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97
제97화. 낭보와 비보
길은 정해졌다.
로만드로는 초가 다 녹아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펜을 사각거렸다. 메렐로프 백작의 평소 행태를 비롯하여 사건의 전말을 거짓 없이, 하지만 최대한으로 유리하게 작성하느라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다.
사락.
“로만드로 님. 이건 여기에 두면 될까요?”
“아, 해나. 그래. 부탁한다.”
메렐로프 저택 하인들의 증언서였다. 대다수가 문맹인지라 그저 손도장만 찍혀있었지만, 그것이 부인의 결백과 다이브의 순례를 증명하는 문서가 될 것이었다.
“그나저나, 중앙에서도 좀 놀랄 것 같네.”
“당연히 그러하겠지요. 백작은 하루아침에 노예한테 죽임을 당했지, 유일한 후계자인 동생은 지하신을 믿는 이단이라니.”
“그것도 그건데, 자네가 메렐로프에 굴라 씨앗을 판 것도 놀라워할 걸세. 보고서 답변받은 것에는 아직 굴라 대중성에 대한 언급이 없거든.”
“중앙에서 답신이 왔습니까?”
이안의 물음에 로만드로가 잠시 머뭇거렸다. 태도로 보아 영 긍정적인 답신은 아닌 모양이다.
“그, 몰린 경을 먼저 중앙으로 올려보내라 하셨네.”
“마리브 저하가요?”
“그렇다네.”
“이런.”
이안은 진심으로 혀를 차댔다. 마리브와 게일의 기 싸움에서 누가 승자고, 패자인지 드러나는 대목이지 않나.
“아쉽긴 하지만,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지요. 귀하게 모실 몸들도 아닌데, 당장 마차를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괜찮겠나? 그리하면 중앙서 다시 만날 터인데.”
“어쩌겠습니까. 다시 만나는 날에는 서로의 처지가 확실할 터인데.”
이안은 귀족이자 마법사. 몰린은 행정부의 간부.
차이가 여실하지 않나.
“아무튼, 중앙에서는 굴라가 식용화 안 되었다니. 이번 겨울까지는 꽤 많은 자들이 힘들겠군요.”
“참, 메렐로프에서 재배에 들어간 것들은 어찌하지?”
백작이 매매하여 굴라 배급을 목표로 하였던 씨앗들이 아직 창고에 한가득 실려있다 하였다. 속된 말로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 사달이 났으니까.
“글쎄요. 이미 저희는 값을 받았으니 부인의 의중에 따르는 것이 좋겠는데요.”
“부인은 서둘러 나누고 재배하여 풍족하게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네.”
“그러면 그리하십시오. 우리 쪽 주민들에게도 굴라 매매를 완전히 자유화하고요.”
볶은 굴라 외, 재배가 가능한 생굴라 역시 거래 대상에 포함하라는 뜻이었다. 로만드로는 펜을 내려놓고 집무실 한쪽에 놓여있는 궤짝을 힐끔거렸다.
“벌써 두 궤짝이나 들어왔는데. 조만간 은행을 또 가야겠구먼. 얼마 정도 할까? 상자당 금화 200닢 정도는 될 것 같은데.”
로만드로의 중얼거림에 이안 역시 셈을 시작했다. 저런 자잘한 수입에 굴라 매매로 얻은 3,500닢, 게다가 부인에게 받은 사례금 5,000닢을 더하면 벌써 헌납금 대부분을 모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축하하네. 이런 흐름이라면 내년 여름 되기 전에 헌납금을 모두 완납할 수 있을 걸세. 그러면 자네는 진정한 귀족이 되는 거지. 아, 그때는 내가 꼭 조심하여 존대를 하도록 하지.”
“편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도와주시는 것만 해도 제가 은혜를 많이 얻었습니다.”
이안이 진심으로 치하하자, 로만드로의 광대가 슬며시 올라왔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황궁으로 보낼 보고서를 작성했다.
“참, 메렐로프 쪽이 대충 정리되면 우리도 슬슬 짐을 싸서 출발해야 하네. 보름 후에 떠나면 중앙까지 여유 있게 갈 것 같네만.”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짐이랄 게 없어서 말입니다. 대동할 식구도 많지 않고요.”
