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4
제94화. 찬탈
다이브의 거처는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부인의 명으로 동행한 집사는 얼이 빠진 것처럼 마차 밖만 응시했다. 아무래도 모시던 주인의 죽음이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으리라.
“…이안 님.”
이안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단둘만 있으니, 진실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무엇을 말인가.”
“정녕 마님과 아무 관계가 아니십니까?”
“하, 참나.”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 나에게는 쓸데없는 질문인데.”
집사는 의아했다. 이안과 그런 사이가 아니라면, 어째서 부인은 그토록 질겁하며 침실로 돌아가는 걸 거부했을까? 질겁한 그 행동은 누가 봐도 비밀이 탄로 난 자의 것이었다.
“두 분이 정말 그런 게 아니라면, 마치 모든 비극의 시작이 저의 오판으로 시작된 기분이라 그렇습니다.”
하인들이 수군덕대는 걸 무시했더라면, 백작이나 부인 그리고 클라크 모두에게 비극적인 밤은 아니었을 것 같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먼이라고 했나?”
“예.”
“사먼, 누가 비극이라 하던가?”
“…예?”
“누군가의 죽음이 꼭 비극인가? 백작 본인에게는 당연히 그러하겠지만, 그의 죽음을 바라던 자들에게는 그만한 축복이 어디 있겠나. 집사 자네도 잘 알 거라 믿네만.”
매질 당하여 사지를 저는 하인들이 수두룩했고, 그들을 대신해 멍 꽃을 피우던 부인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봤다.
사먼은 눈두덩이를 가리며 낮은 목소리로 한숨만 내쉬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비극이라 할지라도 그건 자네의 오판 때문이 아니라 백작의 지랄 맞은 성격 때문에 그런 걸세.”
이안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는 와중, 마차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다이브의 거처에 도착한 것이다. 외곽으로 많이 빠져서 그런지 주위에 인가가 드물었다.
“음. 생각보다 아기자기하고 보기 좋군.”
낮은 지붕에 3층짜리 저택. 평민들의 보금자리와 비교한다면 궁전이라 칭할 수 있겠지만, 귀족이라는 작자가 살기에는 상당히 수수했다. 작은 정원에 버드나무 하나만 심어져 있을 뿐이다.
“사먼 집사님 아니십니까?”
인기척에 나온 하인이 사먼을 알아보고 꾸벅 인사했다. 어지간해서는 직접 오는 일이 없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거기에 낯선 사내까지 데리고서.
“다이브 님은 안에 계신가?”
“네. 기도 중이십니다만.”
“비보가 있다. 안내해라.”
“아, 예. 이쪽으로…….”
비보라는 말에 하인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의 안쪽 역시 별로 특별한 게 없어 보였다. 벽에 걸린 어두운 풍의 그림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나저나, 기도?’
좀 의외였다. 변경에서는 신실한 자를 찾기 어려웠으니까 말이다. 중앙이야 교황청도 있고, 그나마 마법과 가까운 곳이라 신에 대한 경외심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영주의 권력이 곧 황제와 맞먹는 곳 아닌가. 모든 게 백작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내세울 만한 자리가 없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끼익.
하인은 이안과 사먼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저택에 시중들만한 사람이라곤 저자뿐인지, 인기척도 없고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이안은 괜히 쭈뼛거리는 뒷목을 매만지며 사먼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다이브 님은 어떤 분이지?”
“다이브 님이요? 잘 모르셨습니까?”
“내 동생도 아닌데 어찌 알겠는가.”
사먼은 어떤 말로 그를 표현할지 고민하는 것 같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이안은 더 자세히 응접실을 둘러봤다.
붉게 칠한 박달나무 십자가와 기하학적인 무늬의 테이블보, 바싹 마른 나뭇잎, 형형색색의 구슬을 이어 꿴 장식품, 책장 없이 천장까지 쌓아 올린 서적들…….
“다이브 님의 심미안이 참 특이하다는 것 외에는 영 모르겠군.”
사먼은 굳게 닫힌 문을 한번 힐끔거린 다음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 저도 어릴 적 일은 잘 모릅니다만, 그, 듣기로는 다이브 님께서 학구열이 굉장히 높은 분이셨다고 합니다.”
