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51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951화(951/951)
제951화. 현실도피
“……!”
헤르치는 팔짱 낀 것을 풀고 난간을 붙잡았다. 다른 황궁친위대원들도 마찬가지. 상체를 길게 쭉 빼고서는 지금 보고 있는 게 현실인지 확인하려는 눈치다.
투욱.
놀란 바르사베가 들고 있던 수건을 놓쳤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마검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은 경악하여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안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베릭 서류에 뭔가를 기재했다. 마법사들도 휘파람을 불며 베릭의 홍염검을 구경했으나, 저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어쭈. 베릭 마력검 만들어 냈네?”
“저거 어렵다 하지 않았어?”
“베릭 놈 하는 거 보니까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2차 개화입니다.”
“2차 개화?”
이안은 베릭의 이름 옆에다 별표를 그려 넣고는 끄트머리를 살짝 접었다. 시험 지원자 중에 특별히 살피고 주시하며 혹여 탈락하더라도 특별 제도를 통해 등용을 강력 추천하는 자에게만 남기는 표식이다.
“숙련된 마검사는 마력으로 자신만의 검을 만들어 내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현재 황궁친위대원 중 3분의 1 정도가 마력검을 만들지 못한다 들었습니다.”
“3분의 1 정도?”
“저연차의 대원이겠지만, 아무튼 마검사라면 꼭 거치게 되는 탈피와 같지요. 베릭은 그것을 고작 두어 달 만에 해낸 것입니다. 제가 영혼에 물꼬를 트고 백작저에서 훈련한 지 고작 두어 달 만에요.”
“그러니까, 황궁친위대의 이안이다?”
“비유가 조금 이상합니다.”
이안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농담이 과하다는 건지, 아니면 농이라도 베릭과 견주지 말라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천재라는 거잖아.”
“그렇습니다. 마검사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요.”
“이래서 사람은 자기 적성을 잘 찾아야 해. 베릭 저놈이 살면서 이안한테 천재라는 소리 듣는 날도 오고.”
“나도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천재 소리 좀 들었으려나.”
“넌 마법사 아니었으면 거리에서 굶어 뒈졌지.”
“하긴. 그래.”
비교적 차분한 마법사들과 달리 황궁친위대 쪽은 난리가 났다. 그들 중 그 누구도 황궁에 들어오기 전 2차 개화를 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헤르치를 비롯한 현재의 삼대장들도.
“하.”
해르치가 전율에 탄성을 내질렀다. 찬란한 미래를 눈으로 본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다음 세대의 주인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안심되는 기분이다.
“와아아아!”
“오, 저기 좀 봐!”
베릭이 보호막을 발로 디디며 날아오르자, 구경꾼들이 환호하며 소리쳤다. 다른 건 몰라도 군중의 환호 돋구는 법은 제대로 알고 있는 베릭이었다. 지난 몇 년간 지하 격투장에서 얻어터지며 배운 게 그것이었으니까.
“안에 있는 너!”
베릭은 허공으로 날아올라 시체 덩어리 정중앙을 노렸다. 상대가 이를 막으려는 듯 다시금 그물 손을 펼쳤지만, 베릭의 홍염검에 닿는 순간 잿더미로 변하여 사라졌다.
“……!”
“고기는 구워야 제맛인데-!”
“아!”
“너는 태워야 제맛이겠다!”
말을 하긴 하네? 베릭이 씨익 웃으며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온몸 구석구석 잠들어 있던 활력이 살아 움직이다 못해 터져 나가고 있었다. 검을 통해, 뜨겁고 붉은 불꽃을 통해.
촤아아악!
베릭은 거대한 덩어리를 머리부터 끝까지 일검에 베어 버렸다. 쩌어억, 하고 갈라지는 두 덩이. 급하게 재생하기 위해 점액 같은 무언가가 늘어졌지만, 베릭의 불꽃 탓에 쉽지 않아 보였다. 불꽃은 기름을 만난 것처럼 순식간에 시체 덩어리를 휘감았다.
화르르륵!
휘이익!
이번에도 바람이 일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뜨겁고 시체 조각을 흩날리게 하는 바람이다.
직사각형의 고립된 공간에 갇혀 휘도는 먼지 탓에 안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모두 눈매를 가늘게 뜨고서 어찌 된 상황인지 보기 위해 집중했다.
사아아악.
바람이 걷히자,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다. 여기저기 그을린 채 오그라든 시체 덩이,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 피 흘리며 헉헉대는 베릭,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어린 여자아이.
“여자아이?”
“아닙니다.”
마법사의 중얼거림에 이안이 바로 대꾸했다.
“사령술사는 겉모습으로 나이를 판단할 수 없지요.”
