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31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31화(931/935)
제931화. 지난 시간
“저쪽이다!”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서 숲속을 가리켰다. 어둠 속 불빛이 흔들리며 흩어졌고, 동시에 기이한 발소리가 울렸다.
사박사박사박.
사람의 발소리는 분명히 아니고, 짐승의 것이라 하기에도 너무 낯설다.
타앗!
“이쪽! 이쪽으로 몰아!”
바리엘 병사들은 부채꼴 진영으로 달리며 어둠 속 표적을 쫓았다. 그들의 손에는 아주 날카로운 검이 들려있었는데, 일반적인 검과는 재질이 달랐다. 강철보다 가볍고 무딘 듯 보이는 검. 데라족의 무기였다. 검 끝엔 피가 낭자하게 묻어 있었다.
키이이이익!
숲 바닥을 기며 도망치던 마물이 거대한 절벽과 마주했다. 실처럼 가느다란 다리들로 오르기에는 무리지만 별수 없다. 여기서 병사들을 상대하다가는 무조건 죽음이니. 저 무기만 없었더라면! 머리부터 잘근잘근 씹어 먹던, 하찮은 인간들이건만!
촤악!
거미 형태의 마물이 절벽을 오르자 병사들이 당황해하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높이도 높이지만 거의 수직에 가까울 정도의 각도다.
“내려와라, 마물 놈아!”
“아, 다 잡았는데…….”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
“길이, 길이 있던가?”
“막내, 너는 여기서 계속 지켜보고 있고!”
병사들이 좌우로 뛰어가며 절벽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막내 병사는 그저 어둠 속에서 가만히 서서는 기괴한 마물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10년 전, 갑작스러운 균열의 활성으로 가이아 곳곳에서 마물이 넘쳐났다. 선대의 회상으로만 전해 듣던 마물의 범람이 다시금 일어났노라고,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던 것이 아직도 생생했다.
키이익.
절벽을 겨우 다 올라간 마물이 첫발을 위로 딛는 순간이었다.
스윽.
누군가의 발이 마물의 다리를 가볍게 짓밟았다. 아주 차분한 느낌인지라, 마물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거리며 머릴 들었다.
“…….”
백금발 머리칼을 휘날리는 벽안의 소년. 뒤로 비치는 달빛마저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싸늘한 표정이었다. 어딘가 신비로운 그 분위기에, 마물은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다.
“이안 님!”
그때, 밑에서 소리치는 막내 병사의 외침에 퍼뜩 정신 차린 마물이 소년을 공격하려 했다. 수십 개의 가느다란 다리가 꼿꼿하게 서면서 소년의 목과 심장 부위를 노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이잉!
벽안이 금빛으로 변했다.
이안은 고개를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마물의 몸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어떠한 주문도 마법진도 없이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커어억!
마물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서는 신음만 겨우 흘렸다. 수십 개의 눈알이 데굴데굴 구르며 도망칠 길을 찾았지만, 절벽 끄트머리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투욱.
이안은 발끝으로 마물의 몸을 가볍게 밀었고, 마물은 마치 약 먹은 벌레처럼 굳은 채로 추락했다.
쿵! 커다란 충격음에 막내 병사가 놀라서 검을 다잡고 마물 쪽으로 달려갔다. 마법사는 아니어도 이 검만 있으면 나도 마물을 단번에-
촤아아악!
「기속(羈束)」.
이안이 막내 병사 뒤쪽을 가리키며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거대한 빛 조각이 떨어졌다.
쿠웅!
촤아아악!
이어서 병사의 등을 흠뻑 적시는, 뜨끈하고 끈적하며 불쾌한 무언가. 병사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주둥이를 쩍 벌린 채 머리가 잘린 마물이 코앞에 쓰러져 있었다. 어둠 속, 뒤에서 다가오는 마물을 발견하지 못한 게다.
“……!”
병사는 쿵쿵 뛰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다시 앞으로 돌아섰다. 절벽에서 떨어진 마물의 숨통을 끊어 낼 심산이었다. 그런데-
키아아악!
그 짧은 사이, 정신 차린 마물이 다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덤벼들었다.
병사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마물은 쉽게 피했고, 빈틈을 노려 손톱을 바짝 세웠다. 독이 철철 흐르는 손톱이 병사의 목젖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촤아악!