“학구열?”
사먼도 메렐로프 출신이 아니라 정착민이었기에, 그들의 어린 시절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알음알음 소문처럼 흘러내려 오는 것만 단편적으로 외고 있을 뿐.
“백작은 돈 계산 말고 학식 쪽은 영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사먼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닌지라 가볍게 무시했다.
“백작님께서는 그 학구열이 축복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저주였다는 말씀을 하셨었죠. 외국에서 들어온 금서를 읽어버렸거든요.”
“금서라 하면, 어떤?”
“지하신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아아. 지하신.”
“아십니까?”
이안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었으나, 본질은 간단했다. 타국에서 하층민들 사이로 만들어진 신흥종교. 이때만 해도 그저 수많은 이단 중 하나로 여겨졌지만, 시대가 지날수록 규모가 커져 영향력이 강력해졌다.
‘바리엘은 영향권 밖이지만, 다른 나라들은 골머리 꽤 썩혔지. 종교전쟁이 일어나곤 했으니까.’
메렐로프가 바리엘에 들어오는 신문물의 교역지를 담당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과 접할 기회가 생겼을 것이다. 이안은 팔짱을 낀 채로 턱을 매만졌다.
‘참나, 이거 영지 꼬라지가 영…….’
어떻게 이제껏 굴러왔나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영주였던 백작은 의처증이 심한 정신이상자였고, 하나뿐인 후계자는 이단이라. 막장도 이런 개막장이 없다.
‘이러면 부인 말대로 가주를 갈아치우는 게 낫겠다.’
이단자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그 뒷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길게 본다면 이안의 영지뿐만 아니라 바리엘 자체에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
끼익.
“사먼.”
“아, 다이브 님.”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다이브가 들어왔다. 백작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날 것으로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젊다. 서른 살 중 후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 확실히 이목구비는 백작과 닮아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칩거하며 기도만 할 것 같은 이우라가 확 풍긴다고 해야 하나.
“지하신께 응답을 받았다.”
“그, 비보가 있습니다.”
“누가 죽은 것인가.”
흠칫. 그 신통함에 사먼이 놀라며 고개만 끄덕였으나, 이안은 어이없이 콧방귀만 뀌었다. 비보라 하면 당연히 누군가의 죽음이지. 뭐 그리 대단한 걸 맞췄다는 듯 행동하는 꼴이 우스웠다.
“백작님께서 어젯밤 저택의 아랫것에게 그만, 변을 당하셨습니다. 장례식을 위해 의사가 상처를 꿰매는 중입니다.”
“하아.”
다이브는 의미 모를 한숨만 내쉬었다.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도하며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손가락 끝을 겹쳐 제 이마를 짚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중증이군, 중증이야.’
“그런데, 옆에 분은?”
“아, 이웃 영지의 새로운 영주이신 이안 자작님입니다.”
사먼의 소개에 이안이 악수를 청했다.
“이안입니다. 아직 황제께 가문 명을 하사받지 못했으니, 편히 부르시면 됩니다. 현재 저희 쪽에 황궁 자문관이 와 계시고, 리엔 메렐로프 부인께서 도움을 요청하셨기에 이리 왔습니다.”
다이브는 그의 손을 한번 힐끗 보더니만, 마지못해 잡으며 화답했다. 그 역시 이안의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천민 출신의 사생아가 아비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영주가 되었노라고.
“도움이라면 어떤?”
“지금 이렇게 다이브 씨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저택의 이런저런 일들 말입니다. 아무래도 리엔 부인께서 워낙 경황이 없는 터라, 옆에서 봐줄 사람이 필요하더군요.”
“형수도 참 그렇네요. 식구 놔두고 굳이 외부인을 데려오는 게. 금방 준비하지요. 저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짧은 대화에서도 걸리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이안이 나이도 어리고, 바닥 출신이지만 그는 작위를 받았고 다이브는 작위가 없지 않나. 그저 귀족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은연중에 깔보는 기세가 녹아들어 있었다.
‘게다가 돌아가겠다니?’
과민 반응일 수도 있겠으나, 마치 저택이 본래의 제 것이라는 태도가 유독 거슬렸다. 다이브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응접실을 나섰고, 이안은 사먼을 돌아봤다.
