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6
제96화. 진정한 순례자
“안녕?”
붉은 머리칼, 베릭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올라온 자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천려의 전사들.
느닷없는 등장에 기사가 당황해하며 뒷걸음질 쳤다. 침실에서 그 모습을 본 다이브가 천천히 손을 내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끼익.
다이브와 집사는 문을 완전히 젖히고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다. 일당백이라는 천려의 전사가 자그마치 다섯이다. 부인 역시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베릭이 왔습니까?”
로만드로는 종이를 탁탁, 정리하며 물었다. 집사는 허망한 목소리로 겨우 중얼거렸다.
“아니, 로만드로 님. 이게 대체…….”
“별것 아니고, 리엔 부인께서 안전을 걱정하시기에 우리 쪽에서 드리는 작은 도움입니다. 장례식을 준비하려면 손 쓸 일도 많은데, 그동안 부인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일이라니요. 저택에서 무슨 일이…….”
“무슨 일이 생겨서 백작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로만드로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양피지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기사가 주춤주춤 물러나는 것을 멈추며 물었다.
“방금의 굉음은 무엇인가? 아래쪽에 내 동료가 있었을 터인데.”
“동료? 아아. 그래. 있었지.”
“…있었지?”
“부인, 기사들 다 해고했어요?”
삼기사와 다이브 그리고 집사는 베릭이 하는 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부인 대신 대답한 것은 로만드로였다.
“그래. 방금 구두로 선언하셨다. 그자들은 이제 메렐로프와 관련이 없어.”
“아하. 타이밍 좋았네.”
타이밍이 좋다니? 무엇이?
그러자 저 멀리, 다시 두 남자가 계단을 올라왔다. 이안과 전사 한 명이었는데, 전사의 어깨에는 익숙한 사람의 몸뚱이가 걸려있다.
“켈! 씨발, 세상에!”
메렐로프의 삼기사 중 하나였다. 몸뚱이로밖에 알아볼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머리통이 피로 엉망인지라, 이목구비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앵!
다른 기사가 기겁하며 검을 빼 들었지만, 분위기는 뒤집히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자의 발악처럼 느껴질 정도로, 일방적인 힘의 차이가 도드라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자꾸 길 막고 안 비키잖아. 죽어도 못 들여보내 준다기에, 그렇게 됐어.”
순식간이었다. 성질을 참지 못한 천려의 전사가 머리통을 잡고 대문에 박아 버린 것이. 방심했던 것인지, 단 일격에 문을 뚫을 수 있었다.
“아, 쟤 방심한 거 아니라고. 내가 센 거라니까?”
“응, 아니야. 나였어도 뚫었어.”
“베릭, 뚫린 건 네 배때기지. 그때 대사막의 그놈이랑 이놈이랑 비슷한 실력 아닌가?”
“또! 또 그 얘기 하지? 진짜 지긋지긋해 죽겠네. 내가 한판 떠서 보여줄게!”
“알았다, 알았어. 거참 말 많아.”
“안 믿는 눈치니까 그렇지!”
쿠웅!
베릭과 농담을 주고받던 전사가 시체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안은 스윽, 침실 안쪽을 살피며 로만드로, 리엔 부인을 확인했다.
“별문제 없었군요.”
“으아아악! 이안 경!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아, 아, 알기나 하는 겐가!”
힘없이 고꾸라지는 시체에 다이브가 비명을 내지르며 침실로 도망쳤다. 검을 잡은 기사의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안이 직접 개입 안 할 거라더니만. 젠장할.’
삼기사 중 대장이었던 푸울루의 의견이었다. 이안은 현재 황궁에서 견제를 받는 데다, 곧 있으면 중앙으로 올라가야 하니 메렐로프 내부 일에 못 끼어들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일리가 있고 실제로도 먹혀들어 간 생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변수는 존재하는 법.
“네, 다이브 님.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기사 출신 세 놈에게 굉장한 모욕을 당해서 말입니다.”
“모, 모욕?”