이사가 아니라 이안과 몇몇 일행만 이동하는 것이었다. 마차 하나에 그의 짐이 다 들어가리라. 중앙에서는 로만드로의 저택에서 신세를 질 요령이었으니, 부산하게 챙겨봤다 민폐만 될 것이다. 데려갈 식구라 해봤자 베릭 뿐이고.
“보자, 정리할 건 이게 다인가?”
로만드로는 두툼한 서류를 정리하며 물었다. 서류의 양으로 보아, 전서구 한 마리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다.
“참, 자네 어머니는?”
“제 어머니요?”
“필리아 말일세. 계속 숲에서 산다 하던가?”
“아아. 마을로 내려오라고 했는데, 영 마음이 없는 모양입니다. 한파를 이기지 못할 때나 그리한다 하여, 일단 마을의 나무지기들에게는 오가며 좀 봐달라 요청할 생각입니다.”
브라츠라는 이름도 사라졌고, 전투의 흔적으로 마을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필리아에겐 마냥 행복하고 그리운 고향이 아닌지라, 숲에서 즐기는 생활에 흠뻑 젖어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중앙으로 가면 오래 못 볼 터인데.”
“어차피 같이 간다 하여도 자주 못 볼 겁니다.”
“하긴. 그래. 마법부에서 자네를 가만두겠나? 아, 미안하네. 이건 내 개인적인 예측일세.”
별생각 없이 중얼거리던 로만드로가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 뜻을 바로 알아챘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웨슬리 장관이라 하였나요? 약이든 독이든 바짝 올라와 있겠지요. 아주 갈려 나갈지도 모르겠어요.”
“그래. 새벽달 뜰 때 나가서 별 보며 들어온다는 마법사들 아닌가. 어머니를 모셔가도 제대로 못 모실걸세.”
그만큼 훈련량이나 업무량이 많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겪어 봤던 것이기에,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부로 배치받기 전,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베릭은 아직까지 안 오고 대체 무엇 하는지 모르겠네.”
로만드로는 점점 어두워지는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다. 메렐로프의 삼기사 중 대장으로 생각되는 푸울루를 추격하러 나간 지 반나절째.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으니 걱정이 되는 건 당연했다.
“전사들이 붙었지?”
“네. 무슨 일이 있다면 매가 날아왔을 겁니다. 오늘 밤까지 기다려 보도록 하지요. 로만드로 님, 보고서 다 작성하시면 다음에는 하완국 상단 확인해 주세요.”
“아, 그래. 알겠네.”
리엔 부인이 걱정했던 다이브의 뒤처리는 하완 왕국이 맡을 일이었다. 정확히는, 하완을 통해 토올룬국으로 가는 상단이.
“괜찮은 곳이 있나 모르겠어.”
“비용은 고려할 대상이 아니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쪽이면 좋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오래된 상단을 위주로 봐야겠죠?”
“이동 방식은?”
로만드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탁에도 여러 가지 방식이 있었다. 수가 잠행했던 것처럼 상단과 동고동락하며 움직이거나, 아니면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움직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확실한 게 좋겠죠.”
“그래. 나도 동감일세.”
죄수 호송하듯 단단히 옥죄여 움직이거나.
아무래도 다이브는 후자의 방식이 제일 잘 맞을 것 같았다.
“순례자라면 고통과 수난을 동반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안의 농에 로만드로가 오랜만에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출자처는요?”
“비용은 메렐로프에서 다이브의 저택을 팔아서 마련한다고 하더군. 이른 시일, 그러니까 우리가 떠나기 전 확정을 짓는 게 좋겠어. 당장 내일 부하와 함께 결정하도록 하지.”
“리엔 부인에게 덧붙이세요. 다이브를 책임지고 하완까지, 그리고 토올룬까지 데려갈 사람을 정하라고.”
“음. 확실히 장치를 하나 더 해주면 좋겠지.”
‘개인적으로는 클라크가 적임자인 것 같다만, 그건 부인의 선택일 터.’
마침 하완으로 가는 길목에 병사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에리카의 등장으로 도적이라 여겼던 오해가 아직 안 풀렸기 때문이다. 에리카와 조사단은 그 난리 통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소식이 없다.
“그리고 해나.”
“네?”
해나는 잡다한 비품을 이리저리 옮기며 두 사람의 말을 훔쳐 듣고 있었다. 이안은 가까이 오라는 뜻으로 가벼이 손짓했다.
“얘기는 잘 들었는가?”
