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41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41화(941/951)
제941화. 천려의 접경지
금빛 사막을 넘실거리며 이동하는 마차 뒤로 그림자가 길게 졌다.
천려에서 바리엘 국경 쪽으로 출발한 지 이틀째. 인접하여 동맹을 맺고 있는 엔로우 가문에 줄 선물과 위탁 판매할 물품을 가득 실은 터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쿠실레를 탄 네르사른은 마차 창문 안쪽으로 슬쩍 고개 숙였다.
“필리아, 괜찮소?”
사막의 강한 햇볕마저 그녀의 흰 피부를 태우지 못했다. 여전히 투명하고 밝게 빛나는 백옥의 자태. 필리아는 겨우 잠든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서 작게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팔이 아프면 내가 들어가겠소.”
“아니에요. 막 잠들어서 그러실 필요 없어요.”
두 사람 사이에 난 첫아이. 피부색은 네르사른을 닮아 구릿빛이었지만, 머리칼과 눈동자는 필리아를 닮아 금발에 녹안이었다. 이목구비가 어찌나 오밀조밀 예쁜지, 아이를 본 이들이라면 모두 감탄 어린 탄성을 중얼거리곤 했다.
“다 왔으니 불편해도 조금만 참으시구려.”
네르사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휘파람이 울렸다. 저 멀리 자신들을 마중 나온 엔로우 가문의 사람들이 보인 것이다.
그들은 깃발을 흔들며 환영의 뜻을 보였고, 천려인들 역시 손을 흔들어 호응했다. 매 두 마리가 높게 날아 하늘을 빙그르르 돌았다.
“아이고,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랜만이군요, 집사.”
“예예. 날이 딱 좋을 때 오셨어요. 며칠 전만 해도 비가 꽤 왔거든요.”
“자작님은?”
“저택에 계십니다. 귀한 친구분이 오시기만을 기다리면서요!”
네르사른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집사는 마차 안쪽의 필리아에게도 인사를 건네다가 그만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말았다.
“필리아 님, 늦었지만 순산을 축하합니다. 에구구, 소문대로 아주 어여쁜 아기님이시군요.”
“고맙습니다. 집사님.”
“자작님께서 아주 반가워하시겠습니다. 아기를 좀 좋아하십니까? 아, 그리고 중앙에서 온 서신도 있답니다.”
“천려에게?”
“네. ‘이안 하델’ 님이 보내셨더라고요.”
전서구는 사막의 뜨거움과 건조함을 이길 수 없었다. 하여, 천려에게 말을 전하고 싶으면 인접한 엔로우 쪽으로 서신을 보낼 수밖에 없다.
네르사른은 혹여나 큰일이 났나 싶어 낯빛을 굳혔다.
“무슨 일이랍니까?”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네르사른 님과 필리아 님, 두 분께 온 것이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질 좋은 종이에 예쁜 리본까지 달려 있더군요. 아무래도 희소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집사는 시종들에게 짐을 옮기라 지시하며 덧붙였다.
그에 네르사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내를 엔로우 가문의 마차로 갈아타게 했다. 필리아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조심스레 마차로 올라탔다.
“요즘 하완에서 천려의 공예품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번에 위탁한 물건 대금은 금화 50닢이었고, 요청하셨던 물건들도 받아 두었습니다. 사막으로 돌아가실 때 가져가시지요.”
“언제나 고맙소.”
“별말씀을요. 자작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이어온 천려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들은 엔로우 저택으로 마차를 몰았다. 영지 외곽, 물을 긷고 밭을 가는 농민들은 평화로워 보였고, 중심가 또한 번영하여 여느 도시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 메렐로프가 가지고 있던 하완과의 가교 역할이 엔로우 쪽으로 넘어오면서 생긴 변화였다.
끼이익.
“주인님! 천려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마차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시종들이 반갑게 외쳤다. 개중엔 천려 중 연인을 두고 있는 자도 있었고, 사정상 결혼 후 떨어져 지내는 자도 있었다.
엔로우 자작은 가벼운 옷만 걸친 채 직접 나와 네르사른과 필리아를 반겼다.