다이브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순탄하게 장례식 치르고 작위를 이어받을 줄 알았는데, 이런 피바람이라니…….
“집사도 들었을 겁니다. 백작님의 부고에 걱정되어 달려온 저에게 부인과 부적절한 관계가 아닌지 묻더라고요. 살면서 그런 모욕은 처음인지라, 이자들의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하려 합니다.”
“아니, 보통 결백은 자네 목숨으로 증명하지 않나?”
“보통은 그런가요? 저는 아닌데요.”
이안은 검을 빼든 기사를 쳐다봤다.
“살아있어야 결백이 증명된 걸 확인하지 않겠습니까. 반면, 불손한 생각은 주체가 죽어야만 없어지는 것이니. 베릭.”
“오케이.”
베릭은 양손으로 문손잡이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가까이 서 있던 집사가 자연스레 뒤로 물러섰고, 검을 빼 든 삼기사 중 하나와 함께 이내 완전히 침실 문이 닫혔다.
끼이익.
“대체…….”
“이, 이, 천한 것이!”
과부하가 걸린 집사와 달리, 다이브는 나름 기민하게 상황을 헤아렸다. 이안이 부인의 안전을 위해 야만족놈들을 끌고 왔다 하지 않았나.
“네가,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려는구나!”
다이브가 손에 잡히는 장식품을 들고 부인에게 뛰어들었다. 불륜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안이 부인을 도와줄 리 없지 않나. 애초에 기사들도 그것을 의심했다 하니, 모든 게 퍼즐처럼 딱딱 맞아 들어갔다.
“안 됩니다. 다이브 님.”
“이거 놔! 이, 개새끼들 같으니라고. 너도 이안이랑, 저년이랑 한패지? 신의 천벌이 내리칠 것이다!”
“진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부인에게 해를 가하면, 저 문이 열리고 나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 순간, 바닥이 꺼질 것 같은 진동이 울렸다.
콰앙! 쾅! 쿵!
쨍그랑!
굳이 보지 않아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사의 몸이 던져지고, 바닥에 내리꽂히고, 창문이 깨졌으며, 계속해서 벽에 처박혔다.
다이브는 희게 질린 얼굴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제, 젠장.”
그리고 이내 로만드로의 손을 떨쳐낸 다음,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중얼중얼, 알 수 없는 말을 연신 웅얼거리며 자신이 믿는 지하신에게 자비를 청했다.
“허, 참나.”
지하신이라는 종교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리 실제 신도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로만드로는 신기함 반, 황당함 반으로 다이브의 꼬락서니를 계속 지켜봤다.
“기도하게 내버려 두세요. 자꾸 덤비는 것보다 저러고 있는 게 낫네요. 보기에는 역하지만.”
“닥쳐라! 사악한 악마야!”
“지랄.”
리엔 부인은 이제 거리낄 것 없다는 듯 가운뎃손가락까지 들어 보였다. 모욕으로 확 붉어진 다이브가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부정한 말을 내뱉는 것보다 기도에 집중하는 걸 선택했다. 그는 아예 엎드리다시피 해서 부르짖었다.
콰앙! 쾅!
“으아아악!”
“에헤이! 에이! 그러면 안 되지!”
기도 소리와 맞게 쿵쿵 울리는 둔탁한 굉음과 괴성. 비등한 싸움이 아니라, 힘의 우위가 확실히 정해져 있는 싸움이 분명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소란이 점점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히 그쳤다.
로만드로를 제외한 사람들이 굳게 닫힌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열리기는 할지, 열린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하는 시선이었다.
끼이익.
조금씩 열리는 문틈으로 복도 벽이 보였다. 피 묻은 손바닥 자국이다. 길게 이어진 핏자국이 누구의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로만드로는 사탕을 와작거리며 물었다.
“끝났나?”
“남은 기사가 한 명 더 있는데, 그자는 저택에 없는 것 같아서 베릭에게 추격을 보내려고 합니다.”
