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40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40화(940/951)
제940화. 훈련 시작
이안은 크로니의 저택에서 찾았던 흑정단 명함을 한 손으로 잡고 후- 불었다.
핑그르르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명함은 종이 재질이라는 점 외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말했던 것처럼 그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술 쪽이라는 건데.’
흑정단주가 주술사라는 걸 뜻하는 걸까?
이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차라리 마법사라면 상대를 파악하기에 쉬울 것이다. 그들 역시 마법사였으니까. 싫든 좋든 여섯 번째 감각으로 이루어진 끈으로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주술사라면 말이 달라지지.’
주술의 세계는 마법만큼이나 깊고 풍부하다.
그만큼 주술사들 또한 미지의 존재들이었다. 예전에 북쪽 술사들을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그들은 하나하나가 들판에 핀 꽃과 같았다. 각자의 색을 피워 내고 그 종류도 수백수천이라, 꽃잎이 섞인다면 쉬이 알아챌 수 없는.
‘반면 마법사는 한 그루의 나무 같은 존재고.’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인 것이 바로 마법과 주술이었다.
그때, 누군가 이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움이었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갯짓으로 시계를 가리켰다.
“퇴근 안 해?”
벌써 저녁 여섯 시를 조금 넘어간 시간. 이안은 아차 싶은 마음에 서둘러 서랍에 명함을 넣으며 일어났다. 다른 건 몰라도, 퇴근 시간 이후에 남아 있으면 아레나가 불같이 화를 내기 때문이다.
“밖에 친구가 계속 기다리고 있어.”
“친구요?”
누구? 베릭?
이안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팍 찌푸리자 다른 마법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퇴근할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서류에 코를 박고 떠들어 댔다.
“그놈 웃기는 놈이더구먼. 주는 대로 다 먹어.”
“아까 나갔을 때는 바닥에서 배 까고 자고 있더라.”
“이안이 언제 나오냐고 어찌나 쫑알쫑알.”
“우리 뽀삐 처음 집에 데리고 왔을 때 생각나던데? 딱 저랬거든. 주는 대로 잘 먹고, 여기저기서 배 까고 자고, 뭐만 하면 꿍얼꿍얼 짖어 대고…. 저런 놈이 은근히 또 말은 잘 들어요.”
이안은 베릭이 마검사라는 사실을 알렸지만, 마법사들은 별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궁친위대 일손 부족한 게 문젠가? 마법부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일손 부족해서 이렇게 야근하고 있단 말이다. 마법사도 아니고 마검사라 하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반응이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네엥. 어서 가세용.”
“이안이 내일 보자.”
“고생하셨습니다.”
이안이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자, 맨바닥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베릭과 딱 마주쳤다. 놈이 가구란 가구는 죄다 쪼개 버린 탓에 로비가 휑했다.
“끝? 드디어 끝?!”
“내일부터 오래도.”
“거참, 성격 느긋하시네. 막 몸에서 힘이 펄펄 솟는데 이걸 가만두라고?”
베릭은 이안을 쪼르르 따라붙으며 연신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자크 백작저에 소개하는 건 낮에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고집을 부려 대니, 시작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이 마차에 오르자, 베릭 역시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아서는 마부석을 퉁퉁 두드렸다.
“아저씨! 출발!”
마부가 황당하게 좌석을 힐끗거렸지만, 이안이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자 마지못해 채찍을 휘둘렀다. 베릭은 드디어 나간다며 연신 기지개를 켜 댔다.
“뭔 놈의 일을 그렇게 해 대나 몰라. 기다리다가 죽는 줄 알았네.”
“죽지 그랬어.”
“에이, 그럴 수 있나! 큰일 할 몸인데! 으하핫!”
“…집에 연락은 했고?”
“괜찮아. 한번 나오면 며칠씩 안 들어가고 그래서.”
이안은 피곤하다며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반면 베릭은 러거스펠 밖으로 나온 게 오랜만인지 중앙의 시끌벅적한 광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없다.
저 멀리 백작저 입구가 보이자, 베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저게 정문?”
“자크 백작님 앞에서는 채신머리 있게 행동해. 그렇지 않으면 호되게 혼날 것이다.”
“너한테?”
“누구한테든.”
끼이익.
마차가 정문을 지나 저택 앞에 도착하자 시종들이 마중 나와 문을 열어 줬다. 그들은 낯선 붉은 머리 사내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안 님. 손님이십니까?”
“응. 자크 백작님과 바르사베 누님은?”
“두 분 다 훈련장에 계십니다.”
“잘 됐군.”
“식사는……?”