어느새 내려온 이안이 검으로 놈의 팔을 베었다. 아니, 다리를 베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사지가 잘린 놈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뒤로 고꾸라졌고, 검붉은 피를 분수처럼 터트렸다.
이안의 볼에 피가 튀자, 그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놈의 심장에 검을 푸욱, 꽂아 넣었다. 마물은 몇 번 경련을 일으키다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
“…….”
거짓말처럼 고요해진 사위. 침묵을 깬 건 병사들의 고함이었다.
“방금 무슨 소리야?”
“어, 저깄다!”
“죽었나? 일단 내려간다!”
절벽 위로 올라갔던 병사들은 마물이 떨어진 걸 뒤늦게 확인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느라 소란이었다.
한편, 굳은 채 식은땀만 흘리던 막내 병사가 뒤늦게 이안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안 님.”
“…괜찮나?”
“아, 예.”
“앞으로는 정신 똑바로 차리시게.”
“…죄, 죄송합니다.”
이안은 손등으로 마물의 피를 훔쳐 내며 등을 돌렸다. 그 잠깐의 틈으로 보인 두 눈은 어느새 벽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후, 이안은 본대로 복귀하자마자 물그릇을 내오라 지시한 다음 손과 얼굴을 닦아 냈다.
“이안, 왔어?”
천막 안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던 마법사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이안의 옷이 엉망인 걸 보고서 낄낄대며 일어났다.
“피 좀 봤구나.”
“오늘은 선배님 차례였잖아요.”
“우잉. 나 여기 다쳐서 힘들잖오.”
“…귀여운 척하지 마십시오.”
마법사가 상처 입은 팔을 들어 보이며 들러붙자, 이안은 성가시다는 듯 얼굴을 밀어내며 씻는 걸 마저 마무리했다.
“오늘은 한 마리였나?”
“두 마리였습니다. 보고된 마물이었고요.”
“아, 그래? 그럼 이제 인근 지역에 마물은 없다고 봐도 되겠네?”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흐음. 확실히 올해는 마물 수가 적어. 그치?”
10년 동안 서서히 일어난 마물의 출몰은 7, 8년 차에 최고조를 찍었다. 한 번에 수백 마리가 나타나서 영지 하나를 초토화시킨 경우도 있었고, 국경선을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마물이 밀고 들어온 때도 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데라족의 무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일차적으로 막아 내고, 이어서 마법사들이 지원해 큰 피해 없이 처리하긴 했지만.
“그러게 말입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이안도 동의했다. 이는 바리엘만이 아니라 가이아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가면 갈수록 마물이 범람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10년째인 지금은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 그 수도 적었고, 개체별 위력 또한 하급이었다.
마법사가 서류 작성을 위해 펜을 들며 웃었다.
“몇 년 전에도 네가 있었으면 딱 좋았을 건데.”
마법사들끼리 자주 하는 농담이었다. 마물이 한창 범람했던 그때, 이안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더라면 정말 일이 수월했을 거라는.
그때의 이안도 대단했지만, 지금의 이안은 두말하면 입 아팠다. 날이 갈수록 눈에 띄는 성장세는 모든 마법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장관님 설득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했지. 백번도 더 했다. 근데 열다섯 넘을 때까지는 절대 안 된다고 딱 못 박으시니 뭐 더 어쩌겠어? 여차하면 내 주둥이에 못 박을 기세였는데.”
마법사의 너스레에 이안이 희미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낮고 듣기 좋은 웃음. 이리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마저 차분해지는 듯하다.
참 희한했다. 다섯 살 때부터 우악스러운 마법부 생활을 했는데, 어찌 저리 우아하게 웃을 수 있는 걸까? 귀족 피는 못 속인다는 게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마법사가 턱을 괴고서 이안을 빤히 구경하자, 이안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에구, 언제 이리 컸나 몰라.”
또 저 소리다. 이안은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젓고서 물었다.
“바로 복귀 안 하십니까?”
“내일까지잖아?”
“임무 끝났으니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만.”
“아, 제발. 이안아. 우리 쉬엄쉬엄하자. 너! 이렇게 상쾌하고 맑은 공기와 운치 있는 숲 전경을 두고서, 그 퀴퀴한 마법부로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면 골골대는 인간들 침 냄새밖에 안 나는데?”
