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5
제95화. 집안 싸움
“로만드로 님? 이안 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집사 사먼은 복도를 혼자 걸어오는 로만드로를 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고, 이내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양피지와 펜, 잉크를 가져다주게.”
“네. 알겠습니다.”
침실로 들어서자, 피 냄새가 훅 끼쳐 올라왔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짙은 궐련 연기. 안쪽에서는 연신 흐느끼는 다이브의 울음이 들려왔고, 리엔 부인은 무덤덤하게 소파에 앉아있었다.
“오셨어요? 이안 님은요?”
“잠시 일이 생겨서, 금방 오실 겁니다. 부인.”
로만드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누가 봐도 할 말이 있어 보이니, 리엔 부인 역시 마찬가지로 안쪽 침실을 의식한 채로 로만드로를 쳐다봤다.
“왜 그러시나요?”
“부인, 이안 경이 말을 전해달라 하시더군요. 인장을 확보했으면 그대로 갖고 계시는 게 좋겠다고.”
“아.”
부인은 의외라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이안이 뜻을 보내온 것이다. 그녀가 결심만 선다면, 메렐로프를 갈아엎는 데에 힘을 보태겠노라고.
로만드로는 식어버린 차를 따르며 조용히 읊조렸다.
“일단 제가 보고서를 올리긴 할겁니다만, 위에서 회의하기에 따라 조사관이 다시 파견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저도, 이안 경도 중앙으로 가는 길목 위인 터라 부인 옆에서 도와줄 수 없어요.”
“혼자, 해내야 한다는 거군요.”
“자세한 방안은 일이 얼추 정리된 후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찌, 인장을 계속 갖고 있으실 겁니까?”
어찌, 가주가 되어보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부인은 안쪽 침실을 힐끔거렸다. 다이브는 쌩하니 들어와서 자신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노예 출신 형수라니, 격이 떨어져도 정도가 심하다 여기는 것이다. 저자가 차기 백작이 된다면 클라크는 물론이고 그녀의 안전 역시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상 그 누가 되었든, 그녀를 지키는 방법은 그녀가 정점에 오르는 일뿐이었다.
“네. 인장, 제가 관리하지요.”
“좋습니다. 그러면 하실 일이 하나 있습니다. 우선 적으로 기사들을 해고하는 겁니다.”
“저, 삼기사들을요?”
“이안 경이 그런 말은 안 하셨나요?”
“아까, 하긴 했어요. 가성비 떨어진다고, 저택 관리할 때 기사들 먼저 자르라고.”
부인의 말에 로만드로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뭐, 그것도 영 일리가 없는 건 아닌데요. 절차라는 게 중요합니다. 저자들이 메렐로프 가문의 기사라는 직책으로 죽으면, 황궁에 보고할 때 꼭 이름을 올려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기술할 필요가 없거든요.”
‘메렐로프 가문의 기사 직책으로 죽으면’이라.
부인은 녹색 빛 도는 눈동자를 반짝였다. 로만드로는 지금 저자들을 모조리 죽이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네. 이해했어요. 완전히.”
이안은 황궁의 견제와 주시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메렐로프의 기사들까지 죽이며 차기 계승에 개입했다는 게 알려지면, 상당히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리엔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침실 쪽을 힐끔거렸다. 다이브의 가식적인 울음이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저자는요?”
“저자는 이안 경이 직접 처리한다 했으니, 맡겨두시면 됩니다. 다만, 부인께서 약속해 줄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안과 부인 사이를 단단하게 엮어줄 조건이었다.
“금화 5,000닢.”
“문제없어요. 땅을 팔아서라도 드리죠.”
“병사 수를 현재보다 절반 이하로 유지할 것.”
메렐로프를 견제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안이 자리를 비웠을 때를 대비하여, 서로의 평화를 위한 조약이었다. 당연히 부인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좋아요.”
“부인에게 주어지는 모든 거래 사항에 있어서 우선협상권을 이안 경에게 줄 것. 물론, 이안 경의 제안을 부결할 권리는 있습니다.”
어차피 제일 가까운 영지가 이안 쪽이었으니, 거래를 하거나 교류를 할 때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게 그쪽 영지였다. 부인은 이것 또한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시면, 일이 정리된 후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겠습니다.”