“나중에.”
이안은 베릭에게 따라 오라며 고갯짓했다. 해가 어둑해지면서 정원의 조명들이 켜지자 저택의 고풍스러운 위엄이 더욱 짙어졌다.
훈련장에 가까워질수록 바르사베의 기합이 조금씩 들려왔다.
“합! 흐아압!”
“다시!”
“흐아아압!”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바르사베와 셔츠 소매를 걷은 채 이를 봐주고 있는 자크 백작. 두 사람이 인기척을 느끼고 동시에 이안 쪽을 바라봤다.
“이안?”
“다녀왔습니다, 백작님.”
“그래, 고생했다. 손님이 있구나.”
베릭이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히- 웃어 보였다. 백작이고 나발이고 잘 모르겠지만, 잘 보이라고 하니까 일단 웃고 보는 거다.
“얼마 전에 마법부 일로 바깥에 나갔다가 인연을 맺은 자입니다. 마검사의 자질이 있어 백작님께 자문하고자 데리고 왔습니다.”
“마검사?”
이안의 말에 바르사베와 백작의 눈이 동시에 반짝였다. 바르사베는 황궁친위대에 인재가 늘어난다는 생각에 기뻐하는 것 같았고, 자크 백작은 황궁친위대 내 파벌 강화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마검사들이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파벌은 분명히 존재했다. 새로이 들어갈 신입 중, 바르사베 외 인물이 자크 백작저에 줄을 댄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지 않겠나?
“사실인가?”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이런, 놀랍군! 젊은이, 이름이?”
“베릭이요.”
“베릭, 그래…….”
행색으로 보나 태도로 보나 뒷골목 출신임이 분명했다. 날것 그대로였지만 느낌이 영 나쁘지는 않았다.
이안은 베릭을 앞으로 한 발 내세우며 부탁했다.
“곧 제국합동모병 기간이지 않습니까. 베릭도 지원시키고 싶습니다만,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바르사베 누님과 선생님들이 많은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아아, 좋지. 좋아.”
바르사베가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 베릭은 반사적으로 붙잡긴 했으나, 영 미심쩍어하며 이안을 힐끔거렸다.
“이거 맞아?”
내 또래 여자아이한테 뭘 배우라고? 베릭의 중얼거림을 알아들은 바르사베가 웃는 낯 그대로 빠직, 굳어 버렸다.
자크 백작은 손녀의 심기에 날이 선 것을 알아채고는 은근슬쩍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인사 적당히 나누고 들어오게. 다 같이 식사하자고. 아 참, 이안. 대사막에 서신을 보낸다고 하지 않았나?”
“네. 맞습니다. 로만드로 결혼식 건으로요.”
필리아는 네르사른을 따라 대사막을 건넜다. 둘 사이에 작은 결혼식이 있었고, 얼마 전에는 예쁜 아이도 낳았다 들었는데 워낙 멀리 있는 터라 소식을 바로바로 들을 수는 없었다.
아마 로만드로가 결혼한다고 하면 오랜만에 중앙으로 올라올 것이다. 그때 포탈을 열지, 아니면 마차를 타고 올지 물어보는 서신이었다.
“내일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베릭 군?”
“예?”
자크 백작은 말없이 검을 고르는 바르사베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무슨 무기로 혼쭐을 내줄까 고민하는 게 분명했다.
“마검사 재능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야 할 걸세. 선발 시험 날짜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그때 합격하고 싶다면 성실히 배워야 할 것이야.”
“예, 뭐.”
“바르사베, 다치지 않게 살살하려무나. 이제 막 개화한 아이잖니.”
자크 백작의 당부에 베릭이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운동 좀 한 것 같긴 하다만, 그래도 여자지 않나? 자신은 어릴 때부터 온갖 싸움판에서 구른 전문 싸움꾼……,
퍼억!
“처웃어?”
바르사베가 베릭의 턱에 주먹을 직격으로 꽂아 넣자, 그의 몸이 가볍게 붕 떴다.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며 한 발 물러났고, 베릭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몰라 뻗은 채 눈만 깜빡였다. 그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자, 이안과 자크 백작은 먼저 들어가자며 몸을 돌렸다.
“너는 무기도 필요 없다. 주먹으로 패 주마.”
“방금 뭐, 뭐냐?”
“뭔지 모르겠어? 다시 보여 줘야겠네?”
퍼억! 빠악!
바르사베의 다부진 주먹이 사정없이 베릭을 두들겨 팼다.
어리둥절하게 처맞던 베릭이 뒤늦게 정신을 번쩍 차렸다. 이거, 여자 아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힘과 속력이 나오는 건지-!