“어어…. 비밀스러운 얘기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니 머릿속에 꼭꼭 새겨두라는 뜻이다. 일들을 함께 정리하면서 보름 동안 확실히 배워두어라.”
“확실히 배우다니요?”
“내일부터 메렐로프에 오가며 집사에게 업무를 가르쳐 달라고 하면 된다.”
이안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해나는 눈만 끔벅끔벅,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걸 곁눈질로 지켜보던 로만드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집사님 업무를 제가요?”
“그래.”
“제가? 제가? 제가 집사입니까?”
“눈치가 영 많이 죽었구나.”
해나가 두 손으로 하관을 가렸지만, 쩍 벌어진 입이 그대로 보였다. 단 한 번도 생각을 못 했다는 증거였다.
집사란 자고로 귀족의 예법과 제도에 능통하여야 했고, 글자를 읽을 줄 알아야 하며, 주인의 부재 시 완벽하게 저택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 아니던가.
“저는, 못, 못 할 것 같은데요.”
“어째서?”
“배운 게 없는 터라…….”
“그러니 배우라 하는 게지. 사먼이란 자다. 유능한 자니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다. 더 할 말 있나?”
다른 이유가 없다면 받아들이라는, 단호한 대꾸였다. 해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중얼거렸다.
“혹시 복도를 좀 뛰어다녀도 되겠습니까?”
“그래. 아직 자는 사람도 없는데.”
“실례합니다.”
딸깍.
해나는 평소 잘 하지도 않던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바로 들려오는 와다다 소리. 해나가 즐거움에 사무쳐 복도를 내지르는 것이다.
로만드로가 웃음기를 털어냈다.
“참나. 저래서 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해나는 믿을 만한 자입니다. 업무적인 모자람을 메워줄 사람들도 많고요. 네르사른 님도 있고, 로만드로 님의 부하도 두 명 남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원래 한 명만 남기로 했는데 메렐로프가 저리되었으니, 분명 황궁에서 이런저런 확인 지시가 내려오지 않겠나. 그걸 보고 올라오라 일어두었어.”
“듣기로는 남는 자들이 미혼자라 그렇다 하던데요.”
“지 팔자지, 뭐. 그러니까 누가 결혼하지 말래?”
로만드로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이안이 살포시 웃음을 흘렸다. 그걸 마지막으로 다시 집무실에는 사각사각, 펜촉 갈리는 소리만 듣기 좋게 울렸다.
톡톡. 톡.
밤이 점점 깊어지는 시각. 무언가 창가를 두드려댔다. 어둠과 같은 검은 매가 금색 눈을 부라리며 이안을 불러대고 있었다.
“이런.”
“전사의 매인가?”
베릭에게 문제가 있다면 매가 올 것이라, 농담 식으로 말했던 게 농담이 아니게 되었다. 이안은 바로 창문을 열어 매를 안으로 들였다. 녀석의 발목에 작은 쪽지가 묶여있었다.
바스락.
“무어라 적혀있나? 혹시 베릭 그놈, 죽은 건 아니겠지?”
로만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지만, 이안은 대답 없이 묘한 표정만 지었다. 그는 이내 쪽지를 보여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필이면 같이 간 전사들이 바리엘어에 능통하지 않나 봅니다.”
-베릭. 기사. 몬느에. 추격. 영원히.
단어의 나열로만 상황을 전하고 있었으니, 그 뜻을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눈치가 보통이 아닌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어도 짐작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문제는 문제가 맞아.”
“그것 하나만 확인 가능하겠군요.”
“몬느에면, 저기, 탄광을 말하는 게 아닌가?”
“맞습니다. 추격이 거기까지 이어졌나 봅니다.”
영지 안에 있는 건 아니었고, 메렐로프와 이쪽 영지가 끼고 있는 산맥의 깊은 곳에 나 있는 탄광이었다.
“가봐야겠지?”
로만드로가 슬쩍 기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양피지. 벽난로 냄새를 묻어버릴 만큼 잉크 냄새가 짙다.
이안은 두꺼운 웃옷을 챙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만드로 님은 일을 보십시오. 이제 보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부지런해야 합니다. 베릭에게는 제가 가보죠. 밖에 누구 있는가?”
“네. 이안 님. 부르셨습니까?”
“마차와 호위병을 준비해라.”
“이 밤에요? 어디 가시는데요?”
하인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으나, 이안은 방긋 웃으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을 뿐이다.
“몬느에. 베릭 데리러 간다.”