“집사, 자네는 다이브 저자가 새로운 가주가 되길 바라나?”
사먼은 잠시 머뭇거렸다. 갑작스런 물음에 쉬이 입에서 그렇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은 탓이다. 백작도 그리 좋은 주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업 수완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다이브는? 성인이 된 이후 한 번도 업무를 본 적 없었으며 사이비에 정신이 팔려 하루의 절반 정도를 기도하며 지내는 자였다.
“아마 저자가 저택으로 들어오면, 자네도 갈 곳을 잃을 것 같은데. 자넨 가문 대대로 이어오는 인연이 아니지 않나.”
자고로 집사란 가주가 저택의 관리를 믿고 맡기는 자였다. 현재 다이브에겐 저를 모시는 하인이 하나 있었으니, 저택으로 돌아간다면 당연지사 그자를 집사로 임명할 것이다.
“저는 발언 권한이 없습니다. 백작님을 모셨으니, 그저 뜻을 이어받아 메렐로프의 영광만 바랄 뿐입니다.”
“흐음. 그래?”
정말로? 이안은 눈썹을 휘며 재차 물었으나,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그들은 다이브를 선두로 하여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 입구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이안은 익숙한 마차를 발견했는데…….
“이안 님 마차 아닙니까?”
“맞아. 베릭이 빠르게 움직인 것 같네.”
로만드로를 데리러 갔던 베릭이 도착한 것이었다. 저택 앞에 속속들이 도착한 관계자들의 모습에,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태세를 취했다.
“이안 님. 이게 뭔 일이랍니까.”
“일단 들어가시죠. 이분은 백작님의 유일한 혈육인 다이브 님입니다.”
“황궁에서 온 자문관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삼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위로는요. 괜찮습니다.”
다이브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앞장서 걸었다. 벌써부터 저택의 주인이라도 되는 태도였다. 제 집사와 함께 먼저 뛰쳐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이안이 로만드로에게 눈짓했다. 잠시 저 좀 보자는 뜻이다.
“이안. 무슨, 뭐가 정확히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네.”
“노예가 주인을 찔러 죽인 사건입니다. 근데 아무래도 저택 기사들이 심상치 않아요. 틈을 타서 저택을 점거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저택을? 그 말은, 영주 자리를 노린다는 것 아닌가?”
이안은 오전에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 주며 상황을 짚어주었다. 부인과 저 사이의 부정을 빌미 삼아 리엔 부인을 끌어내리고, 다이브 역시 처리할 게 분명하다는 걸 말이다.
“게다가 다이브는 지하신을 믿고 있습니다.”
“뭐어어? 오늘 무슨 날인가? 엎친 데 덮쳐서 개판이구먼.”
“지하신이 뭔데?”
“베릭, 나중에 설명해 주마. 잠시 듣고만 있거라.”
“허허. 참나, 변경은 정말… 예상을 계속 뛰어넘는 곳이란 말이지.”
로만드로는 질색하며 짜증을 부려댔다. 하필이면 지하신이라! 이단 중에서도 바리엘이 제일 골치 아파하고 혐오하는 종교가 아니던가. 중앙 출신 귀족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리엔 부인이 새로운 가주가 되는 게 제일 나은 선택지인 것 같습니다. 영주가 된 후의 일은 운명에 맡기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저희와 협상의 여지가 있는 사람이 좋아요.”
“나도 그건 동의하네. 기사들은 호전적이라 후에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지하신은 말도 안 되지. 엿이나 바꿔먹으라 하게나. 저자, 멀쩡하게 생겨서는… 쯧쯧.”
로만드로의 말에 이안은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개입하도록 하지요.”
“뭐, 좋은 방도 있나?”
“방도는 많은데, 제가 곧 중앙으로 올라가야 하니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습니다.”
이안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베릭이 눈을 반짝거렸다. 낌새를 알아챈 강아지와 같은 표정이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
“다, 죽이면 된다는 거 아님?”
“용케 그런 건 잘도 알아듣는구나.”
하지만 대놓고 쓸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명분도 없거니와 이 일의 주체는 리엔 부인이 되어야 하니까.
“죽이되, 조금 공들여서 죽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