“돌아가면 선배님들께 그 말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전해라! 없는 말 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여기, 철자 틀리셨습니다.”
“어디? 엥?”
“장관님이 한 번만 더 틀렸다간 죽여 버린다고 했으니 조심하십시오.”
“와 씨. 마물보다 이게 더 무섭다, 무서워.”
마법사는 오탈자를 확인하자마자 종이를 대충 구겨 던져 버리고는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안은 오늘 복귀하긴 글렀다는 생각과 함께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스윽.
벗은 상체 위로 그의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가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10년 전, 황제가 하사한 것이었다. 혹여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의적 판단하에 동결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하지만 지난 10년간 그런 일은 없었어.’
이안은 이제 동결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고, 황제는 지난 과거보다 더 늙었지만 이상하게 병세는 악화되지 않았다. 몇 년 안에 국상을 치를 것이라 예상했던 사람들을 비웃듯, 그는 침대에서 끈질기게 생명의 끈을 붙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크로니가 사라지니 황제가 살아남았다. 제국방위부 장관으로 프레디가 임명되면서 부서가 재정비되었지만, 그들의 전성기는 잠깐에 그쳤다. 마물의 습격이 줄면서 그들의 역할 또한 줄고 있었으므로.
‘혹시 황제 폐하의 건강에도 크로니가 개입했던 걸까?’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비도 죽이는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크로니가 사라지자, 어둠 속에서 그를 위해 은밀히 움직이던 세력들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황궁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빠각.
갑작스러운 소리에 이안이 뒤를 돌아봤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펜촉이 구부러지며 잉크가 터진 것이었다. 마법사는 잉크를 얼굴 가득 묻힌 채 굳어 버렸고, 이안도 할 말을 잊어 입만 벌렸다.
“이, 이안아…….”
“…저리 가십시오. 제가 작성하겠습니다.”
“이안아. 나 눈이 안 보여.”
“뜨면 보이십니다.”
이안은 마법사를 밀어내며 새로운 펜을 꺼내 들었고, 그를 대신해 보고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갈하고 단정한 필체였다.
* * *
“얼씨구?”
아레나는 턱을 괴고서 보고서를 살폈다. 멀끔한 모습으로 서 있는 이안과 얼굴에 잉크 자국을 덕지덕지 묻힌 마법사.
“마물 처리 담당은 이안이었을 건데?”
“네. 맞습니다.”
“근데 보고서도 이안이 썼네?”
“…….”
이안은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입을 다물었다. 아레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막내한테 짬처리 했지.”
“아닙니다! 제가요, 잉크 공격을 당해서-”
“꺼져!”
“흐익!”
마법사가 도망치듯 장관실을 뛰쳐나갔고, 이안 역시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리려 했다.
“이안.”
“예, 장관님.”
“요즘 별일 없지?”
별일? 느닷없는 질문이라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레나는 별일 없으면 되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고, 이안은 차분히 문을 닫았다.
끼이익. 쿵.
문이 닫히자마자 아레나가 책상 위로 엎어지며 보좌관에게 찡찡댔다.
“아, 이안이 요즘 사춘기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존댓말도 깍듯하게 하고!”
“…원래 그랬는데요.”
아레나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일만 하잖아!”
“안 그러면 마법부에서 뭐 합니까?”
“하아, 몰라. 너도 변했어. 예전의 이안이 맛이 안 난다고. 이제 포탈에서 떨어질 때 한 바퀴 안 도는 거 알아? 보고서도 봐! 무슨 80살 먹은 노인네처럼 정갈하고 깔끔하잖아!”
“…그건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넌 몰라, 아무것도 몰라…….”
애를 키운다는 게 이런 걸까. 다섯 살 난 이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제법 소년티가 나는 이안이 대견하면서도 아쉬웠다.
게다가 이제 슬슬 성년식을 앞둔 터라, 아레나는 이안의 ‘성정’에 관심이 많았다. 속된 말로, ‘잘 키웠는지’가 걱정되는 것이다. 보좌관은 하등 쓸모없는 걱정이라 여겼지만.
“…….”
한편 문밖. 이를 들은 이안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대화가 밖으로 흘러 나가는 줄도 모르고 연신 아웅다웅했다.
‘장관님도 참.’
이안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백금발의 머리칼이 하늘하늘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