외형을 원하는 대로 꾸며 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설령 인두를 이용한 것이든, 뭐든.
마법사는 고개를 기울여 이안의 서류를 확인했다.
“나디아. 나이 서른?”
“어? 뭐라고?”
“서른이래.”
말도 안 돼. 겉모습은 베릭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정도인데?
마법사들이 쓸데없는 것으로 감탄하는 동안, 황궁친위대는 베릭의 재능에 연신 감탄했다. 첫 개화 시기도 그렇지만 그 위력이 굉장하지 않나?
“미쳤네.”
마법부에선 차기 장관을 이안 하델로 정했다지? 별일 없으면 황궁친위대의 차기 삼대장은 베릭일 것이다. 보아하니, 가르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다만.
“글만 좀 알면 괜찮겠는데.”
“상식과 예의도 좀 주입하고.”
“밥도 좀 덜 먹어야지.”
“싸가지도 있어야 해.”
“숫자 계산은 할 줄 알겠지?”
“…….”
뭐 이렇게 따지니까 부족한 게 많네. 대박까지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차기 대장, 괜찮으려나…? 그들은 기묘한 침묵 속 시선을 주고받은 뒤 베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나왔네. 이제 시체 다 썼냐?”
베릭이 땀을 닦으며 헐떡였다. 개화하자마자 너무 무리한 탓도 있고, 이미 옆구리의 피가 상체를 잔뜩 적신 상태였다. 게다가 아까 무지막지한 주먹에 처맞는 바람에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기 직전. 뒤늦게 몰려드는 고통을 참느라 베릭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때였다.
“아~ 진짜 짜증 나~!”
찡얼대는 나디아. 머리칼을 배배 꼬며 눈을 치켜들었다. 동시에 그녀가 안주머니로 손을 넣자, 베릭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금 덤벼들었다.
“어딜!”
하지만-
“항복.”
그녀의 품에서 나온 것은 흰 깃발이었다.
머리통을 내려치려던 베릭이 놀라서 황급히 몸을 틀었으나, 멈추기엔 너무 늦어 쾅- 보호막에 머리를 갖다 박고 말았다.
“엥?”
베릭은 거꾸로 처박힌 채 눈을 끔뻑거렸다.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냐? 항복?
“시체 준비한 거 다 썼단 말야~ 난 아픈 건 싫으니까~ 여기까지 할래~ 항복~”
“아니, 시발. 사람 몸에다 구멍을 내 놓고, 뭐? 항복?”
“구멍 나기 싫었으면 진작 항복했어야지~”
“야! 너 말투 왜 이렇게 재수 없어?!”
“흥~ 네가 더 재수 없거든? 방금 네가 태운 시체, 내가 5년 동안 모은 거라고~”
“알 바임? 무기 들라고! 나 아직 안 끝났다고!”
“몰라~ 난 항복~ 여기서 덤벼들면 바로 연행되는 거 알지~? 저기요~ 관리자분들~ 눈 똑바로 뜨고 보세요~ 이놈이 저 해코지 하는지~ 안 하는지~”
“으아아악! 말투 재수 없어! 구불거리는 게 밟아 쥐어 패고 싶어!”
“아항~ 아쉽네~ 팰 기회 놓쳐서~”
나디아는 새빨간 손톱을 후, 불며 우아하게 깃발을 흔들었다. 베릭이 뭐라 뭐라 소리치며 일어나려 했지만, 보호막과 격투장 틈에 끼인 탓에 버둥거리기만 했다. 아마 옆구리의 상처 때문에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는 것 같다.
“아…….”
시험관은 난감하다는 눈빛으로 2층을 올려다봤다. 그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호각이 울렸다.
“베, 베릭 승! 나디아 패! 고생했습니다.”
“아니야! 이런 승리는 원하지 않는다고! 저거 반으로 쪼개야 한다고!”
“으흥~ 숙녀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야. 만. 인!”
“시체 두르고 다니는 주제에 숙녀 같은 소리, 지랄 똥 싸고 있네. 야, 이리 와. 이리 안 와? 마저 하자고!”
지이잉! 지잉!
이안이 보호막을 거두자,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 격투장 아래로 떨어진 베릭. 그런 그를 힐끗 내려다보며 풋, 코웃음 친 나디아는 털 코트를 걸치더니 미련 없이 머리칼을 휘날리며 사라졌다.
“시험 재개하세요.”
이안은 멍하니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고, 이내 방금의 대전 기록을 꼼꼼하게 작성했다.
“치유 마법사, 베릭 옆구리나 꿰매 주러 가자.”
“네엡.”
