로 죽어 버리는 꼴 좀 봐. 내가 그 새끼 처음부터 영 별로다, 싶었지.”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습니다만.”
“시원하지가 않아. 찜찜한 건 언젠가 문제가 된다고.”
보좌관은 잠시 고민했다. 문제가 된다라? 균열 속으로 빨려들어 가 시체조차 찾지 못하게 된 크로니로 인해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길까? 글쎄다. 원한을 가진 이안의 입장에 너무 몰입하신 것 같은데.
“서류 처리하겠습니다. 벌써 새벽이니 눈 좀 붙이십시오. 깨워 드리겠습니다.”
“얼마 후에?”
“한 시간 반 후에요.”
“하! 고마워라.”
근데 넌 안 자냐? 아레나가 소파에 벌러덩 누우며 물었다. 이미 사무실에 남은 마법사 절반 이상이 제자리에서 고개를 뒤로 꺾은 채 졸고 있었다.
하지만 보좌관은 그저 웃으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제 할 일을 마저 하겠노라 말하듯이.
끼이익.
문을 나서자 보좌관 앞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로만드로 님?”
“아, 보좌관님.”
복도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간단히 눈인사를 나누었다. 웬걸, 둘 다 꼴이 말이 아닌지라 조금 놀란 기색이다. 로만드로는 휴게실 쪽으로 가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안 님 옷가지 좀 가져왔습니다. 보니까 같은 옷을 사흘째 입고 계시더군요.”
“이런. 제가 신경 좀 쓸걸 그랬습니다.”
“아뇨, 아뇨! 제가 해야죠. 장관님 일만 해도 바쁘실 건데.”
로만드로는 옷가지가 든 종이가방을 한가득 안은 채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안 님, 진짜 대단하지 않습니까? 제가 대대로 마법부에서 일을 해 오고 있는데, 이렇게 천재적인 마법사는 처음 봅니다. 아. 듣기로는 아주 예전에 한 분 있었다고 하던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이안 님은 크로니 경의 죽음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크로니요?”
“예. 장관님께서는 좀 걱정하시네요. 스스로 매듭짓지 못한 과거란 으레 마음에 흔적을 남기는 법이니까요.”
“이안 님이 요즘 너무 바쁘셔서 자세히 물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북쪽에서 돌아오고 나서 얼굴 두어 번 봤나? 로만드로는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믿기지 않는다고 하긴 하더군요.”
“믿기지 않는다?”
크로니가 균열에 잠긴 걸 제일 가까이서 보았음에도 믿기지가 않는다니. 실감이 안 난다는 뜻인가?
“아직 살아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장관님이 말씀하신 매듭이라는 게 그런 건가 봅니다. 상황에 휩쓸리듯 마무리되니, 끝나도 끝난 것 같지 않은 느낌이지요.”
“뭐, 시체도 못 찾았으니…. 사실 저도 아직 실감 나진 않습니다. 하하.”
로만드로는 휴게실 쪽으로 가겠노라 고갯짓하며 덧붙였다.
“그래도 확실한 건, 앞으로 이안 님은 무사히 자라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아이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를 거니까요. 저도 부지런히 따라가야겠습니다.”
좋은 대화였노라고, 보좌관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보좌관과 헤어진 로만드로는 휴게실 문을 조심히 열며 이안을 찾았다. 휴게실 맨 끝, 침대에 얌전히 누워 쌕쌕거리는 이안이 보였다.
“…….”
경망한 말이지만, 고것 참 곱게도 자는구나. 로만드로는 이부자리를 정돈해 주며 아이의 머리맡에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방금 나눈 대화를 찬찬히 곱씹었다.
‘그래. 이안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를 거니까.’
로만드로는 새삼 귀여운 이안의 볼을 콕 찌르며 웃었다. 아이가 자라면 어떤 모습일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때였다. 곤히 자던 이안이 몸을 뒤척였다.
“흐음.”
헉! 로만드로는 혹여나 이안이 깰까 봐 화들짝 놀라 굳어 버렸다. 다행히 이안은 기분 좋다는 듯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고, 이내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잘 자라, 이안.’
달깍. 은은하게 켜져 있던 불이 완전히 꺼졌다.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고요함이 실내를 잠식했다. 하지만 이안의 시간은 분명히 흐르고 있었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이안이 16세를 앞둔 어느 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