물론, 천려의 전사도 일부 동행할 예정이었다. 다이브는 혹여나 또 시체를 보지 않을까 질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안은 부인의 맞은편에 앉으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치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할 말 있다고 부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키지 않지만 도망칠 방도도 없고, 불안하게 떨리는 심장 때문에 속이 울렁거릴 정도다.
다이브는 애써 침착하게 착석했다.
“우선,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하지만 들으셨다시피 저자들은 이제 메렐로프와 관련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게 지금 타당한 말이라고 생각하나?”
“다이브 님. 저는 지금부터 몇 가지 제안을 드릴 겁니다. 잘 생각하셔서 현명한 선택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인. 부인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안은 다이브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제 할 말을 밀어붙였다. 리엔 부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차게 식어버린 차만 입에 대었다.
“두 분이 공생할 의지는 없어 보입니다. 맞습니까?”
“네. 없어요.”
“하, 참나. 지금 누가 할 소리를!”
제일 평화적인 방법은 관습대로 다이브가 작위를 잇되 모든 권한은 부인에게 위임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리하면 따로 황궁에 보고할 것 없이 사안을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이 저리 나오니…….
“서로의 안위를 위해 둘 중 한 명은 메렐로프를, 정확히는 바리엘을 떠나는 게 좋겠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다이브 님이셨으면 합니다.”
“이것들이 지금 무슨 수작질을! 밖에! 밖에 누구 없는가!”
열이 뻗친 다이브가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댔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천려족 전사 두어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끼이익.
“불렀습니까? 이안 님.”
“아닐세. 정리에 힘쓰게나.”
아무런 힘 없이 외곽 저택에서 기도만 하던 사이비 이단 후계자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콰앙!
문이 굳세게 닫히자, 다이브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알 수 없는 기도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깔끔한 건 메렐로프 이름을 가진 자들이 모두 없어지는 거지만, 그리되면 부인께서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황궁 조사관이 내려와 사안을 다시 확인하고, 저처럼 황제께 새로운 작위를 임명받아야 하는데, 능력을 증명하는 게 여간 고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능력을 증명한다고 한들, 그녀가 선택받을지도 미지수였다. 높은 확률로 게일이나 다른 견제 세력이 사람을 집어넣으려고 할 것이다. 에리카처럼 말이다.
“저는 그때쯤이면 중앙으로 올라가고 있을 터이니, 적극적으로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요?”
“다이브 님이 영지를 오래, 아주 오래 비우는 게 제일 이상적입니다. 지하신이면 북반구에 있는 토올룬국이 기원 아닙니까? 수행이라도 다녀오심이 어떨까, 제안하는 겁니다.”
말이 수행이지 그쪽으로 가버리라는 말이었다.
“금화 1,000닢 정도면 수행길 오르는 것에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거기가 얼마나 먼 줄은 아는 건가?”
“꼬박 걸어서 세 달이라고 하던데요.”
일종의 공백. 백작이 죽고 승계 전에 다이브가 떠난다면 영주 자리는 말 그대로 붕 뜨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황궁에서도 딱히 개입할 거리가 없으며, 복잡하게 부인이 인증받고 수 써가며 고군분투할 필요도 없다.
“저자가 떠난다 하고 이안 경이 간 다음 다시 돌아오면 어떡하죠? 몰래 황실에 이런 일이 있었노라 언질하면요?”
“저자? 저자라고 했나? 지금?”
리엔 부인은 다이브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처럼 핏대를 세웠으나, 이안과 로만드로 앞인지라 쉬이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생각해 두신 바가 있나요?”
“네. 대신 부인께서 돈을 좀 쓰셔야 합니다만. 그 정도는 문제없을 거라 판단됩니다. 중요한 것은, 다이브 님의 결정이죠.”
이안은 생긋 웃으며 다이브를 쳐다봤다. 동시에 쏟아지는 로만드로와 리엔 부인의 시선. 다이브는 궁지에 몰린 기분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안의 제안을 거절하면 그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지하신께서 알려주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