퍼어어억!
“첫인상부터 뭔가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어. 어금니 빼고 모조리 털어 주마.”
“와 씨. 야, 너도 마검사야?”
“야? 야아아-?”
“끝장나네. 오랜만에 씨발, 놀랬다.”
“놀래기만 했어? 존나 무서워서 질질 짜야지!”
타앗!
바르사베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베릭이 그녀의 옆구리에 반격을 가했다.
“어쭈? 고작- 어?”
반대쪽 손으로 가볍게 막아 낸 바르사베는, 이내 저릿하게 느껴지는 마력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막 개화했다고 하지 않았나? 한데 어째서?
“야! 이안! 너 얘한테 마력 줬지!”
“예. 아까 낮에 주입했으니 뚫린 지 네 시간쯤 됐을 겁니다.”
“그럼 그렇지. 벌써부터 마력을 쓸 리가-”
이안이 저 멀리 들어가며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잠깐, 뭐? 네 시간?’
근데 벌써 마력을 다뤄?
그러나 놀랄 틈도 없었다. 바르사베는 달려드는 베릭의 턱에 박치기를 해 대며 치고받았다.
“이런, 씨!”
“어딜 들어와?”
“너 오늘 뒈졌다!”
“내가 할 말인데!”
퍼억! 퍽! 촤아아악!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 이안과 자크 백작은 잠시 두 사람의 격투를 지켜봤다. 검술과 격투를 가르칠 선생은 내일 아침에 올 것이니, 그전까지 서로 알아가며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면 될 터. 자크 백작은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저게 날것의 전투지. 암.”
손녀 코에서 피가 터지고 있는데, 웃을 수 있는 할아버지도 몇 없을 것이다. 이안은 이만 들어가자며 공손히 손짓했고, 그는 킬킬거리며 시종에게 당부했다.
“귀한 손님이 왔으니 저녁 식사에 신경 쓰거라.”
“예, 주인님.”
“이안, 씻고 내려오게. 베릭이라는 자, 나는 느낌이 좋아.”
자크 백작이 만족스럽게 웃자, 이안도 따라 웃었다. 은인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백작이 복도를 쭉 나아가는 동안, 이안은 2층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씻었다. 그리고 잠시 책상에 앉아 오늘 있었던 업무를 되새기고 있는데…….
똑똑.
“이안 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만.”
“……?”
되었습니다만? 그래서 뭐? 내려오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전언이었다.
“저, 그게- 손님께서 먼저 드셔 가지고요.”
“아, 그런 거라면 괜찮다. 내려가지.”
다른 건 몰라도 식사 예절은 제대로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안이 방에서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희한한 광경.
“너, 이 씨, 있다가 한판 더 해.”
“내가 할 말이다. 배만 채우면 넌 진짜 뒈졌어.”
눈이 팅팅 붓고 코피 자국이 여실한 베릭과 바르사베가 고기를 있는 대로 뜯어 먹고 있는 것 아닌가.
자크 백작은 와인만 홀짝이며 두 사람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 이안. 와서 앉게.”
“이안아, 여기 고기 죽인다. 입에서 살살 녹아.”
“아니, 근데 이 새끼, 왜 이렇게 많이 처먹어?”
“마음껏 먹으라며. 그쵸? 백작님?”
“아아, 그래그래. 더 먹어도 된다.”
“여기 한 그릇 더!”
베릭의 옆에는 이미 접시 열댓 개가 쌓여 있었다. 베릭은 고기를 와구와구 뜯어 먹으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안아, 이거 백작님이 나한테 뭐 서약서 같은 거라 해서 지장 찍었는데, 나 눈탱이당한 거 아닌지 확인 좀 해 줘.”
“…그런 건 보통 찍기 전에 확인하는 거다. 그리고 백작님을 앞에 두고 무례한 말 하지 마.”
이안은 베릭이 건넨 종이를 가져오며 슬쩍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마냥 재밌어하는 얼굴이다.
서약서엔 별 내용 없었다. 훈련과 식사 비용을 지원해 주는 대신 성실히 참여하고 성장에 전념할 것. 대신 황궁친위대원이 되었을 때 자크 백작 가문의 인장을 달고 다닐 것. 그게 다였다.
“눈탱이?”
“…그런 건 아닌데.”
“아닌데?”
“지장 거꾸로 찍었네.”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로다. 제멋대로 대충 아무 데나 찍은 거다.
이안이 한숨을 내쉬든 말든, 베릭은 눈탱이만 아니면 되었다며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