“물러날 구석이 없어요. 저는 다 좋습니다.”
“네. 아, 그리고 클라크라는 자 말인데요.”
리엔 부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계속 머리를 굴려봤으나 그것만큼은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쥐어짜 내자면, 그녀가 영주가 되어 사면해 주는 것뿐.
하지만 그때까지 기사들을 비롯한 다이브가 클라크를 살려둘지 모르겠다. 풍전등화, 이안의 말대로 아직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 여겨질 정도였으니까.
지하 감옥에서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 사실 벌써 죽은 건 아닌지, 부인은 침실에서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방법이 있을까요?”
“그게 있긴 있는데…….”
로만드로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다이브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찍으며 나타났다. 소리만 들었을 때는 뒤로 넘어갈 듯 꺽꺽대더니만, 얼굴은 조금도 붓지 않았다. 목청만 높였다는 뜻이다.
“형수. 일이 이리되어 유감이오.”
“이제 제가 보이나 보네요. 아까는 인사도 없이 무시하셨으면서. 로만드로 님이랑 함께 있어서 그런가?”
정답이었다. 황궁에서 공식으로 파견한 자문관이자, 공증한 보고서를 올려보낼 사람이었으니 이미지 관리를 한 것이다. 하나, 다이브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그럴 리가요. 형님의 죽음이 너무 충격적인지라, 바로 침실로 달려간 건데요. 형수, 여전하십니다.”
“그럼요. 다이브 님도 여전하시네요.”
파지직. 두 사람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로만드로는 헛기침만 하며 끼어들었다.
“진정들 하고 앉으시지요.”
“그래요. 로만드로 님. 슬프지만 정리할 것은 해야지요. 형님을 저리 만든 잔악한 노예 놈이 아직 지하 감옥에서 숨이 붙어있다 들었습니다.”
“클라크라 합니다.”
“황궁에 올릴 보고서에 소상히 사건의 개요를 설명해 주시고, 작위 세습에 관한 신고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안처럼 새로이 가문과 작위가 내려지는 게 아니라, 가문 내에서의 세습이었다. 황제의 허락이 아닌, 그저 보고로 중앙에 알리기만 하면 된다.
다이브의 집사가 양피지 받침과 함께 필기구들을 가져다주었다. 로만드로는 펜촉에 잉크를 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살다 살다, 노예가 주인을… 그것도 귀족을 죽이다니. 그런데요. 다이브 님은 따로 가족이 없으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아, 듣기로는 지하신을 믿으신다고요.”
“제가요? 아니요. 누가 그러던가요? 형수가 그러던가요?”
다이브는 시치미를 뚝 떼며 대꾸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바리엘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교를 염두에 둔 자유였다. 교황청이 공식으로 모시는 신이 있는 제국에서, 이단이라니.
변경이라 직접적인 제재는 없겠으나 불이익이 있을 건 분명했다. 자택에서 지하신을 언급한 것이나, 기도하는 손짓을 한 것도 이안이 이웃 영주임을 알았으면 자제했을 일이다.
“아니면 이안 경이 그러시덥니까?”
“누가 일렀든 중요한 건 아닙니다. 그저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요. 맞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일이 결단코 없습니다.”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작위를 위해 단번에 신앙을 부정했다. 다이브는 한탄스러운 이 상황이 너무도 고통스러웠으며, 서둘러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문을 돌려댔다.
“불미스러운 일로 이리되었으니, 작위 세습식은 거창하게 할 수 없을 듯합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간단히 진행 후, 형님의 장례를 치르도록 하지요.”
“아니요. 장례가 먼저입니다. 그것이 예법이에요.”
로만드로가 딱 잘라서 거절했다. 시간을 벌어두어야만 부인이 기사단을 정리할 수 있었다. 반박하려던 다이브가 예법이라는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귀족으로서 제일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그것 아닌가.
“보고서에 상세히 기술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하시지요.”
“세습한다면 다이브 님께서는 몇 대신 거죠?”
“형님께서 8대였으니, 9대입니다.”