“어서 오시오, 친우여!”
“잘 지냈는가?”
“그럼, 그럼! 이런, 세상에! 누가 보아도 필리아 그대를 똑 닮은 아이일세. 보여 주지 않고 꼭꼭 감추었던 이유가 있었구먼!”
“날씨가 안 좋았어. 모래 폭풍이 일어났거든.”
“이제라도 와서 기쁘네. 자자, 안쪽으로. 대금이랑 물건은 시종들에게 채워 놓으라 하겠네. 오늘은 자고 갈 거지?”
네르사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필리아와 아이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들은 응접실 소파에 둘러앉아 차를 마셨고, 자작은 아기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름은?”
“아직 짓지 않았네.”
“어째서?”
“…원래 천려의 이름은 부족장께서 지어 주시는데, 알다시피 그 자리가 비어 있지 않은가. 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지 논의 중일세.”
“지금껏 다른 아이들 이름은 어찌했어?”
“보통은 부모의 이름을 땄지.”
“로엘이었던가? 부족장의 함자가.”
“그렇네.”
“하면, 그 이름을 그대로 잇는 건 어떤가?”
자작의 권유에 네르사른과 필리아가 잠시 멈칫거렸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으므로.
부족장께서 돌아가신 지 10여 년이 되었건만, 아직 ‘신의 눈’을 가진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들 불안해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천려의 발전에 문제가 없었기에 쉬쉬하며 뒤로 묻히는 분위기였다.
“자작께서 선물해 준 이름이라 하면, 기쁘게 받지.”
“이 녹음 진 눈동자 좀 보아. 사막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 같은 아이일세. 신의 축복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로엘, 나는 좋을 것 같아. 이전 부족장께서는 장수하셨다 하지 않았나.”
“뭐, 그렇지.”
“나는 추천하네. 로엘, 예쁜 이름이야.”
자작은 아기의 코를 콕 찌르며 헤헤 웃어 댔다.
그때, 시종이 네르사른에게 서신을 전해 줬다. 이안 하델이 보낸 편지였다.
사락.
리본을 풀고 읽어 내리던 네르사른의 눈썹이 돌연 의아하게 휘었다. 필리아가 걱정 반, 궁금증 반 담긴 시선으로 네르사른 옆에 바짝 붙었다.
“이안이 뭐래요? 무슨 일 있대요?”
마물 범람 때문에 이안과 마법부가 고생한 것을 알고 있다. 하여 혹여나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네르사른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건네줬다.
“로만드로가 결혼한다고 하는군.”
“어머! 정말요?”
“신부가 행정부 직원이라 하는데, 참석해 주면 좋겠다 해. 갈 거지?”
“그럼요! 너무 기쁜 일이네요!”
“마차를 타거나, 아니면 포탈을 열어 준다 하는데…….”
“포탈이 좋겠어요.”
“나도 그리 생각하네.”
갓난아이가 있으니 마차를 타고 보름 가까이 움직이는 건 무리였다. 필리아가 기쁨을 숨기지 못하자, 자작이 슬쩍 끼어들어 물었다.
“로만드로?”
“아, 마법부 직원인데, 인연이 있지. 이안 경을 옆에서 보좌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하면 두 사람, 중앙으로 갈 것인가?”
“그러지 않을까 싶어.”
“그렇다면 잠깐!”
자작이 손을 번쩍 들며 ‘그대로 멈춤’ 신호를 보냈다. 차를 홀짝이던 필리아가 눈을 크게 떴고, 시종이 안고 있던 아기 역시 입을 에- 벌린 채 멈췄다.
“중앙으로 갈 거면 우리 차남 좀 데리고 가 줄 수 없겠나?”
“시아오시?”
시아오시 엔로우 2세. 엔로우 가문의 시초인 시아오시와 눈 색이 똑같아 받은 이름이었다.
장자계승 방식을 택한 엔로우 가문에서 차남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검술에 두각을 보여 제국방위부 입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곧 있으면 제국합동모병 기간이지 않나? 마침 중앙으로 보낼 예정이긴 했는데, 그대들이 간다 하면 함께 보내고 싶네.”