마법사들이 부상자 치료에 전념하는 동안, 바르사베는 털썩 주저앉은 채 넋이 나가 있었다. 얼마나 얼이 빠졌는지, 지나가던 마법사의 가벼운 손끝에도 그대로 넘어갈 정도였다.
“뭐야. 바르사베? 괜찮아요? 여긴 또 왜 이래?”
“베릭이… 저 똥개 새끼가 먼저… 개화를…….”
“들 것 좀 가져와 줘요. 오늘 난리 났네.”
“으아아악! 방금 걔 데리고 오라고! 다시 싸우려니까!”
“닥치시고, 입에 천 무세요. 아이고, 옆구리 다 갈라졌네. 주머니 새로 달았니?”
“주머니? 참 나! 무식한 소리 하고 있어.”
“무식?! 무시이익?! 저 베릭 이 새끼, 치유 안 합니다!”
“넌 또 왜!”
때아닌 난장판에 이안은 난간에 기대서는 머리 아프다는 듯 이마를 꾹꾹 눌렀다. 모든 소란의 중심에는 베릭이 있다. 진짜 ‘저걸’ 들여도 되나 싶은 생각이 진지하게 들기 시작했다. 차라리 조금 더 철든 다음에…….
‘아니지.’
그때까지 자크 백작저에 의탁할 수는 없지. 식비를 위해서라도… 그래, 황궁이 낫겠다.
이안은 베릭의 평가란에 동그라미를 치고서 8점을 부여했다. 그리고 상대였던 나디아라는 자에게도 역시 동그라미. 대신 6점이다.
“이안!”
일반인 시험장으로 갔던 마법사들이 2층 입구로 들어오며 이안을 불렀다. 보호막 생성 및 유지 업무 교대를 위함이었다. 이제 이안은 일반인 시험장으로 가서 다시금 마검사의 자질이 있는 자가 없는지 확인하면 되었다.
“뭐야? 여긴 분위기가 왜 이래?”
마법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능력자들이 모이는 곳이라서 그런가, 확실히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좀 더 시끄럽고, 정신없고, 뭔가…….
“아, 베릭 때문이구나.”
마법사들은 단박에 주범을 알아채고는 이안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았다.
“지금 막 베릭 끝났습니다.”
“그래? 앗싸, 다행이다. 귀찮은 일은 좀 덜었네.”
시험관들이 격투장 위를 쓸고 닦는 동안 마법사들이 보호막 정비를 새로이 했다. 그들은 이안보고 수고했노라 이르며, 어서 반대쪽 시험장으로 가라 전했다.
“거긴 조용해. 사람들도 괜찮고.”
“일도 제국방위부가 거의 다 봐주고 있으니까.”
마법사는 느긋하게 지켜보며 인재 발굴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럼 고생하십시오.”
“오냐. 너도 수고했다.”
“아아아! 그리고, 이안아.”
“예?”
“시아오시라는 사람, 네 친구지?”
친구?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서로 많은 얘기를 나눈 것도 아니고.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쪽일 겁니다.”
“대답이 뭐 그래?”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혹 무슨 일 있습니까?”
마법사들이 감탄하며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내가 봤을 때, 시아오시가 1등이다.”
“너무 성급한 판단인 것 같습니다만. 이제 겨우 시험 첫날입니다.”
“아니아니. 딱 사이즈가 보여.”
“너도 가서 보면 알걸?”
얼마나 대단하기에 저럴까. 마법사들은 어지간해서는 남을 칭찬하는 일이 없는데.
이안은 알겠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훈련장을 나왔다. 가까운 벤치, 널브러진 채 넋 나간 바르사베가 보였다.
“누님.”
고생했노라고, 대단한 격투였노라고 이안이 격려하려는 순간이었다. 이안은 바르사베의 정신이 반쯤 빠져 있는다는 걸 알아챘다.
“누님?”
“하, 인생, 시발… 어떻게 그 똥 개새끼가 먼저… 검을… 그것도 졸라 크고 멋있는… 분수에 맞지도 않아…….”
충격받았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릭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더욱 낙심하는 것 같았다.
이안은 무어라 위로할까 고민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선택했다. 자신이라도 베릭이 고급 마법을 시전하면 현실을 부정할 것 같았으니까.
“어이, 이안아아!”
그때, 치료를 마친 베릭이 신나게 폴짝폴짝 뛰며 달려왔다. 바르사베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자 베릭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어라? 좆밥도 같이 있었넹?”
“하… 씨…….”
…부정하고 싶다. 이미 부정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부정하고 싶다. 저런 새끼도 하는 2차 개화를, 걸음마 때부터 검 잡았던 내가 못 하다니……!
바르사베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또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그녀 나름의 현실도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