로만드로는 성심성의껏 펜을 놀리며 이것저것 질문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부인의 머릿속은 뜨겁게 끓어올랐다. 서둘러 남편의 흔적을 모두 끊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 것이었다.
새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하자.
일단 살아남아서, 훗날 다시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클라크…….’
“…부인?”
“네?”
“듣고 계셨습니까?”
“아, 죄송해요. 잠시 놓쳤습니다. 뭐라 말씀하셨죠?”
리엔 부인은 싱긋, 웃으며 로만드로를 돌아봤다. 다이브는 그런 그녀의 태도조차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 혀를 차는 것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다.
“영지민들에게 오늘 중으로 사안을 공표하고, 저택 정리를 부탁드렸습니다만.”
“아, 저택 정리. 물론이죠.”
아까 말했던 기사의 해고를 뜻하는 것이었다. 부인이 바로 진행하겠노라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브는 실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아니. 그럴 것 없습니다.”
“그럴 것 없다니요?”
“이제 저택에서 나갈 분이 관리를 해서 무엇 한답니까? 앞으로는 제가 할 것이니 형수께서는 물러나서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도록 하세요.”
‘저택에서 나갈 분’이라는 말에 뼈가 있었다. 노예 출신으로 식구 노릇 할 생각일랑 생각지도 말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혹시나, 잠깐 맡긴 그사이에 저택의 세간살이를 모두 빼돌릴까 봐 걱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로만드로가 중재하려고 하자, 리엔 부인은 바로 날카롭게 맞받아쳤다.
“저택에서 쫓겨난 지 꽤 되지 않으셨나요? 당장 관리한다고 한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실 것 같은데.”
“형수. 말이 좀 건방집니다?”
“그래요? 그렇게 느껴지셨다고 하니, 죄송하지는 않습니다. 백작님이 장례식도 치르기 전인데 벌써 작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된 것 같거든요. 이단교 믿느라 가문에서 쫓겨난 사정 이해는 하지만, 도리라는 게 있지요.”
따박따박 쏘아대는 말 하나하나가 공격적이었다. 다이브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내려칠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고, 로만드로와 집사가 놀라며 그를 막아섰다.
“참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이브 님.”
“다이브 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쫓겨났어도 메렐로프 핏줄임은 확실하네요. 툭하면 올라가는 손찌검이라니.”
하지만 부인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쐐기를 박아댔다.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여인의 독기가 매서웠다.
다이브는 노예 출신에게 반박당했다는 게 모욕적인지, 부들부들 떨어대며 악을 질러댔다.
“분수도 모르고, 천한 게!”
“그러게 말입니다. 그 천한 걸 백작 부인 자리까지 앉혔으니, 백작님은 진짜 미쳤던 겁니다. 제정신이 아니지요. 같은 핏줄이니, 그쪽도 마찬가지죠? 하긴. 미쳤으니 그러고 있지.”
다이브는 더욱 격렬하게 손을 휘둘렀으나, 로만드로와 집사 두 사람을 제압할 순 없었다. 부인의 말대로, 형제들은 바짝 마른 체격까지 닮아있었으니.
부인은 차로 입을 축이며 문 쪽을 쳐다봤다.
느닷없는 소란에 기사 한 명이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이봐들.”
부인의 부름에 기사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녀는 다이브에게 고갯짓하며 어이없는 투로 물었다.
“백작님의 기사였으면 응당 나를 지키는 것도 자네들의 소임 아닌가?”
“부인, 백작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전까지 저희는 당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클라크가 지하 감옥에 갇혀있건만, 거기서 또 무슨 진실을? 그대들이 그리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
어쩔 수 없으면 어쩔 거냐는 시선이었다.
“장례식 전에는 저택의 책임이 내게 있다는 걸, 로만드로 님이 증명해 주셨다. 메렐로프 가문의 소속 기사 셋, 모두 해고하겠어.”
“해고요?”
기사가 다시금 웃었다. 해고를 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그 순간.
콰아앙!
아래층에서 낯선 굉음이 들려왔다.
폭약이 아닌 무언가가 그대로 접혀서 부서지는 소리.
기사는 의아하게 복도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군가가 맹렬한 기세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