마차로 가는 것보다 포탈을 이용하면 체력 소모도 덜하니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도 있을 게다. 그리고 혈혈단신 중앙에 홀로 떨어지는 것보다 네르사른과 필리아를 통해 마법부 쪽에 연을 터서 자리 잡도록 도움받는 것도 좋고.
부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요. 날짜만 맞는다면요.”
“결혼식이 언제라 하오?”
“음, 두 달 후네요.”
“딱 되었어! 어차피 그대들도 조금 일찍 올라갈 것이지?”
“아무래도, 그것이 낫겠지요?”
필리아가 네르사른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결혼식에 딱 맞춰서 가기보다 미리 가서 그리운 사람들과 회포도 풀고, 중앙 사정도 알아보는 등 일을 보는 게 나을 터다. 네르사른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작이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아에게 내려오라 하거라.”
“예, 주인님.”
자작 부부 외, 자식들과는 친밀하지 않았다. 첫째와 둘째 모두 학업에 몰두하여 일찍 나가 늦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가끔 묵고 갈 때나 얼굴을 보긴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시아가 검을 아주 잘 다룬다네.”
“제국의 검이 될 인재로군.”
“그래, 맞아! 으하하핫!”
자작은 팔불출처럼 낄낄대며 웃어 댔다.
곧이어, 위층에서 공부하던 시아가 바깥에서 인기척을 내며 인사했다.
똑똑.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아, 그래그래. 이쪽으로. 사막에서 내 친우들이 왔단다.”
“예, 전해 들었으나 가정교사가 와 있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갈색과 벽안의 오드아이, 회색빛 머리칼, 단정한 말투를 겸비한 미색의 소년이었다.
필리아는 저택 로비 가운데 걸려 있던 시아오시 1세의 그림을 떠올리며, 놀란 입을 가렸다.
“부인, 피는 못 속인다는 게 이런 건가 봅니다.”
“예, 정말… 선조분과 똑 닮으셨네요.”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시아가 전쟁터에서 말을 타고 대지를 내달리는 상상만 하면 온몸이 짜릿해집니다. 우리 아들, 장성해서 제국의 기둥이 될 것이오! 으하하핫!”
푼수 같으니. 네르사른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지만, 확실히 이해는 되었다. 무인은 검을 잡지 않아도 흘러나오는 기백이 있지 않나. 고작 성인식을 넘긴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기운이 단단했다.
“아무튼, 그럼 중앙 갈 때 우리 아들도 좀 부탁합시다?”
자작의 부탁에 네르사른이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아는 반갑게 묵례하며 시아오시에게 인사했다.
“같이 중앙으로 가요. 가서 좋은 친구도 많이 소개해 줄게요. 이안이라고,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예, 부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아오시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번듯한 귀족 자제의 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몸짓이었다.
* * *
출근하지 않는 휴일. 이안은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서 테라스에서 차를 홀짝였다. 저 멀리 훈련장에서 열심히 구르고 있는 베릭이 보였다.
“합! 하아압!”
바르사베와 같이 검을 휘두르다가, 선생의 신호에 맞춰 달리기를 반복. 벌써 몇 시간째 반복 중이건만, 둘 다 지치는 기색이 없다. 아니, 지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지 이를 꽉 깨물고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희한해.”
바르사베의 말에 따르면, 베릭은 자신이 넘겨준 마력을 기운으로 전환하여 운용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리 재능 넘치는 마검사라지만, 그게 개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능한 일인가?
“그러니까. 참으로 희한해.”
“아, 백작님.”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자크 백작이 끼어들며 동의했다. 그는 이안과 마찬가지로 베릭을 주시하고 있었다.
‘상처 회복력도 그렇고, 마검사의 재능 외에도 뭔가 더 있다.’
자크 백작의 생각도 비슷해 보였다. 그는 한껏 어두운 표정으로 연신 고심했다.
“희한하단 말이지. 알 수가 없어.”
“백작님.”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이시군요. 이안이 저 변종에 대해 식견을 나눠 보고자 고개를 돌리자, 백작은 진지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먹어. 너무…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많이… 너무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